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8 13:51최종 업데이트 21.04.0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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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아이유 ⓒ tvN

 
소파에 드러누워 아이유가 나온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보고 있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아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고 답답한 증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만 가슴이 바쁘게 뛰더니 지난주부터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수시로 심장이 뛰고 호흡이 어려웠다. 슬프게도 비슷한 증상을 겪은 사람이 주변에 여럿 있었다. 공황 혹은 불안 장애로 치료를 받은 적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했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약을 먹으면 분명 도움이 된다고. 


근처 정신과를 검색해 소개 페이지가 마음에 드는 곳을 골랐다. '감기 걸렸을 때 내과에 가는 것처럼 마음이 아파서 정신과에 가는 것 뿐이야' 최면을 걸었지만 정신과라는 말이 덜컥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예약 전화를 거는데 가슴이 쿵쾅거렸다. 

병원에 도착해 진료를 기다리면서 문진표를 작성했다. 낮 시간인데도 병원에는 끊임없이 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냥 평범하게 살지, 참 별나다 별나"

지난해 가을, 동료들과 회사를 공동 창업했다.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고민하는 여성들을 위해 다양한 레퍼런스를 발굴하고 연결해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온라인 멤버십 커뮤니티 '창고살롱'을 운영하며 여성과 일에 대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 

창고살롱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지속가능성' 그리고 '일과 삶'이다. 20대만 해도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서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30대가 되자 일만 고민해서는 일을 지속할 수 없었다. 조금만 무리하면 몸이 고장났고 마음도 수시로 경고음을 보냈다. 특히 엄마가 되면서부터는 한 손에는 아이, 한 손에는 남편 손을 잡고 한몸처럼 움직여야 했다.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일과 삶을 함께 고민해야 했다. 

30대가 되면서 두 번의 퇴사를 했다. 원하는 대학만 들어가면, 원하는 직장만 들어가면 진로 고민은 끝나는 줄 알았다. '이렇게 계속 일하는 게 맞는 걸까' 번뇌하는 순간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주 찾아왔다. 그때마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친정엄마는 말했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참. 별나다. 별나." 창고살롱을 시작하고 다양한 여성을 만나면서 알게 됐다. 빛나는 롤모델도 평생 직장도 사라진 시대, 생애주기가 변하고 연차가 쌓일수록 일과 삶에 대한 고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요즘 가장 큰 걱정은 과몰입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창업을 했더니 더 열심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출근도 퇴근도 없이 늘 온(ON) 스위치가 켜져 있었다. 이렇게 하면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걸, 탈이 날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아는데도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자꾸만 달리게 됐다. 

"열심히 한 건 일밖에 없더라고요"

떨리는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병원에서는 현재 내 상태가 공황 장애나 불안 장애가 아니라고 했다. 약을 복용해야 하는 정도의 상황도 아니라고. 다만 가슴이 빨리 뛰고 답답한 건 정신과적인 이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일단은 약을 쓰지 않고 한번 기다려 보고 상태가 더 심각해지면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막막했다.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서 창업했는데. 결국은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구나. 내가 또 나를 힘들게 했구나. 자기혐오가 피어올랐다. 
 

아이유의 인터뷰를 보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 tvN

 
곧 서른을 앞둔 아이유는 "제가 일은 똑부러지게 잘하는데 일 말고는, 그냥 이지은로서는 정말 잘 하는 게 없다"고 말했다. 일을 너무 열심히 빡빡하게 하느라 나를 많이 못 돌본 것 같다고. 30대부터는 나를 돌보고 조금은 여유있게 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이어지는 인터뷰를 보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제가 진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한 건 일밖에 없더라고요. 일이 삶의 전부는 아닌데. 일만 하느라 다른 건 남들보다 많이 열심히 못했구나. 주변을 잘 돌봤나? 내 스스로를 잘 돌봤나? 내 집이 어느 정도 잘 정돈이 돼 있나? 내가 우리 집에 대해서 얼마나 아나? 너무 서툴더라고요. 내가 중독이 돼 있었던 건 일의 성취, 보람. 좋은 의미보다는 일이 주는 '자극적임'. 거기에 중독이 돼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게 과연 '건강한 열심'이었나."

아이유만큼 성취를 이룬 적은 없지만 일이 주는 '자극적임'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일이 반짝반짝 빛나고 그 일을 하는 나도 더없이 멋져 보이는 순간. 아이유의 이야기가 좋았던 건 반짝이는 불이 꺼지고 자극도 사라져 버린 어둡고 차갑고 외로운 시간을 솔직하게 말해줘서였다. "내가 날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 맘이 가난한 밤", "수많은 소원 아래 매일 다른 꿈을 꾸던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아이유, '아이와 나의 바다') 회의하게 되는 순간에 대해서 말이다. 너무 힘들거나 슬프지 않고 덤덤하고 단단하게. 

스물 아홉 이지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일하는 마음을 되돌아 봤다. 일이 즐겁고 잘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왜 자꾸만 일의 성과와 타인의 인정에 집착하게 되는 걸까. 일이 곧 나라고 동일시하며 일에서만 자기 효능감을 찾게 되는 걸까. 일과 육아만으로 충분히 버겁다는 이유로 그 이외의 삶은 하찮게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빡빡한 투두 리스트에서 나의 쓸모를 겨우 확인했던 건 아니었나. 매일 종종거리며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그게 과연 "건강한 열심"이었나. 

내가 나를 또 힘들게 만들었지만 이전과 달라진 건 분명 있었다. 진료가 끝날 때쯤 의사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냐고.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일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 때문에 퇴사를 택했고 창업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조율해 나가고 싶다고. 단호한 대답에 스스로도 놀랐다. 

퇴사를 한다고, 이직을 한다고, 창업을 한다고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삶은 계속 되고 일과 나의 관계는 결국 내가 풀어야 한다는 것도. 내가 되고 싶은 나와 내가 될 수 있는 나의 간극은 여전히 크지만 어쩌겠나. 부족하고 못난 나도 나니까 끌어안고 가는 수밖에.

서른 여덟. 이제 조금 나를 알 것도 같다. 

"두 번 다시 날 모른 척 하지 않아/ 그럼에도 여전히 가끔은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겠지/ 또다시 헤매일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아." ('아이와 나의 바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 brunch.co.kr/@hongmilmil 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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