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4 14:37최종 업데이트 21.04.0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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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 (주)NEW

   
고구려와 당나라, 두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은 무려 4반세기나 계속됐다. 보장태왕과 연개소문 집권 당시인 645년에 당나라 태종의 침공으로 점화된 이 대결은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졌고, 이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한층 견고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양만춘 장군의 안시성 전투로 고구려가 대승한 645년 이후에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계속 괴롭혔다. 안시성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당 태종 이세민이 사망한 649년 이후에도 당나라의 압박과 제재는 일상처럼 반복됐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원한을 품은 당 고종은 지속적이고 파상적인 공세로 고구려를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 편은 660년 이후 상황을 이렇게 간추린다.
 
<당서> 고종본기에 따르면, 현경 5년인 경신년에 소정방 등이 백제를 쳤고, 그 뒤 12월(양력 661.1.21)에 대장군 계필하력이 패강도행군대총관이 되고 소정방이 요동도대총관이 되고 유백영이 평양도대총관이 되어 고려(고구려)를 쳤다. 또 이듬해인 신유년 정월(661.2.5~3.5)에 소사업이 부여도총관이 되고 임아상이 패강도총관이 되어 35만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쳤다. 8월 갑술일(661.9.10)에 소정방 등이 고려에 이르러 패강에서 싸우다가 패해 도망했다.

건봉 원년인 병인년 6월(666.7.8~8.5)에 방동선·고간·설인귀·이근행 등이 후원 원군이 되었다. 9월(666.10.4~11.1)에 방동선이 고려에 가서 싸워 패퇴시켰다. 12월 기유일(667.1.17)에 이적이 요동도행대대총관이 되어 여섯 총관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려를 쳤다. 총장 원년인 무진년 9월 계사일(668.10.22)에 이적이 고장왕(보장태왕)을 잡아 12월 정사일(669.1.14)에 황제에게 포로로 바쳤다.
 
안시성의 치욕을 겪은 후에도 당나라는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그 같은 장기간의 공세가 668년의 고구려 멸망을 가져왔다. 안시성 전투 이후로 고구려 동맹국인 백제와 당나라 동맹국인 신라 사이에서도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 4반세기는 동아시아 대전(大戰)의 시기로 볼 수도 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길고 긴 항쟁은 고구려의 전체 역량과 당나라의 전체 역량이 총동원된 대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연개소문 가문의 역량과 이세민 가문의 역량이 동원된 싸움이기도 했다. 4반세기의 대전은 두 나라를 이끄는 양대 가문의 역량이 투입된 무대였다.

이 라이벌 대결에 나타난 특징이 있다. 고구려 지도자 연개소문의 약점이 대결 양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동원 가능한 군대나 물자 면에서 뒤지는 고구려가 지도자의 약점 때문에도 불리함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연개소문과 이세민은 둘 다 귀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가문은 각자의 나라에서 유력 대(大)귀족이었다. 이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연개소문이 이세민보다 특별히 뒤지는 요인들이 있었다.

589년에 수나라가 근 300년의 대분열을 수습하고 거대 중국으로 등장함에 따라 동아시아는 일대 격변의 시대로 돌입했다.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대륙 통일의 여세를 몰아 동아시아 각국을 도호부나 도독부 같은 자국 행정구역에 편입하려 했고, 고구려와 백제 등은 반중(反中) 전선을 형성해 이 같은 야심을 물리치려 했다.

이 당시 동아시아인들이 중국을 바라보며 품었던 공포심은 오늘날의 미국·일본·유럽연합 등이 품고 있는 두려움을 훨씬 초월했다. 도널드 트럼프와 아베 신조, 조 바이든과 스가 요시히데 등은 세계 2위인 중국이 세계 1위로 등극할 가능성에 대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589년 이후의 동아시아인들은 '이미 동아시아 1위'인 중국이 '동아시아 특1위'가 될 가능성 때문에 긴장했다. 589년 이전의 분열 시대에도 가장 강했던 중국이 통일의 여세를 몰아 동아시아 각국을 자국 행정구역에 집어넣으려 했으니, '안 그래도 1위인 중국이 만족을 모르고 더 큰 욕심을 낸다'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간차의 무게감

그로 인해 '친중 진영' 대 '반중 진영'의 긴장감이 팽팽했던 618년에 이세민 가문은 친중 진영의 왕권을 확보한 데 비해, 연개소문 가문은 24년 뒤인 642년에야 반중 진영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연개소문 가문이 후발주자였던 것이다.

618년은 이세민이 지역 사령관인 아버지 이연(훗날의 당 고조)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고 당나라를 세운 해다. 건국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그는 626년에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642년은 연개소문이 영류태왕을 시해하고 보장태왕을 옹립한 해다. 역사학자 신채호가 역사를 공부할 때는 존재했기 때문에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인용됐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는 <해상잡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종래의 방어적 태도를 버리고 당나라에 대해 공세적 태도를 취하자'는 비주류 세력의 여론을 등에 업고 정변을 일으켜 그해에 실권자가 됐다.

이세민의 618년 및 626년과 연개소문의 642년이 갖는 의미가 있다. 이는 대외팽창을 추구하는 기운이 당나라에서 형성된 시점과, 이를 막기 위한 기운이 고구려에서 형성된 시점 사이의 '시간차'를 뜻한다. 시대변화에 대응하는 면에서 고구려가 뒤쳐져 있었던 것이다.

642년 이전까지 고구려 조정은 비교적 낙관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당나라를 적극 견제하자는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서 <해상잡록>에 소개된 것처럼 고구려 군부 내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연개소문이 아니더라도 정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조정이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이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차의 무게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역사상의 그 어떤 권력자보다 막강했지만, 일찍 준비해놓고 달려 나간 이세민보다 훨씬 늦게 출발선에 섰기 때문에 수세 모드를 공세 모드로 돌리는 일이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연개소문의 단점이 백제 의자왕과 그 신하인 성충의 대화에도 나타난다. <해상잡록> 등을 근거로 <조선상고사>가 소개하는 이 대화에 따르면, 연개소문 집권 얼마 뒤에 전략가 성충은 '개인적 자질 면에서는 연개소문이 이세민을 능가한다'고 단언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보다 영토도 넓고 인민도 많지만, 이세민은 연개소문의 전략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며 연개소문을 높이 평가했다.

"그럼, 고구려가 당나라를 멸할 수 있을까?"라고 의자왕이 묻자, 성충은 태도를 바꿨다. 그의 답변은 이렇다.
 
이 점은 단언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10년 전에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다면 당나라를 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제 막 정권을 잡은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이세민은 벌써 20년 전에 서국(중국)을 통일하고 치국의 방책을 정밀히 짰으며 인민을 사랑하고 복종시킨 지 오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승리한다 해도, 당나라의 민심이 갑자기 이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전쟁에 승리한다 해도 그것 때문에 이세민이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고 예측한 것이다. 실제로도, 이세민은 645년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도 왕권을 굳건히 지켰다.

이세민은 연개소문 쿠데타 3년 뒤에 고구려를 침공했다. 후발주자 연개소문이 고구려 내부를 단속하기 전에 선공을 가한 것이다. 성충이 이세민의 강점으로 지적한 선발주자의 이점이 사라지기 전에 이세민이 행동에 착수했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또 다른 약점 

이세민보다 훨씬 늦게 집권해 항쟁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 외에, 연개소문이 직면한 또 다른 약점이 있었다. 그는 왕족의 지배가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귀족 신분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또 정권을 획득하는 과정도 합법적이지 않았다.

이세민 가문 역시 불법적으로 권력을 잡기는 했지만, 이 집안은 새로운 왕조를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이전 행위를 합법으로 '세탁'했다. 반면, 연개소문은 막강한 권력을 잡기는 했지만 새로운 왕실을 세운 게 아니었으므로 언제라도 반역자로 몰릴 수 있었다.

이세민은 권위와 권력을 함께 갖고 있었던 데 반해, 연개소문은 권력만 쥔 채 권위는 고씨 왕실의 수중에 뒀다. 고씨의 권위를 없앨 만큼의 힘은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최고 권력자였지만 형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연개소문은 정통성의 하자를 안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세민과의 대결에서 부담으로 작용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편에 따르면, 642년 쿠데타 당시 안시성주 양만춘은 연개소문의 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은 양만춘의 굴복을 받아내지 못했고, 이 상태에서 645년의 전쟁을 치렀다. 서로 대결했던 양만춘과 연개소문은 이때만큼은 단합해 공동의 적을 물리쳤다. 결과적으로는 잘됐지만, 이는 연개소문이 얼마나 불안한 상황에서 전쟁을 치렀는지를 보여준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연개소문이 죽은 뒤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가 잘 막아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수세 국면을 공세 국면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이는 고구려가 계속해서 제재와 압박을 받는 원인이 됐고, 연개소문 사후에 고구려가 분열에 휩싸이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지도자 연개소문의 단점이 고구려의 명운에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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