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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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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불효하는 자식이 되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있을까마는, 어쩌다 보니 불효녀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었지만 인생은 도통 내 맘대로 될 가망이 없어 보였던 우울한 시기였다. 나이에 버겁게 나름 무게감 있는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고 나니 외국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본다.

그런 시기에 한 남자를 만나 짧은 연애를 하고 결혼해 미국에 정착했다. 한국에서 별 볼 일 없는 내 신세가 미국에 왔다고 갑자기 달라질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순조롭게 두 아이를 낳고 남편과 오밀조밀 살림을 늘려가며 동네 마켓 갈 때 차려입어야 하는 스트레스도 없는 미국의 삶은, 먹을 만 하지만 간이 싱거운 김치 같았다고나 할까.

내 삶은 그렇게 비교적 순항했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부족함이 늘 날 갈망하게 했다. 그러나, 그런 허전함에도 큰딸에 대한 그리움에 밤마다 잠을 설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읽지는 못했었다.

그렇게 삼십 년을 훌쩍 넘겼다. 그 사이 부모님을 뵈러 한국을 몇 번 방문했고 얇은 지갑을 털어 미국행 비행기표를 사서 보내드리기도 했었다. 부모님이나 여동생을 만나러 서울의 친정 나들이를 했지만, 개인적으로 겪는 혼란과 감정의 오르내림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 웃고 떠드는 시간에 내 속안의 아픔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고 나 또한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었다.

어느 누구와도 나의 아픔을 나누지 못한 채 남편과 이십여 년 결혼 생활을 종결지은 후 시작된 싱글맘 생활로 나는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결혼 생활할 때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싱글맘이 된 후에는 은행 잔고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압박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았다.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할 나이가 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먹고 마실 것이 냉장고에 넘쳐나도 내일 먹을 거리를 걱정하는 마음이랄까? 그렇게 나는, 실로 지난 삼십여 년 동안 내 걱정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내 걱정으로만 채웠던 지난날 

부모로부터 삶을 부여받고 어느 정도 장성할 때까지 부모님의 그늘에서 먹고 자고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거나 혹은 싱글의 삶을 살기 위해 부모님을 떠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게 된다. 우리 삼 남매도 부모님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키워졌고 어른이 되어 각자 독립했다.  

그런데 나의 경우 그 독립이라는 게 미국에 와서 가족을 꾸리고 직장을 얻어 생활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부모님을 뵙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아니면 뵙기조차 어려운 이역만리 땅에서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미국으로 이민 온 남편을 따라, 그리고 남동생은 유학 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얻으며 미국에 정착했다.

환갑이 채 안 되어 결혼식장에 큰딸을 데리고 입장하셨던 아버지는 환갑 나이 즈음에 당뇨를 진단 받으셨고 은퇴하실 때까지는 무난히 지내셨다. 하지만, 은퇴를 하시고 나서부터는 아버지의 암 진단, 어머니의 고관절 수술로 인한 투병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모든 병치레의 몫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막내 여동생의 것이었다. 언니와 오빠가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보니,  막내 여동생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동생의 의지가 있어도 천성적으로 순하고 착하기만 한 제부의 성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딸보다도 아들보다도 더 자식 같은 둘째 사위의 넓은 마음에 비하면 나는 부모님의 안위를 제대로 걱정하지 않았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동생에게 부모님을 맡겨놓고 바쁜 직장일을 핑계로 친정 나들이도 가뭄에 콩 나듯이 했었고, 쉬는 주말이면 건강을 지킨다는 핑계로 들과 산으로 쏘다녔다.

진단을 받고 어렵게 결정했던 방광암 수술 경과가 좋아 아버지의 회복에 속도가 붙었다. 혈색도 좋으셨고 매번 갈아 끼워야 하는 요루백의 불편만 없다면  누가봐도 환자인 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록 건강해지셨다. 엄마의 고관절도 회복이 어느 정도 되자 부모님께 미국 여행을 권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두 분을 설득해 볕 좋고 바깥 온도가 가장 좋은 5월 초로 날을 잡았다.

오시기 전에 미리 잘 못 걸으시는 엄마를 위해 휠체어를 준비하고, 아버지의 요루백 처리를 위한 물품도 구입하고, 머무시는 한 달여 기간 동안 매 주말 여행을 위해 숙소를 예약했다.

꿈만 같았던 한 달
 
 매직봉을 든 팅거벨 요정마냥 매일 저녁 엄마의 손으로 지은 집밥이 식탁에 올랐다.
 매직봉을 든 팅거벨 요정마냥 매일 저녁 엄마의 손으로 지은 집밥이 식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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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가까운 긴 비행 시간 동안 피곤하셨던 부모님을 위해 첫 주말은 가까운 곳으로 모시고 갔다. 수많은 화물 컨테이너가 들고 나는 롱비치 항구, 태평양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국의 종 공원,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가 있는 팔로스버디스. 커피 맛 때문이 아니라 바다가 보이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스타벅스 커피점. 그리고 점심엔 회사 동료 몇 명을 초대해 함께 했다. 이십 년 가까이 다니는 회사가 궁금하기도 하실 터라 준비한 자리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회사에 출근하는 나를 배웅하곤, 집 안팎을 쓸고 닦고 몇 개 안 되는 나무와 화초를 다듬은 부모님 덕에 퇴근하면 온 집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더구나 퇴근하면서 현관문을 열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맛있는 냄새가 났다. 부엌에는 늘엄마가 서 계셨다.

부추 부침개, 닭볶음탕, 양배추 찜, 속 넣은 배추 김치와 섞박지, 그리고 나의 '최애' 음식인 바삭하게 들기름으로 직접 구운 김… 매직봉을 든 팅거벨 요정마냥 매일 저녁 엄마의 손으로 지은 집밥이 식탁에 올랐다. 팔순이 다 된 엄마이지만, 엄마의 손맛은 집밥을 그리워하는 맏딸에게는 진정한 구원이요, 해결사였다.

한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사이 부모님을 모시고 아들 둘을 앞세워서 푸른 들판이 앞에 보이고 저녁이면 굴뚝마다 솔나무 연기가 피어오르는 멋진 랏지를 예약해 요세미티와 세코이아 국립공원을 여행했다.

마지막 주에는 샌디에고 피어 바로 앞의 근사한 호텔을 예약했다. 내 주제에 비해 줄줄이 과한 지출의 연속이었지만 다시는 미국 여행을 하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도 아깝지 않았고, 수년간 이자금 납부에 허덕일 미래 따윈 괴념치 않았다, 실로.

그렇게 꿈만 같았던 한 달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가시는 부모님을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길. 차 트렁크 안에 덩그러니 남은 휠체어를 쳐다보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모님이 떠나시고 나면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으리라 내심 예감했던 나는 그날 저녁부터 친한 지인 부부와 캠핑을 계획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 솔나무 잔가지를 태우는 연기가 캠핑장을 가득 메우고,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높다란 웃음도 잦아들며 어둠이 몰려오는 시각. 독주 몇 잔을 마신 내 눈이 토끼처럼 빨개졌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애쓰는 게 안쓰러웠는지 지인이 나의 어깨를 슬며시 쥐었다 놓으며 말했다.

"울고 싶을땐 울어도 돼.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울어, 언니."

그 말 한마디에 참았던 마음이 무너져내린 나는 밤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었다.

그게, 벌써 6년 전 일이다.

이역만리 먼 곳에 산다는 것은

서울로 돌아가셔서 건강하게 유쾌하게 지내시던 아버지의 암이 재발한 건 2년 전이다. 이번엔 대장으로 전이되어 수술을 엄두도 내기 어려운 상황. 말 그대로 최악인 셈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증이 없으시다. 엄마말대로 엄마의 기도가 이루어져, 최악의 상황에서도 고통만큼은 없으신 것인지 모르겠다. 여지껏 통증으로 단 한 번 응급실을 가신 적도 없다.

그러나 최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올해 들어서 유난히 몸이 말라가시고 기운이 없어 이젠 제대로 걷기 어려워 워커를 이용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작년부터 부쩍 식탐이 많아지시고 고집이 늘어나셔서, 긴가민가 했는데 정밀 진찰 결과 치매가 진행 중인 것을 확인했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그대로 멈춰라' 게임의 한순간 같이 정지해 버린 지난 1년의 시간은 지독히도 길었다. 증세가 악화일로이니 방문해서 뵙고 정신이 또렷하실 때 얘기라도 한번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코로나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021년 다시 봄이 왔다.

며칠 전 부쩍이나 기운이 없으신 아버지와 오랜만에 영상 통화를 했다.

"아빠! 맛있는 거 많이 잡숫고, 백신 맞으면 아빠 뵈러 갈 수 있으니 그때까지 꼭 건강히 계셔야 해요!"
"그래, 우리 큰 딸 오면 보고 나서 하늘나라 가야지...!"


앙다문 턱에 더욱 힘을 주고 작은 눈을 크게 뜨며 부라린다. 그리고 보청기를 끼셔도 잘 못 알아듣는 아버지를 향해 힘껏 소리친다.

"아빠~ 사랑해요…"

이역만리 먼 곳에 산다는 것은, 아예 불효를 작정하고 사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고백한다. 그리고 이역만리 먼 곳에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나의 책임을 떠넘긴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나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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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세상구경과 집밥사이에서 아슬아슬 작두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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