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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대통령 관저가 박물관으로
 
쿠바 아바나의 혁명박물관
 쿠바 아바나의 혁명박물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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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박물관은 식당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앞으로 바다 건너 모로 요새가 보이는 올드 아바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쿠바가 그리 중요시 하는 혁명이니까 그 박물관 역시 좋은 곳에 있는가 보다 했지만, 알고 보니 이 박물관 자체가 혁명 이전까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된 곳이라고 했다.

어쩐지. 너무 좋은 자리에 잘 만든 건물 같더라니. 우리로 치면 경복궁 앞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쯤 될까? 한때 대한민국 정부의 중심이요, 중앙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문민정부 등장과 함께 철거된 그 건물.

혁명박물관을 보고 있으려니 만약 우리가 그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수는 대신 어디론가 옮겨서 후세에 본보기로 삼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때야 정권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한일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과감하게 건물을 철거했다지만, 그 결정은 두고두고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긴 해도 우리 역시 그곳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외치는 등 많은 역사를 일구지 않았던가. 게다가 일제 강점기의 건물들을 근대유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한 현재적 관점에서 조선총독부 건물은 당시 일제가 가장 공들여 지은 건축물이요, 정수이기도 하다.

결국 그 건물을 만든 의도가 경복궁을 가림으로써 식민지 백성들에게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 위치만 바꾸어도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 사회가 굳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던 건, 미완의 친일청산 등 아직 과거를 마주할 용기가 없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람 대신 만만한 건물을 상대로 화풀이한 것인지도.

혁명박물관의 엄숙한 모습

박물관은 들어가는 것부터 남달랐다. 우선 가방을 보관실에 맡겨야 했으며, 여행객들을 매섭게 훑어보는 보안요원의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모자 쓴 사람에게는 모자를 벗어야 한다고, 가방은 절대 들고 들어갈 수 없다고 길을 막아섰다.

무엇 때문에 이리도 삼엄한 걸까. 신혼여행 때 갔었던 베트남 하노이 호치민의 묘가 떠오를 정도였다. 한낱 박물관도 이럴진대 며칠 뒤에 가게 될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의 묘소는 어느 정도일지.

근엄한 얼굴로 여행객을 맞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으려니 쿠바 혁명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쿠바 정권에게, 그리고 최소한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쿠바 혁명은 쿠바 그 자체일 것이다. 공산당의 무오류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이곳 박물관은 그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에 있었다.
 
바티스타의 화려했던 관저
 바티스타의 화려했던 관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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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는 혁명 이전 권력을 향유했던 독재자 바티스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떠올릴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가 얼마나 화려하고 방탕하게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쿠바 정권은 국민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혁명의 정당성을 취하고자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화려한 독재자의 흔적과 달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혁명의 유산들이 생각보다 단출하고 초라했다. 박물관 곳곳에는 당시의 기록사진들과 신문기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개가 조잡했다. 물론 내가 스페인어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쿠바 사람들은 이것들을 보고 혁명의 위대함을 떠올릴까?

쿠바 혁명의 원동력

사실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은 우연에 가까웠다. 변호사였던 그는 1953년 7월 26일에 135명의 청년들을 이끌고 쿠바 제2의 군사기지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지만 실패하고 구금되었다. 135명 중 80명 이상이 죽고 체포당했던 말도 안 되는 작전이었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일약 가장 유명한 반정부 인사로 떠올랐고,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당시 그가 스스로를 변론하면서 했던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는 말은 이후에도 계속 회자되는데, 이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무모한 작전을 벌였는지 보여준다. 그는 성공할 수 있어서 혁명을 이끈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에 행한 것이다.

15년 형을 받은 카스트로는 2년 뒤 멕시코 망명을 조건으로 풀려난다. 혹자들은 그의 석방이 당시 독재정권의 고위직이었던 장인 덕분이라고 폄훼하지만, 당시 쿠바 정부로서는 카스트로의 수감 때문에 국제적인 비난여론을 감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고작해야 135명으로 군사 요새를 습격하는 돈키호테 아니었던가. 당시 미국을 등에 업고 절대 권력을 누리던 바티스타에게 카스트로는 미미한 존재였다.
 
쿠바혁명의 전시
 쿠바혁명의 전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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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인들이 다시 카스트로를 주목하게 된 것은 1956년 그가 체 게바라 등 82명과 함께 그란마 보트를 타고 쿠바에 침입한 후였다. 바티스타의 공격으로 겨우 19명만이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농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바티스타의 독재에 진절머리를 내던 쿠바인들이 카스트로를 대안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전투가 벌어지면 정부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빴다.

결국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쿠바 전체를 해방시켰다. 혁명세력이 이겼다기보다는 정권이 붕괴되었다. 미국이 쿠바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국민들이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바티스타는 돈을 들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갔고 그의 군대는 알아서 총칼을 내려놨다. 변화를 원하던 쿠바 민중의 강력한 소원이 혁명으로 이뤄진 것이다.

쿠바의 그란마 항해와 북한의 보천보 전투
 
쿠바 혁명의 상징 그란마호
 쿠바 혁명의 상징 그란마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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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를 알고 박물관을 둘러보니 혁명에 대한 전시가 왜 이렇게 빈약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시공간을 채울 만한 전투 자체가 희소한 듯했다. 물론 체 게바라가 산타 클라라에서 정부군의 열차를 습격, 탈취한 전투도 있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사건이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정부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빴다.

따라서 박물관은 쿠바혁명을 전시하면서 혁명군의 규모나 전투상황보다는 카스트로 등이 혁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들의 강한 의지를 강조했다. 말도 안 되는 전력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혁명 세력과 그들에 대해 지지를 보냈던 쿠바인들이 박물관의 주요 전시 내용이었다.

혁명박물관의 클라이맥스는 건물 밖 야외의 특별 전시장에 있었다. 그곳에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멕시코에서부터 타고 왔던 그란마호가 전시되어 있었다. 8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오로지 조국 해방을 위해 25인승 정원의 보트를 타고 쿠바까지 항해한 이야기. 그 무모함이 쿠바 혁명의 낭만성을 더하고 있었고, 쿠바 국민들의 여전한 존경심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문뜩 북한의 보천보 전투가 떠올랐다. 북한은 이를 가리켜 '김일성이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첫 조국진공작전으로, 조선의 정신을 깨운 사건'이라고 홍보하지만, 그 규모와 성과 면에서는 논란이 많다. 보천보 자체가 인구가 몇 안 되는 작은 마을로서 항일전투에 있어서 큰 성과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보도를 통해 식민지 백성들이 큰 위안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란마호에 탔던 82명 중 19명만 살아남은 실패가 하나의 전설이 되어 쿠바 혁명의 기폭제가 된 것과 비슷했다.

보천보 전투는 소규모라 하더라도 어쨌든 항일세력이 처음 국내에 진군해서 얻어낸 승리로서, 김일성 신화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전투'라는 측면에서는 실패 혹은 형편없는 성과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맥락에 따라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변할 수 있다.

다시 가방을 돌려받은 뒤 혁명박물관을 나왔다. 박물관 옆으로 줄을 지어 지나가는 쿠바군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현재 쿠바혁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의 궁금증은 박물관 앞에서 자본의 논리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올드카들을 보면서 더 깊어졌다. 여전히 쿠바인들은 쿠바 혁명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기고 있을까?
 
혁명박물관 앞에 자리한 자본주의의 총아들
 혁명박물관 앞에 자리한 자본주의의 총아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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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쿠바, #혁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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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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