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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오색기 나부끼며 째보선창에 정박한 고깃배들(1960년대)
 오색기 나부끼며 째보선창에 정박한 고깃배들(1960년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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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창은 분주하다. 크고 작은 목선들이 저마다 높고 낮은 돛대를 옹긋중긋 떠받고 물이 안보이게 선창가로 빡빡이 들이밀렸다. 칠산 바다에서 잡아가지고 들어온 젓조기가 한창이다. 은빛인 듯 싱싱하게 번쩍이는 준치도 푼다. 배마다 셈 세는 소리가 아니면 닻 감는 소리로 사공들이 아우성을 친다.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속같이 분주하다."
 

1930년대 군산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소설 <탁류>의 앞부분이다. 해마다 입하(5월 6일경) 때 조기 파시가 섰던 째보선창 풍경을 그리고 있다. "칠산 바다에서 잡아가지고 들어온 젓조기가 한창이다"는 대목과 "지게 진 짐꾼들과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이 장속같이 분주하다"는 대목은 50~60년대 선창 분위기와 너무도 흡사해 실제 현장을 보는 듯하다.

조기는 머리 부분에 귀돌이 있어 석수어(石首魚)로도 불린다. 함경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식용으로 인기가 좋은 어종으로 알려진다. 육질이 연하고 지방분이 다량 함유된 조기는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국민 생선'으로 사랑받아왔다. 바닷바람에 꾸둑꾸둑 말려 굴비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고, 젓갈을 담아 가을 김장 때 사용하였다.

예로부터 서해는 어족자원의 보고(寶庫)로 알려졌다. 해마다 4월이면 제주도 남해(동중국해)에서 겨울을 지낸 조기떼가 난류를 따라 북상하는데, 어부들은 '곡우사리'를 고비로 조기잡이 '골든 시즌'을 맞이하였다. 칠산 앞바다-군산 앞바다(고군산군도)-연평도 근해를 잇는 황금어장이 형성됐기 때문. 어장에는 전국 각지 어선들이 만선의 꿈을 안고 모여들었다.

'비련의 공간'이기도 했던 '째보선창'
 
 군산 지역 어민들의 생계수단이었던 3톤급 목선(50~60년대)
 군산 지역 어민들의 생계수단이었던 3톤급 목선(50~60년대)
ⓒ 군산 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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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가을 20톤급 목선으로 '동중국해' 어장을 국내 처음으로 개척,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군산의 어부들. 그들은 어장이 조성된다는 정보를 접하면 아무리 먼 바다도 마다치 않고 달려갔다. 겨울에 명태잡이가 시작되면 소형 어선을 이끌고 강원도 속초 앞바다까지 진출하였고, 조기철인 소만 사리(5월 21일 전후) 때는 연평도로 출어했다.

무동력선이 주종을 이뤘던 50~60년대. 어부들의 직장은 3~5톤급 돛단배(목선)였고, 작업장은 '망망대해'였다. 자그만 목선에 몸을 의지하고 거친 파도와 싸워야 했던 어부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들의 어로작업은 조업이 아니라 사활이 걸린 투쟁이었다. 크고 작은 선상 사고와 돌풍·태풍 등으로 수많은 어부가 희생됐던 것.

소설 <탁류>의 배경으로 알려지면서 지역 문학기행의 상징이 되기도 했던 째보선창, 포구는 진즉 복개되어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그 옛날 선창가 막일꾼들과 어민들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는 끊임없이 전해진다. 째보선창은 수백, 수천의 아낙들이 만선의 꿈을 품고 바다로 나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비련의 공간'이기도 했다.

만선의 꿈 안고 출어했던 어부 1천여 명 희생
 
  ‘연평도 폭풍피해 판명’ 제하의 ‘동아일보’ 호외(1934년 6월 4일)
  ‘연평도 폭풍피해 판명’ 제하의 ‘동아일보’ 호외(1934년 6월 4일)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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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연평도 폭풍피해 현황'을 전하는 1934년 6월 4일 치 <동아일보> 호외다. 호외는 '5백 생명(五百 生命)이 조난(遭難) 당하는 등 피해가 의외로 심대(甚大)하다'고 전하고 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1일 저녁, 모내기철 앞두고 내린 단비가 다음날 새벽 폭풍으로 돌변, 가옥과 창고건물이 파손되고 1천여 명의 조난자가 발생하는 등 황금어장은 끔찍한 참사로 뒤덮였다.

연평도는 일제강점기에도 파시 때면 운집한 어선들로 해안가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조선 팔도는 물론 일본의 장기(長崎), 웅본(熊本), 좌하(佐賀), 복강(福岡) 등지에서 1천여 척의 어선이 몰려들었다. 그해에도 제1회 조(4월 27일~5월 3일)와 2회 조(5월 9일~18일)에 30여만 원의 어획고를 올리는 등 1백만 원 돌파를 전망하고 있다가 엄청난 변을 당했던 것.

군산에서도 만선의 꿈을 안고 출어했던 어부들이 익사하거나 실종되는 등 피해가 컸다. 이는 미증유의 해상 조난 사고로 신문은 "연평도에서 침몰한 어선은 군산부 동빈정(東濱町) 임겸상회 군산냉장고(林兼商會 群山冷藏庫) 경영의 조기잡이 배로 판명됐다"며 "군산에서 떠난 배 척수는 314척(파손 200여 척)이고 그 배에 탄 어부들은 1천500명"이라 전하였다.

조난당한 군산 어선 300여 척은 사고 20여 일 전 군산을 떠나 칠산 앞바다에 들러 조업하고, 북상하는 조기떼 따라 연평도 근해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조난당한 시간은 2일 오후 6시경으로 추측되며 생존자 450여 명(1천여 명은 행방불명)은 연평도에 수용 구조 중이나 식량 결핍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고 신문은 보도하였다.

구천을 떠도는 혼들 넋 위로하는 추모제 지냈으면
 
 조난 당시 연평도 해안가 참상(1934년 6월 5일 치 ‘동아일보’)
 조난 당시 연평도 해안가 참상(1934년 6월 5일 치 ‘동아일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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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빈정(째보선창)에 위치한 임겸상회 군산냉장고는 일본인 나카베 이쿠지로(中部幾次郞)가 운영하는 수산 재벌기업으로 파악된다. 일제 식민치하라서 그랬을까. 중앙지가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 큰 조난사고로 어선이 200여 척 파손되고, 사상자만 350명 발생했으며, 1천 명 넘는 어부가 생사불명 됐음에도 신원이 밝혀진 어부는 한 명도 없어 더욱 서글프게 느껴진다.

군산은 개항(1899) 이후 행운환(여객선), 서조호(무허가 화물선), 서해페리호(여객선) 등의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그중 행운환은 1953년 1월 금강 하류에서 침몰, 100여 명이 익사하거나 실종됐다. 서조호는 1968년 5월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 16명이 익사하고 5명이 실종됐다. 서해페리호는 1993년 10월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침몰 292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처럼 광복 후 발생한 선박 침몰사고는 익사자와 실종자 신상 및 유가족 보상 내용까지 언론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수산 재벌회사(임겸상회) 소속 어선 침몰사고는 사상자 거주지와 이름은 물론 관계 기관이나 회사 임원들이 모여 실종자 신원확인 및 익사자 장례, 유가족 보상 문제 등을 논의했다는 기사는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연히 발견한 대규모 해상 조난사고. 일제의 핍박과 착취에 시달리다가 한스럽게 숨져간 어부들의 아픈 사연은 그동안 구전으로조차 접할 수 없었다.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1천여 영혼들. 사고 이후 연평도에는 '조난자 위령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군산에서도 한 맺힌 고혼들의 넋을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추모제라도 지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동아일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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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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