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컴과 마리> 영화 포스터

<맬컴과 마리> 영화 포스터 ⓒ 넷플릭스

 
민폐 캐릭터는 어디에나 있다.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맑은 날에 어두운 과거를 소환해 다른 사람 기분까지 망쳐 버리는 사람. 그래서 뭇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사람.

어쩌나. 그게 바로 나다.

내가 얼마나 징그러운 인간인지 말하려면 201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나는 연인과 함께 스페인을 여행 중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이었지만 우리는 타국에서 맞는 기념일을 위해 꽤 비싼 레스토랑을 찾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간 어디서도 먹어 본 적 없는 가장 비싼 한 끼를 치렀다. 

맛도, 서비스도 퍽 고급스러웠다. 나는 이곳을 찾아낸 연인에게 한 번 더 반했다. 담당 서버들은 빵이나 와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채워주었고, 식사 내내 불편함이 없도록 도왔다. 우리는 낯선 도시와 요리, 와인에 취해 한껏 기분이 고조되었다. 

그러다 기어이 사달이 났다. 내가 코스로 나오는 요리 하나를 맛보고 포크를 내려놓자 담당 서버가 얼른 다가와 물었다. 혹시 입에 맞지 않느냐고.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저한테는 좀 짜네요." 내가 한 말은 그게 전부다.

서버들은 잠시 뒤 다른 요리를 내왔고 나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소란이나 잡음도 없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나의 연인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나를 탓했다. 굳이 그런 말을 했어야 하느냐고. 그냥 네가 한 번 참고 먹었으면 모두가 좋은 것 아니겠냐고. 근사했던 분위기는 한 순간에 엉망이 됐다.

그날 이후로도 비슷한 일은 계속 있었다

그 일로 나를 민폐 캐릭터라고 명명하는 거냐고? 천만의 말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나는 똑같이 대처할 거다. 조금 짜다는 게 무슨 대수인가. 내가 징그러운 인간인 것은 다른 데 있다. 바로 7년 전 그 일을, 이제 남편이 된 그날의 연인에게 지금까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7년 전 그날, 도대체 왜 그랬어?"

너무한가? 그럴지도. 하지만 명심할 게 있으니, 옛날 일을 소환해가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또 우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한이란 게 있는 법이다. 명치에 꽉 걸린 과거가 아직 소화되지 않아 본인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누군 그게 유쾌하고 신이 나서 그럴까.

남편은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아프게 하는 면이 있다. 그는 늘 남을 배려한다. 완벽한 '남'일수록 더. 내가 하는 농담이 있다. 당신은 오늘 처음 본 사람을 1순위, 어쩌다 만나는 사람을 2순위, 가까운 사람을 3순위로 여기고, 한 침대를 쓰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고.

즉, 그날 이후로도 비슷한 일은 계속 있었다. 호텔 데스크에서 이중 결제를 우려해 문의하자 그것도 모르냐며 그 자리에서 면박을 준 것이 그다. 금방 사온 과일 열 개 중 여덟 개가 썩어 있어도 참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나와 모처럼 외식을 하기로 해놓고 술 먹자고 전화한 지인의 연락에 바로 달려 나가는 것엔 이제 화도 나지 않는다.

연인의 싸움엔 그들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넷플릭스 <맬컴과 마리> 스틸 컷

넷플릭스 <맬컴과 마리> 스틸 컷 ⓒ 넷플릭스

 
연인의 싸움엔 그들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러니 겉에서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다. '쟤들 왜 싸워? 고작 반찬 때문에?' 싶다가도, 그 반찬 하나에 얼마나 많은 울분과 한이 서려 있을까 싶으면 참견은 쏙 들어간다. 이러니 단 두 사람, 한 쌍의 연인이 등장하는 <맬컴과 마리>를 보며 흠뻑 몰입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오늘은 맬컴에겐 생일 그 이상의 날이다. 파티가 끝나고 새벽 한 시가 넘어 귀가했지만 아직도 못다 즐긴 여흥이 남았다. 그는 더 축하하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한 영화가 시사회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삐딱한 백인 기자들까지 칭찬 일색이니 더 이상 기쁠 수 없다.

그런데 어쩌나. 그의 연인 마리는 이 축하에 동참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의 자축 세리머니에도 한 발짝 물러서 있다. 왜 이 즐거운 날 산통을 깨려 하나? 

제 흥에 취해 그녀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던 맬컴. 한참 뒤에야 물어본다. 왜 화났어? 답을 피하던 마리는 그의 끈질긴 추궁에 마지못해 답한다.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할 때 나만 쏙 빼놓을 수 있었느냐고. 맬컴은 사소한 것에 집착해 분위기 좀 망치지 말라고 타박한다. 그런가?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머니, 조명 감독의 에이전트, 3학년 때 담임까지 쭉 열거하면서. 그런데 그날 하루 종일 곁에 있던, 심지어 그의 영화에 결정적인 모티브가 되었던 마리만 쏙 뺐다. 마리의 존재 덕분에 만든 영화인데 그녀만 배제했다. 그런데 이게 아무것도 아닌가? 

마리는 이 일이 그들 관계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말하고, 싸움은 진흙탕이 되어간다. 사랑해서 막말을 퍼붓는 상황. 너무도 익숙한 그림이다. 마리는 맬컴이 작품에 대한 그녀의 기여도는 물론, 그녀의 존재 자체를 하찮게 여긴다는 것에 분개한다. 맬컴은 그녀의 발상이 정신적인 불안정에서 온다고 몰아붙인다.

맬컴에게도 변이 있다. 그는 약물 중독자였던 마리를 사랑했고 변함없이 그녀 곁을 지켰다. 하지만 늘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그에게서 찾는 마리가 버겁다. 가만 보면 마리는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는 자신만을 너무 사랑해서 문제다. 그래서 서로에게 끌렸으며 그렇기에 불협화음이 일어나는지도.

다른 등장인물 없이 둘만의 대화로 전개되는 영화다.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결혼 이야기>나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의 팬이었다면 환영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에 과도하리만큼 몰입하고 말았다. 마리는 말한다. 당신은 세상 모든 사람을 배려하면서도 나만을 배려하지 않는데, 더 기막힌 것은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타인을 배려하다 못해 자기 자신조차 후순위로 두는 남편을 깊이 연민하고 사랑한다. 그럼 그의 모든 것을 전부 포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지체 높은 성현들은 그렇게 충고할지 모르나 한낱 미물인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생각난 김에 오늘 또 따져 물어야겠다. 2014년 그날, 꼭 그랬어야 했느냐고. 
맬컴과 마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