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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아바나 카사블랑카 언덕
 
카사블랑카 언덕의 예수상
 카사블랑카 언덕의 예수상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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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히마르 해변을 나와 우리가 향한 곳은 아바나 항 건너 올드 아바나 시내가 보이는 카사블랑카 언덕이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예수상과 함께 체 게바라의 작은 박물관이 있다고 했다.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 시절 집무실로 썼던 공간이라던가.

버스에서 내리자 무엇보다 거대한 하얀 예수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 예수상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쿠바의 조각가 질마 마데라(Jilma Madera)가 제작한 것으로 1958년에 세웠다고 한다. 높이는 20미터라고 했는데, 올드 아바나에서 바라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낙산사나 베트남 다낭 영흥사에 있는 해수관음상과 비슷해 보였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주장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대놓고 거대한 예수상이라니. 새삼 종교의 힘을 느꼈다. 아무리 국가가 개인의 생활을 통제한다고 해도 종교는 쉽지 않다. 그것은 불확실한 현실에서 그래도 희망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 거대한 예수상이 쿠바의 저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종교까지 다 포용할 수 있는 쿠바의 공산주의. 사실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 이후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었다. 그런 쿠바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경제 봉쇄를 취한 건 미국이었다.

이에 쿠바는 살아남기 위해 공산주의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니 종교에 대해 관대할 수밖에. 체 게바라가 쿠바 민중에게 존경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예수를 닮았기 때문인데 이는 종교에 관대한 쿠바 공산주의와도 관계가 깊다.
 
체 게바라 박물관
 체 게바라 박물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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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예수상 건너편에 위치한 체 게바라 박물관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예수상과 체 게바라 박물관이라.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쿠바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둘이 이 카사블랑카 언덕에 모두 모여 있구나.

체 게바라의 집무실이었던 박물관은 규모가 작았다. 우리가 며칠 뒤 찾아갈 산타클라라에 체의 가장 큰 박물관이 있으니, 이곳은 모든 것이 약식이었다. 그가 사용했던 사무실과 침실을 변경하여 그의 오래된 사진과 사용하던 가구, 물건 몇 점들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박물관을 안내하는 직원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깃들여 있었다. 그것이 쿠바에서 체의 위상인 듯했다.

쿠바와 베네수엘라 
 
아바나항의 석유저장고
 아바나항의 석유저장고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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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나온 뒤 언덕에 서서 아바나 항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거대한 석유 저장고가 보였다. 가이드는 그곳에 저장된 석유가 전량 베네수엘라로부터 온다며, 쿠바 곳곳에 붙어있는 차베스의 초상화가 우연이 아님을 이야기했다.

80년대 말 쿠바는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위기에 빠졌었다. 쿠바의 산업 자체가 구소련의 지원으로 버티고 있었기에 붕괴는 시간 문제인 듯 보였다. 이때 쿠바를 구원해준 것이 바로 베네수엘라 차베스였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를 라틴 혁명의 아버지라 부르며 원유를 아주 싼 값에 제공했다. 반미를 기치로 하는 차베스에게 피델은 혁명의 아이콘이자, 꼭 함께 해야 하는 동지였을 것이다. 북한에게 중국이 있었던 것처럼 쿠바에게는 베네수엘라가 있었다.

쿠바는 이를 보답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를 친구의 나라로 지정하고 의료진과 교사 등을 무료로 파견한다고 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선진적이라는 의료시스템을 외교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쿠바는 코로나19로 힘겨워하는 이탈리아에도 의료진을 보냈는데, 이는 이탈리아인들이 특히 쿠바로 여행을 많이 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1번 코로나 환자?! 
 
아바나 센트로의 거리
 아바나 센트로의 거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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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뒤 따로 일정은 없었다. 6시에 맞춰 아바나의 일몰을 보기 위해 카사블랑카 언덕 옆에 있는 모로요새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곳은 몇해 전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송혜교와 박보검이 만난 곳으로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곳이었지만, 원래부터 아바나 시내를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일몰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갑자기 붕 떠버린 시간. 여느 여행 같았으면 일정이 따로 없어도 1분1초가 아까워 혼자라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을 테지만 그만 숙소로 들어가 쉬기로 했다. 시차적응을 못해 졸리기도 했지만 적도에 가까운 쿠바의 2월은 겨울인데도 너무 더웠다. 도대체 여름엔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침대에 누워 로비에서 산 인터넷 와이파이 카드로 쿠바에서 처음으로 인터넷과 접속했다. 보통 쿠바에서는 인터넷을 하려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영 통신사 '에텍사(ETECSA)'에서 와이파이 카드를 구매한 뒤 와이파이 존을 찾아야 했지만, 호텔 투숙객은 호텔에서 와이파이 카드를 산 뒤 호텔 내부에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인터넷이 연결되자마자 가족에게 안부를 전했다. 아내는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쿠바에 잘 들어갔냐고 물어왔다. 한국은 난리라고 했다. 우리가 출국한 날짜가 2월 19일이었는데 그 다음날 코로나19 31번 환자가 등장하면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언론을 살펴봤더니 과연 그랬다. 잠잠해지던 국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31번 확진자의 등장과 함께 신천지 교회 구성원을 타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한국인 여행객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한다고도 했다. 우리가 아무 일 없이 쿠바에 들어온 건 정말 재수가 좋은 경우였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이렇게 심각해질 줄이야. 설마 한국인이라고 쿠바에서 돌아다니거나 출국할 때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2+2=5?
 
2+2=5?
 2+2=5?
ⓒ 박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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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때문에 앞으로 여행하는데 제약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자 가만히 쉬고 있을 수 없었다. 부랴부랴 짐을 챙긴 뒤 호텔에서 나와 무작정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해외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올드 아바나를 걷는 대신 쿠바인들이 실제 거주하고 있는 아바나 센트로로 향했다. 그래도 여행의 백미는 그 지역 사람들이 사는 공간 아니던가.

아바나 센트로는 아침에 잠깐 돌아다닌 올드 아바나와 느낌이 완전 달랐다. 올드 아바나가 유네스코에 등재될 만큼 고전적이고 관광지의 느낌이라면 아바나 센트로는 쿠바의 날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집 앞 골목에서 공을 차고 있었고, 어른들은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더위를 식히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낯선 동양 남자를 바라보는 경계의 눈빛들. 그래도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쿠바는 체 게바라가 사랑했던, 아직까지도 전 세계 인민 해방을 이야기하는 낭만이 살아있는 국가 아니던가. 내게는 그런 쿠바인들이 인종차별을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본 쿠바의 인종분포는 흑인에서부터 백인까지 다양했다. 원주민 역사에서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미국의 반식민지를 거치면서 온갖 인종이 섞인 탓인데, 그들은 비교적 평등해 보였다. 다른 인종끼리 사귀고 있는 경우도 많은 듯했다. 물론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의 차별은 있겠으나 그 정도의 차별은 어느 사회나 존재할 것이다.

돌아다니며 본 광경 중에 가장 궁금한 것은 거리 곳곳에 그려져 있는 2+2=5?라는 그라피티였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너무 다양한 형태로 빈번하게 보였다. 도대체 저게 무슨 뜻이지?
 
아바나의 까삐똘리오
 아바나의 까삐똘리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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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은 이틀 뒤 올드카 기사 마리오 덕분에 풀렸다. 그것은 현재 쿠바 공산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쿠바인들의 표식이라고 했다. 2+2가 어떻게 5가 되느냐는 반문처럼 공산주의 정부가 옳다고 하면 그 모든 것이 옳으냐는 반문이었다. 그러면서 마리오는 그런 쿠바인이 전체 인구의 30%는 된다고 했다.

놀랐다. 공산주의 정부를 공공연히 반대하는 쿠바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런 사실을 그라피티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지만 쿠바는 북한과 비교해서 차원이 다른 자유를 허용하고 있구나. 어쩌면 그와 같은 자유가 자본주의의 본국이라는 미국 옆에서 공산주의 쿠바가 버틸 수 있는 힘이리라.

미국 국회의사당과 똑같이 생긴, 과거 쿠바의 국회의사당이었던 까삐똘리오를 끝으로 여행자의 거리라는 오비스포 거리를 통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자, 이제 그 유명한 아바나의 노을을 보러 가보자.

태그:#쿠바, #아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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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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