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4 18:16최종 업데이트 21.04.1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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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 ⓒ 공동취재사진


지상 최대의 쇼는 무엇일까?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는 어떨까? 바그너가 26년 동안 작곡했다는 초대형 오페라 말이다. 총 공연 시간이 16시간에 이르는 오페라는 보통 3박4일 동안 봐야 한다. 

로저 워터스(핑크플로이드)의 더 월(The wall) 베를린 공연도 선정될 만하다. 20만 명의 관객, 전 세계 10억 명이 지켜봤던 독일통일 기념 공연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런데 이 공연이 시작되면서 대형 크레인이 무대 앞에 벽(wall)을 쌓는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점점 벽은 높아지다가 공연이 절반이나 되었을까 싶을 때, 마지막 벽돌이 무대를 완전히 막는다. 초대형 무대는 벽으로 완전히 가로막히고, 10억 명의 관객은 한참이나 초청 받은 가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벽 뒤에서 부르는 가수의 노래를 들을 뿐이다. 베를린 장벽처럼 답답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무대 연출이다.

그런데 나는 더 월 공연보다 더 크고, 더 답답한 지상 최대의 쇼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대한민국 국회의 '예산 심의 쇼'다. 더 월 공연 제작비는 70억원이지만 국회에서 벌어지는 지상 최대의 'K 쇼'는 무려 500조원이 넘는다.

국회 예산 심의 권한은 반쪽짜리

국회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법과 예산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국가 예산을 심의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인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돈이 말하는 것 아닐까? 국가의 정책 방향이나 국정 철학은 결국 예산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물신주의자일까?

문제는 국회의 예산심의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의 대표가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삭감하거나 증액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렇게 보이게끔 만드는 쇼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일단 국회의 예산심의 권한은 반쪽짜리 권한이다. 국회는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증액하거나 감액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감액 할 수 있는 권한밖에 없다. 국회의 예산심의를 전하는 언론의 기사는 온통 '쪽지예산'으로 가득 차 있다. 국회가 쪽지를 통해 자기 지역구 예산을 증액하는 것이 마치 국회 예산심의 과정의 본질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국회는 예산 증액 권한이 없다. 정부의 동의가 없으면 예산을 증액할 수 없다. 이는 국회법도, 국가재정법도 아니라 무려 헌법 조항이다. 그래서 국회가 증액했다는 얘기는 정부가 동의했다는 의미다. 감액만 할 수 있고 증액 권한이 없는 것을 '국회 예산심의권의 제약'이라고 표현한다.

진짜 문제는 감액도 '무늬만 감액'이라는 사실이다. 2021년도 본예산 심의 결과를 전하는 국회 보도자료에 따르면 5조9000억원을 감액했다고 한다. 국민의 세금을 5조9000억원이나 아꼈으면 그래도 '열일'한 것 아닐까?

국고채 이자 지급 예산 삭감의 이면
 

지난해 11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질의에 답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올해 본예산 심의 때 국회에서 감액했다는 가장 큰 사업은 '국고채 이자 지급' 사업이다. 9000억원이나 감액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국고채이자 지급사업은 국채를 소지한 채권자에게 채무자인 국가가 주어야 할 이자 지급액을 뜻한다.

국회에서 예산이 감액되었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채권자님, 안타깝게도 국회에서 예산이 삭감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연 2% 이자를 지급한다고 계약 했지만 이자를 1%만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정해진 금리로 이자를 지급하기로 약속한 마당에 국회 예산 삭감을 핑계로 주어야 할 이자를 덜 줄 수는 없다. 

그럼 국채 이자를 삭감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국채 이자 지급액의 예측금액을 변경했다는 의미다. 원래 21조원 정도 국채이자를 지급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다시 잘 계산해 보니까 9000억원 정도 덜 줘도 된다고 예측금액만 변경했다는 얘기다. 결국, 실제로 주어야 할 이자 금액을 줄이거나 그 만큼 국민의 세금을 줄인다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왜 실제 금액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국회에 부풀린 금액을 제출했을까? 국채 이자 지급액을 예측하는 능력이 기재부보다 국회의원이 더 높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정부가 국회에 이자 지급액을 부풀려 제출해서 국회가 이를 감액하는 일은 거의 매년 발생하는 일이다. 실제로 올해 본예산 때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이자지급액은  21조1000억원이었다. 국회는 9000억원을 삭감했다. 어차피 실제 국고채 10년물 금리가 2%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자 지급액을 2.4%로 예측하는 것은 과도하다. 예산을 책정해 놔야 쓰지 못하고 불용될 테니 삭감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본예산에서 국고채 이자 금액이 삭감되었으나 정부는 추경안에서 다시 1800억원 증액하여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의 1800억원 증액 요청은 받아들여졌을까? 오히려 그 두 배에 이르는 3600억원이 삭감되었다. '혹 붙이러 갔다가 혹 떼고 온' 꼴이다. 삭감 사유를 들어보자. 2021년도 발생 국채 이자를 2.4%로 예측했는데 이미 3월 말까지 발행한 국채 금리는 2% 이내다. 그럼 이미 절약한 이자 금액만큼은 최소한 추경에서 감액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합리적이다.  

왜 이렇게 합리적인 국고채 이자 지급액 예측을 국회는 할 수 있고 기재부는 할 수 없었을까? 혹시 기재부가 몰랐던 것이 아니라 감액할 수 있는 여력을 국회에 제공하는 선물 아닐까? 국회는 기재부가 제공한 감액 선물을 발표할 뿐이면서 국회가 국민의 세금을 아끼고자 불요불급한 예산을 삭감했다고 쇼를 하는 것 아닐까?

국회 예산 감액은 쇼다
 

지난해 11월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 회의에서 정성호 위원장이 개의를 선언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국회는 헌법에 따라 증액도 할 수 없으면서, 감액도 기재부가 국회에 제공한 선물을 받을 뿐이라면, 결국 국회의 예산심의는 말 그대로 지상최대의 거대한 쇼에 불과하다. 실제로 올해 예산 중 국회 감액 5조9000억원 중에서 이런 '무늬만 감액'사업을 찾아보니, 실제 경제적으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감액 사업만 최소한 4조2000억원에 이르렀다. 국회 감액 사업의 상당 부분은 쇼라는 얘기다.

국민의 대표가 정부가 편성한 예산을 심의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기능이다. 그런데 국회는 공식적으로 증액의 권한이 없고, 감액도 쇼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국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국회 예산 심의의 핵심 사안을 지적하지 않고 그저 관례대로 쪽지예산만 지적하는 언론도 문제가 있다. 

국회에 증액심의권이 없다는 것처럼 놀라운 사실은 쪽지예산도 거의 없어진 지 벌써 5년은 지났다는 것이다. 비공식적인 쪽지나 카톡을 통해서 '갑툭튀' 증액 예산은 국회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정성호 예결위 소위원장도 출입 기자단을 향해  "중간에 증액 요구를 넣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지 오래된 상황입니다. 과거의 쪽지예산이 국민 인식 속에 남는 데는 언론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회 문화의 변동을 언론이 따라가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을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작심 발언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국회 출입기자단에게 '문화 지체'라는 강한 말까지 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별로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어차피 보도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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