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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과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500년 솔숲이다.
 허난설헌과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500년 솔숲이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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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선왕(先王)께서 정사한 것은 밝았다 할 수가 있었다. 당시에 보좌하는 신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권애(眷愛)해서 서로 믿던 자는 이이(李珥)였고, 전임해서 일을 맡긴 자는 유성룡(柳成龍)이었다. 두 신하는 또한 유자(儒者)이며 재신이라 할 만하였다. 그리고 전임해서 일을 맡긴 뜻이 지극하지 않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내 포부를 펴지 못한 것은 그의 재주가 미치지 못함이 아니었고 방해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룡이 한창 어지러운 날을 당해서 정력과 지혜를 다했으나, 혹 이룩되고 혹 막힌 것은 그때 형편에 편리하고 편리하지 못함이 있음이었다. 그가 이순신을 등용한 건(件)은 곧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었다. 

그런데 성룡을 공격하던 자가 순신마저 아울러 죄 주었으니, 그 해가 나라에 미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이이가 당시에 곤란을 겪었던 것은, 논의하는 자가, 공안(貢案)을 변경함은 불편하다, 여러 고을에 가외군사를 둠은 부당하다, 곡식을 바치는 대로 관작을 재수함은 마땅치 못한다, 서얼을 벼슬길에 통하도록 함은 불가하다, 성과 보루를 다시 쌓음은 합당치 못하다는 때문이다. 

난리가 난 후에 조정에서 왜적을 막고 백성을 편케 하는 방책을 부지런히 강구했으나, 위에 말한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그럴까, 대체로 이이가 앞날을 내다본 것은, 수십 년 전에 벌써 두어 가지 시행하는 것이 비록 평시에는 구차한 일이지마는 환란을 생각하고 미리 방지하는 데에는 경장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까닭에 군중의 꺼려함을 범하면서 과감하게 말했던 것이었다.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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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속된 선비들은 좁은 소견에 이끌려서, 시끄럽게 된다, 타당하지 않다 하여 엇갈렸으니, 그 몸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라도 될 수 없었음이 마땅하였다. 지금도 논의하는 자가 이이를 배척해서 남은 힘을 없이하면서, 이이가 말한 다섯 가지 일은 받들어, 시행하기에 미처 하지 못하는 듯하니, 이것은 크게 웃을 만한 일이다. 

선왕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하던 그날에, 두 신하가 조용하게 그 포부를 펼 수 있어, 위에서 따르고 아래에서 받들어 딴 논의가 없었더라면, 비록 밝은 운수(運數)는 맞이하지 못해도 외적을 막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벌떼처럼 일어나서 지껄어대며, 반드시 막고 배척한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만약 황희와 허조가 그러한 처지에 놓였더라면, 반드시 두 임금을 섬겼다고 지목되어서 하루도 낭묘(廊廟)에 편케 있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조용하게 진정하기를 세종 때같이 했겠는가. 

후세에 착한 다스림이 없음은 모두 이런 데에서 연유한다. 그런 즉 어떻게 하면 가할까.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맡기는 이 두 가지로써 족하다."는 것인데, 그 끝내는 확집과 결단이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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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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