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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옥산면 옥녀봉에는 진달래 십리길이 있다. 진달래가 환하게 피어날 날을 기다렸다. 진달래 산행에 동참할 일행을 4명만 꾸렸다. 꽃길만 걷는다는 설렘을 안고 옥녀봉으로 향했다. 세상은 봄꽃들이 피어나서 아우성이었다. 돌아보는 눈길마다 꽃 잔치였다. 예상치 못한 역병의 확산으로 사람들을 비대면의 세상에 가둬버린 틈을 비집고 꽃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부여 옥산면 옥녀봉 진달래 십리길에 핀 진달래곷
▲ 진달래꽃 부여 옥산면 옥녀봉 진달래 십리길에 핀 진달래곷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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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축제가 열려서 마을이 떠들썩할 즈음이지만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진달래 꽃 길을 우리가 전세 낸 것 같은 한적한 산행이었다. 옥녀봉으로 진입하는 등산로는 제법 가팔라서 초보 등산가는 힘이 드는 코스이다. 이 난코스만 지나면 옥녀봉 능선을 따라서 진달래꽃 향연을 즐기며 걷는 길이 나온다. 피톤치드를 내뿜는 소나무 향이 기분을 좋게 해주고 진달래꽃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 길이 기다리고 있다.

무리지어서 핀 진달래 꽃길 속을 걷고 있으니 소월의 진달래꽃처럼 애잔한 모습은 어디가고 한 잎 따서 입에 넣고 싶을 정도로 고혹적으로 보인다. 옥녀봉으로 향하는 중간쯤에는 소월의 진달래꽃 시비도 세워놓았다.

온 국민의 애송시가 된 진달래꽃을 암송하며 배웠던 학창 시절에는 진달래꽃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진달래꽃을 꽃잎을 따보기는커녕 아름 따다 뿌릴 일은 더욱 없었던 입시 위주 교육의 절정기를 지나왔던 세대였다. 그래도 교과서에서 배운 가락이 있어서인지 소월의 역설적인 사랑법으로 감정 이입된 진달래가 좋다. 직설이지 않고 은근한 진달래 사랑법이 더 감상에 젖게 한다. 나는 역시 대놓고 '사랑한다' 는 말을 남발하는 세태에 적응이 안 되는 세대이다.

우리의 옥녀봉 진달래 능선 걷기가 절정에 이를 즈음이었다.

"뱀이다!"
 
진달래나뭇가지를 휘감고 나타난 구렁이, 진달래 꽃술을 물고 있는 것 같다.
▲ 진달래와 구렁이  진달래나뭇가지를 휘감고 나타난 구렁이, 진달래 꽃술을 물고 있는 것 같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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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비명이 들렸다. 나를 비롯한 여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더 큰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쳤다.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보고 발밑을 살폈다. 뱀은 정말 코로나만큼이나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이다. 진달래의 역설에 빠져 뱀의 역습은 살피지 못했다.

"구렁이에요. 얘가 우리들 소리에 더 놀라서 땅에서 진달래나무 가지 속으로 튀어 올랐어요."

일행 중에 보디가드로 함께 한 남자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이리 와서 사진들 찍으세요. 평생에 이런 기회가 없을걸요. 독이 별로 없는 구렁이이니 안심하시고..."

그러자 여자들이 한 발자국 다가와, 어느새 꺼내들고 있던 스마트 폰의 셔터를 눌러댔다. 고대로부터 뱀은 무섭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설적인 존재였다. 방금 비명을 질렀던 여자들이 스마트 폰 속으로 들어온 구렁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모델료를 줘도 아깝지 않을 구렁이의 쇼. 진달래와 구렁이의 낯선 조합도 어색하지 않은 봄이다.
▲ 진달래나뭇 가지에서 묘기를 보여주고 있는 구렁이  모델료를 줘도 아깝지 않을 구렁이의 쇼. 진달래와 구렁이의 낯선 조합도 어색하지 않은 봄이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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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꽃 속에 숨은 구렁이
▲ 진달래와 구렁이  진달래 꽃 속에 숨은 구렁이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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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는 모델료를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진달래나무 사이에서 곡예를 하듯 쉴 새 없이 움직여주었다. 진달래 나뭇가지 색 보호색으로 감싼 구렁이가 꽃잎이 지고 수술만 남은 곳에 머리를 걸치니 그대로 꽃의 모습이었다. 구렁이가 꽃인지 꽃이 구렁인지 모를 경지를 보여주었다. 진달래 꽃 뒤에 숨바꼭질을 하듯 머리를 숨기기도 했다. 구렁이는 가냘픈 진달래 나뭇가지 사이에서 유영을 하듯 자유롭게 움직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몸매와 검은 진주가 콕 박힌 것 같은 눈망울에 둥그스름한 머리통을 지닌 구렁이를 자세히 보고, 오랫동안 보았더니 무서움도 사라졌다. 그 징그럽던 감정도 무뎌졌다. 기다란 몸이 꽃잎과 함께 춤을 추듯 자유롭게 꿈틀거리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머리가 세모꼴인 독사에 비해서 둥그스름한 머리통인 구렁이는 사나와 보이지 않고 유순해 보였다. 무조건 피하기만 했던 뱀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긴 머리의 여자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뱀의 화관 썼다.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몽환적인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뱀과 꽃과 여자를 시그니처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가 투명한 상자에 뱀들을 잡아다 놓고 꿈틀거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했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햇볕에 반짝이는 강렬하고 강한 황금빛 생명력이 우리를 압도했다. 여자들이 뱀과 동의어인 두려움을 잊을 만큼 진달래 꽃 속의 구렁이의 모습은 농염하기까지 했다. 발밑에서 기어가는 모습으로 만났더라면 두려움만 남긴 존재가 되었을 뱀이었다. 진달래꽃 나무를 휘감고 나타난 구렁이 한 마리의 아우라에 우리는 빠져버렸다.

"야아! 뱀도 꽃 속에 앉아 있으니 꽃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황금빛 꽃이요. 어쩌면 뱀의 피부가 혐오스럽지도 않고 찬란한 빛이네요."

급기야 햇볕에 반사되어서 반짝이는 뱀의 피부에 감탄을 하는 일행도 나왔다.

"자연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이런 장면을 찍었어야 하는데 아깝네요."

동영상 촬영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일행들의 슬기롭지 않은 스마트폰 사용법을 자책하는 소리였다.

"이 사진의 제목은 '구렁이도 꽃구경 나왔슈'에요."
"그것도 맞네요. 꽃구경을 하는 뱀이라니... 구렁이가 우리를 구경하는 것이 아닐까요?"


진달래 산행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황금빛 구렁이 한 마리가 일행들의 잠자던 예술 혼을 바닥에서 끌어올리고 있었다. 피하기만 했던 뱀 한 마리가 우리의 감상을 풍요롭게 해준 셈이었다. 우리는 생의 가장 아름다운 뱀을 만난 행운아들이었다.

뱀과 꽃과 여자들이 다함께 있는 공간에 우리들이 있었다. 천 화백이 추구했던 생생한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시간을 진달래 산행에서 만났다. 우리들의 유한한 생과 진달래꽃 같은 사랑 타령을 황금빛 구렁이 한 마리에게 플렉스 해버린 산행이었다.
 
진달래의 역설에 구렁이의 역습을 피하지 못했던 옥녀봉 진달래길 산행
▲ 옥녀봉의 진달래 진달래의 역설에 구렁이의 역습을 피하지 못했던 옥녀봉 진달래길 산행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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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진달래, #부여 옥산 진달래 십리길, #구렁이, #김소월,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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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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