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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장다영(Tran thi ngat)씨. 오른쪽은 그의 어머니(Doan Thi Thom)다.
 왼쪽이 장다영(Tran thi ngat)씨. 오른쪽은 그의 어머니(Doan Thi Tho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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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잔 티 응앗(Tran thi ngat). 1987년생이다. 베트남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에서 태어나 자란 잔 티 응앗씨는 2006년 한국에 와 장다영이라는 두 번째 이름을 갖게 된다. 낯선 이름 석 자에 완벽히 적응할 만큼 세월은 빠르게 흘러 다영씨가 한국에 온 지도 15년. 지금 다영씨는 어느새 땅 위에 사계절을 일구는 농민이 됐다.

한국 생활 12년, 깻잎 농사를 시작하다

올해로 한국 생활 15년 차를 맞이한 그는 2018년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정리에 있는 비닐하우스 두 동을 임대해 깻잎 농사를 시작했다. 아이 세 명을 키우는 그가 생산직 야간 조에 근무하는 것보다 좀 더 자유롭게 시간을 운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베트남에는 이런 깻잎이 없어요. '디도'라는 비슷한 향채가 있긴 한데 색도 다르고 맛도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아요. 깻잎은 한국에서 처음 본 거죠."

한국에 오기 전까지 본 적도 없는 깻잎 농사를 결심한 건 회사에 다니며 틈틈이 깻잎 하우스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 덕분이다. 하지만 농사라는 게 막상 나의 일이 되면 사정은 조금 다른 법.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하루를 꼬박 하우스에서 보냈지만, 깻잎이 마르거나 병에 드는 등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도 생겼다.

"병든 깻잎을 들고 이웃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어떤 약을 써야 할지 물어도 보고 부딪치며 배웠죠. 한번 해봐서 안 되면 두 번 도전하고 세 번 도전하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깻잎 농사에 전념한 지 3년, 그 사이 다영씨도 땅과 함께 하는 삶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두 동으로 시작한 하우스는 어느덧 곱절로 늘어 네 동이 됐다. 이제는 로터리를 깔고 비닐을 씌우고 비료를 뿌리고 다시 깻잎을 심는 일부터 납품차가 깻잎을 가져가기 직전인 깻잎 포장까지 모든 과정이 그의 손에서 제법 능숙하게 이루어진다.

"납품 박스를 쌓을 때 박스에 제 이름이 적힌 것을 보면 뿌듯해요. 제가 수확한 깻잎을 다른 사람이 먹는다는 게 신기하고요."

이렇게 수확한 다영씨의 깻잎은 이슬이 내리는 새벽, 납품차에 실려 대전의 오정동과 중앙동, 멀리는 전주까지 실려 간다.
 
장다영씨의 비닐하우스 내부
 장다영씨의 비닐하우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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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베트남, 그리운 하이퐁

"한국에서 농사를 지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사실 저에게 농사가 낯선 일은 아니에요. 베트남 사람들은 보통 쌀, 밀, 옥수수 농사를 많이 하고 어린 나이부터 농사를 돕거든요. 제 가족도 그랬고요."

베트남 하이퐁에서는 따뜻한 날씨와 비옥한 땅 덕에 일 년에 두 번 쌀농사가 가능하다. 쌀농사를 쉬는 2~3개월 동안 옥수수, 고구마 같은 채소 농사도 한 번 더 짓는다. 일 년에 세 번 다른 농사를 짓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이르면 5살부터 온 가족이 농사일을 돕기 시작한다. 7살이 되면 모를 심고 벼를 베는 일에도 제법 능숙해지고 10살부터는 시장에 나가 작물을 직접 판매하기도 한다. 일하는 것이 힘들 법도 한데, 집에서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천성이라는 그에게 어린 시절 경험은 살아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이래저래 살았지만 떠나오니 다 추억이에요. 특히 설날 같은 명절에 고향 생각이 나죠. 설날은 베트남에서도 가장 큰 명절이에요. 2~3년에 한 번은 설날에 베트남에 갔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갈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도 저도 아쉬웠어요."

음력 1월 1일은 베트남의 명절이기도 하다. 설날과 같은 듯 다른 명절 '뗏(tet)'이다. 우리나라는 해외여행을 가는 등 점점 명절이 간소화되는 추세지만, 베트남은 명절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각 지역에 흩어져 사는 온 가족이 모여 붉은 봉투를 건네며 새해를 축원하고 명절 음식을 해 먹으며 신성한 기운을 나눈다. 온 마을이 축제처럼 분주하고 시끌벅적한 연휴는 약 열흘간 이어진다. 설날쯤이면 복숭아나무에 꽃이 아름답게 핀다며 고향의 풍경을 묘사하는 그의 눈가에 그리움이 잠시 반짝인다.

함께라서 더 행복한 친구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 크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의 적응과 설렘만으로 하루를 보내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1년이 다르고 2년이 또 달랐다.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러갔다. 순식간에 지나간 20대, 그동안 고향 하이퐁은 흐릿해지고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삶에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건 가족과 친구들. 특히 같은 고향에서 한국에 와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매일 고향에 온 것 같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재작년에 베트남에 갈 때 열흘 정도 하우스를 비웠는데 그동안 친구들이 일을 도와줬어요. 덕분에 큰 걱정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에 다녀올 수 있었죠."
 
장다영씨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친구들
 장다영씨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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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군서면 일대에서 깻잎 농사를 짓는 6명의 친구가 있어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는다. 일손이 부족할 때나 자리를 비울 때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이유다. "오늘 그 친구 중 한 명이 아이를 낳으러 갔는데, 이런 일이 있을 때 서로서로 도움을 주는 거죠."

하우스 일이 아니더라도 옥천군 결혼이주여성협의회를 통해 만난 친구들과도 의지하며 일상을 보낸다.

"협의회 친구들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소식에 어둡고 외로웠을 거예요. 올해 설날에는 고향에 갈 수 없으니, 옥천에 사는 친구들 몇몇이 모여 베트남 음식을 해 먹었어요. 바나나 나뭇잎에 돼지고기와 찹쌀을 싸서 쪄먹는 베트남식 명절 음식이에요."

나의 버팀목, 나의 자랑 '가족'

"'엄마 내가 효도할게'라는 아이들의 한마디가 정말 힘든 일이 있어도 힘든 걸 견딜 수 있게 만들어요. 엄마는 정말 강한 것 같아요."

엄마라서 더 강하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다영씨의 버팀목은 그의 가족이다. 올해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간 첫째와, 죽향초에 다니는 쌍둥이 둘째와 셋째. 보물 같은 삼형제를 생각하며 그는 더 열심히 노력하리라 다짐한다. 자신이 노력할수록 아이들이 더 좋은 걸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때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힘든 일을 겪기도 했지만, 다영씨는 그럴수록 더 열심히 일해왔다. 먹고살기 위해 남들과 똑같이 열심히 사는데, 차별을 겪는다는 것이 억울할 때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며 버텼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아이들은 나보다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너 이렇게 악착같이 돈 벌어서 고향에 보내니?' 이런 질문을 받을 땐 마음이 아팠죠. 저도 여기에 삶이 있는 사람인데... 우리 아이들이 자랄 땐 이런 질문도, 차별도 받지 않았으면 해요."
 
장다영씨의 아버지 잔반호(Tran Van Ho)씨
 장다영씨의 아버지 잔반호(Tran Van Ho)씨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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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를 키우며 네 동의 하우스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지만, 그의 부탁에 흔쾌히 한국으로 건너온 그의 부모님은 다영씨의 또 다른 든든한 버팀목이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부르는 다영씨의 목소리에 깻잎을 따고, 옆순을 정리하던 부모님 얼굴에 수줍은 웃음이 피어난다.

"종종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는데 걱정이에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같이 여행도 다니고 효도도 해드려야 하는데... 사실 부모님이 다시 베트남에 돌아가면 어떡하나 문득 걱정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할래요. 도전하는 건 쉽지 않지만,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와서 배운 건 이런 거예요."

어머니가 틀어놓은 베트남 노래가 싱그러운 깻잎 향 가득한 초록빛 비닐하우스 안에 울려 퍼진다. 어머니도 웃고 다영씨도 웃고, 앞 동에서 일하는 아버지도 흥얼거린다.

글·사진 서효원
디자인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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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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