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5 18:58최종 업데이트 21.04.15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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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8일 세월호 참사로 혈육을 잃은 유가족들의 청와대 면담요구가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을 때 감리교신학대학생 8명은 세종대왕상에 올라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동상 위에 핸드마이크 든 이가 이종건. ⓒ 권우성


2014년 5월 8일 오후 2시 15분, 광화문 세종대왕상 위로 8명의 대학생이 간이사다리를 세우고 쏜살같이 기어 올라갔다. '유가족을 우롱하는 박근혜는 물러가라'는 손글씨가 적힌 현수막을 펼친 채 핸드마이크를 든 청년 하나가 성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에게 보호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투표권을 행사하는가? (중략) 정부는 유가족들의 요구사항을 전면 수용하고 특검을 실시하라! 유사정권 무능정권 박근혜는 퇴진하라!"

성명서를 끝까지 읽을 틈도 없었다. 6분 30초만에 이들은 입을 틀어막히고 사지를 들린 채 경찰에 연행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퇴진을 처음으로 입에 올린 기습시위였다. 시위를 주도한 감리교신학대학생 이종건(당시 20세)은 당시 <오마이뉴스>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촛불세대다. 촛불 다음에 뭐가 있을지는 솔직히 모른다. 그러나 우리끼리 위안을 삼는 운동은 한계가 분명하지 않나? 촛불로 시작해서 촛불로 끝나지 않았으면 싶다. 뭔가 대안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한다"

("경찰이 자꾸 우리 배후 묻는데, 굳이 배후를 밝히자면..." 2014년 5월 12일 <오마이뉴스> 기사 중에서)
 
촛불 이후 대안을 찾겠다던 신학생은 7년이 흐른 지금, 도시빈민운동을 하는 전도사이자 <옥바라지 선교센터>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를 보기로 한 날은 공교롭게도 4월 7일 보궐선거 투표일이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옥바라지선교센터의 작은 사무실로 이종건 국장(27)을 만나러 갔다. 책상 세 개와 사회과학책들이 가득한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정의가 현실을 이긴다/평화가 폭력을 이긴다"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옥바라지선교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이종건 사무국장 ⓒ 와글

  
"옥바라지선교센터는 재소자 구호단체가 아니고요"

- '옥바라지선교센터'란 이름을 듣고 처음엔 재소자 위문활동을 하는 봉사단체인 줄 알았어요. (웃음)


"새벽에 가끔 그런 전화를 받기도 해요. '남편이 감옥에 갔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고... 저희는 그런 단체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곤 하는데, 좀 죄송하죠. (웃음)"

- 왜 이름이 옥바라지선교센터죠?

"일제강점기에 서대문형무소에 항일 투사들이 갇혔을 때 그분들을 옥바라지하려고 서울 올라온 가족들이 먹고 자고 하던 곳이 형무소 맞은편 골목(종로구 무악동 46번지 일대)이에요. 여관, 대서소, 식당 같은 것들이 몰려 있어서 옥바라지골목이라고 불리게 되었대요. 우리가 이 골목에서 2016년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첫 예배를 드리면서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거든요."

- 정기총회 사진을 보니 회원 대다수가 청년들이던데요.

"옥바라지선교센터는 2016년 5월에 재개발이나 인권문제에 관심 있는 신학생들로부터 출발해서 지금도 20대가 대부분인데요, 저희가 철거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종교가 다르거나 종교가 없는 청년들도 하나둘 찾아오더라고요. 지금은 에큐메니칼(교파, 교회의 차이를 초월한 기독교운동) 사회선교단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전체 회원은 200여 명이고, 분과위원회에 소속돼서 실무적으로 참여하시는 분들은 30여 명 정도 되죠."

옥바라지선교센터 소개문에는 "우리는 쫓겨나는 이들의 곁에 십자가를 세웁니다. 쫓겨남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고자 오늘도 거리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2016년 옥바라지 골목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철거반에 맞서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이종건은 감리교신학대학에서 '도시빈민선교회'라는 동아리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학교 앞이니 한번 가보자 해서 들렀는데, 막상 현장을 보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다 허물어진 폐허에 서너 가구의 집들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는 곧바로 짐을 싸서 아직 헐리지 않은 구본장 여관에 방을 얻어 들어갔다. 그 소식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니 다른 신학교 학생들이 찾아오면서 여관을 중심으로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들이 택한 투쟁의 방법은 예배였다. 
 

2016년 서울 종로구 무악동의 옥바라지골목 재개발에 반대하는 골목예배를 드리면서 <옥바라지선교센터>의 활동은 시작되었다. 구본장여관 앞 골목예배 모습 ⓒ 박김형준

  
- 기독교사회운동을 한다고 해도 일반 시민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종교색을 빼는 경우가 많은데 옥바라지선교센터는 '선교'를 내세우면서 철거반대운동을 벌인다는 점이 특별해 보입니다.

"선교센터라고 하면 보수적인 종교단체가 떠오르실 거예요. 제게는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는 것과 사회적 영성을 가지고 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크게 구분되는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란 '쫓겨남이 없는 세상'이고, 신앙공동체란 '재산이나 가문,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게 교회 안에서 평등하게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옥바라지골목의 구본장여관 지키기에서 출발한 옥바라지선교센터는 2017년에는 서울시 아현동 아현포차거리 노점상들과 함께 했다. 쓰레기장이었던 주변에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오랫동안 장사해 온 상인들의 포장마차가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철거 위기에 놓였을 때, 옥바라지선교센터는 매주 현장예배를 드리며 노점상들과 함께 했다. 결국 마포구청의 공식사과와 함께 이들은 마포구 공덕동 경의선 공유지로 집단이전할 수 있었다. 서울 서촌의 궁중족발,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의 일터 지키기 싸움에도 옥바라지선교센터는 최일선에 섰다.

"'집 놓고 집 먹기' 그게 세상에 무슨 기여를 하나요?"

- 도시 재개발에 반대하세요? 재개발을 영원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당연히 재개발이 필요하죠. 2018년에 종로 국일고시원에 화재가 나서 거기 사시던 분들이 일곱분이나 돌아가신 사건도 있었잖아요. 소방안전시설도 안 되어 있고 주거여건이 빈약한 곳은 재개발되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개발이 과연 필요불가결한 재개발이냐, 더 좋게 만드는 재개발이냐가 문제지요. 재개발지역에 사는 분들 대부분은 동네를 돌고 돌아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턱걸이처럼 겨우 버틸 수 있는 공간에 들어가 사는 거예요. 그런 마을이 낙후했다고 재개발하면 거기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죠? 수도권의 경우 재정착률이 10명 중 3명에 불과해요."

- 재개발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라면 어떤 재개발이 필요한 걸까요?

"부동산정책이 쏟아지는데 대부분은 공급확대에 관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선 지 오래거든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순히 물량을 때려박는 공급, 은근슬쩍 민간비율을 늘려서 토건세력 달래는 공급이 아니라, 불안정 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급이죠."

2018년 기준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104.2%이다. 그러나 2019년 전국의 무주택가구 비율은 43.8%, 서울은 50.9%에 이른다. 2019년 주택보유 상위 1%는 1인당 평균 7채를 보유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는 10여년 전인 2008년의 3.5채에 비해 두 배나 증가한 것이다. 이 기간동안 공급된 주택 489만채 가운데 250만채는 다주택자에게 돌아갔다.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지만 무주택자나 상가 임차인들의 삶의 터전은 변방으로 떠밀리고 있다. 사진은 2016년 서울 종로구의 옥바라지골목 철거현장 ⓒ 박김형준

  
- 집이 주거공간이 아니라 재테크의 수단이 되면서 주거의 빈부격차가 날마다 커지고 있어요.

"성경 구절에 '땅은 다 내 것이다. 너희는 거류민이다. 그러니 잘 쓰고 잘 돌려줘야 한다'는 구절이 있어요. 땅은 하나님의 것, 다시 말해 모두를 위한 공공의 재산이란 뜻이죠. 그런데 어떻게 '집 놓고 집 먹기'가 가능해 진 걸까요? 건물을 하나 사면 그걸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다른 건물을 사고 또 사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그렇게 해서 건물을 5채, 10채 보유한 사람들이 이 도시에 생산적으로 기여하는 게 대체 뭐죠? 아무 것도 없어요. 전 매우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급진적인 변화라면?

"예전에 금융실명제를 처음 도입할 때 당시로선 큰 충격이었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 당시에 없었으니까 모르지만 '어떻게 본인 실명으로만 통장을 만드냐?' 충격이 컸다고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요?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납득이 안 될 정도로.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한국은 집에 대한 소유권이 98이면 주거권이 2에 해당할 정도로 소유권이 너무 막강한 힘을 발휘해요. 부동산을 공공재로 보고 집을 주거권의 개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은 '어떻게 내 개인재산을 공공영역으로 편입할 생각을 할 수 있어?' 하겠지만, 막상 10년쯤 지나면 '옛날에는 한 사람이 집을 300채씩 가지고 있었다는데 그게 말이 되냐?'란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거예요."

- 이번 보궐선거에서도 양당 후보들은 재건축 규제 완화, 층고제한 완화를 공약으로 내놨습니다. 재개발과 주택공급 확대를 약속해야 더 많은 유권자들이 표를 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 아닙니까? 대다수 국민들은 정말 재개발 찬성론자일까요?

"글쎄요, 유의미한 조사와 통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같은 유권자 사이에도 목소리 지분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재작년 빈곤철폐의 날 구호가 '몫소리'에 대한 것이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자기 몫의 목소리'를 온전히 내고 있나요? 똑같은 시민이라 해도 쪽방촌, 옥탑방, 고시원, 반지하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 크기와 자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 크기는 1:1이 아니라고 봅니다."
 

옥바라지선교센터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이종건 사무국장(좌)과 이진순 와글 이사장(우) ⓒ 와글

 
평화가 폭력을 이기는 최상의 방법

한국사회 청년의 대다수는 집도 없고 안정적 일자리도 없는 흙수저들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도시빈민으로 여기지 않고 지역주민으로 인식하지도 않는다. 지하방과 옥탑방, 고시원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 은폐된 빈곤인구로 존재한다. 도처에 존재하나 어느 한 곳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오지 못한 목소리들은 제각기 외로운 채 무성하다. 보궐선거 이후 20대 남성 유권자들의 몰표 현상에 대해서 정치권은 각기 제 좋을대로 해석하면서 감읍하거나 질타하지만, 20대 남성들에게서 공히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분노와 절망이다.

올해 만27살인 이종건이 이십대 남자를 대표한다고 볼 순 없다. 그러나 우리사회 '이남자(20대남자)'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나 정치적 폄하가 왜 잘못된 편견인지 깨닫게 하는 좋은 본보기일 수는 있다. 이종건은 어떻게 분노와 절망의 늪을 딛고 나올 수 있었을까? 포크레인이 가난한 사람들의 밥상을 뒤엎고 뽀얀 콘크리트 먼지가 힘없는 노인들의 머리를 덮어버리는 폭력의 현장에서, 그는 어떻게 신심과 희망을 붙들 수 있었을까?

- 어떻게 도시빈민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되었죠?

"옥선(옥바라지선교센터)는 어찌 보면 '뜬금없는 조직'이죠. (웃음) 민주화 쟁취라는 큰 구호가 끝나면서 전국의 학생운동이 쇠퇴하고 기독교운동도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저희는 새롭게 빈곤문제나 철거반대를 가지고 싸우고 있으니."

- 특별한 동기가 있나요?

"아버지가 목사님인데, 어려서 제가 경험한 시골교회란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공동체' 같은 거였어요. 돈이 많다고 장로가 되거나 권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교회 문도 늘 열려 있었고, 누군가 와서 주무시고 가기도 하고... '다 같이 잘 사는 세상'까지는 잘 모르겠고 적어도 '내가 여기서만큼은 안전하고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공간', 그런 공동체에 대한 관심,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항상 있었어요. 그래서 일찌감치 작가가 아니면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대학 원서도 감신대 한 군데만 넣었죠. 여기서 떨어지면 작가하지 하면서... (웃음)"

- 그런 공동체가 가능할까요? 임대아파트와 울타리를 치고, 주변에 청년주택이 들어선다고 하면 주민들이 땅값 떨어진다고 시위를 하기도 하는데요.

"저희가 아현포차거리를 지키는 싸움을 할 때였는데, 거기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자기 동네를 강남처럼 만들고 싶어하는 주민들이 있었죠. 그 분들이 아현포차 철거민원 넣기 전에 한 일이 뭐냐하면 마을버스를 없애달란 거였어요."

- 마을버스를 만들어달란 게 아니고 없애달라고요?

"완전 촌극이죠. 마을버스가 다닌다고 불편할 게 없잖아요. 근데 초록색 마을버스가 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없이 사는 동네 같아 보인다고. (웃음)"

- 참 황당한 일이군요.

"충분히 괜찮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려 있는 거죠. 집에 와서 누워있는데도 우리 집값이 계속 떠오르는 삶이라면,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한 걸까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철거현장에서 함께 했던 분들을 보면서 희망을 봅니다. 저희는 철거현장 한 군데가 마무리되고 거길 떠나게 되면 함께 했던 주민분들한테 왠만해선 다시 연락을 안 드리려고 하거든요."

- 왜요?

"용역한테 쫓겨나고 힘들었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고 이제는 다 잊고 자기 삶을 온전히 영위하시라고... 근데, 오히려 그분들이 저희한테 연락을 주시는 거예요. 어디 뉴스에서 봤다, 내가 가서 발언하겠다, 하고요."

- 아하!

"'내가 겪었던 아픔을 누군가 또 겪고 있는데, 나라도 가서 얘기해 주고 싶다'고 하세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잘 싸우라고. 자기의 고통을 트라우마로 남겨두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 공감하는 걸로 풀어나가시는 거죠. 저희가 네다섯번 현장을 옮겨 다닐 때마다 매번 그랬어요. 처음 옥바라지골목에서 만났던 분들과 지금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만나는 분들은 다 한번씩 만났어요. 활동하면서 정말 감동받고 희망을 느꼈던 순간이죠." 
  

철거의 아픔을 겪은 이들은 다른 이웃들의 철거현장에도 연대의식을 가지고 참여한다. 노량진수산시장 재개발에 반대하는 상인들의 모임에서,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이종건 사무국장 ⓒ 박김형준


- 철거현장에선 몸싸움과 물리적 충돌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평화가 폭력을 이긴다'는 십자가정신과 상충되는 건 아닌가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공간을 지키려고 할 뿐, 경찰을 끌어내고 뭘 던진다든지 하는 폭력은 쓰지 않아요. 그냥 스크럼을 짜고 계속 버티는 겁니다. 그러다가 뚫리면 뒷줄의 사람들이 또 스크럼을 짜고... 우릴 협상의 상대로 인정해 줄 때까지 버티는 것. 전 그게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비폭력저항이라고 생각해요. 비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뭔지 아세요? 더 많은 시민들이 모이는 겁니다. 공권력 만으론 해소할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죠. 철거현장도 사람 사는 곳이고 밥 먹는 곳이에요. 우린 노래도 하고 예배도 하고 같이 먹을 걸 해서 나눠먹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니 많이들 관심 가지고 참여해 주시면 좋겠어요."

광장에서 골목으로 촛불은 이어진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가치환산하는 사회,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 계속 아이들을 노출해야 하는 것등 꼬리를 무는 문제들은 여전히 남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한 후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또 다른 박근혜 대통령이 나온다. 그래서 대통령 퇴진은 시작일 뿐이다."

("경찰이 자꾸 우리 배후 묻는데, 굳이 배후를 밝히자면..." 2014년 5월 12일 오마이뉴스 기사 중에서)
 
- 촛불항쟁으로 박근혜 탄핵이 된 지도 4년이 지났습니다. 박근혜 퇴진은 시작일 뿐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세요? 때마침 오늘이 재보궐선거일이네요.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랑 똑같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렇게 모든 걸 간단히 뭉뚱그리면 안 되니까요. 다만 너무 많은 '나중에'를 듣게 된 건 사실이에요. LGBT와 관련해서 '나중에 (말하라)'가 나왔지만 그밖의 많은 분야에도 '나중에'가 적용되었어요. 광장은 거대한 정의를 성취하는 과정이었잖아요. 하지만 그 촛불들은 하나의 깃발이 절대 아니었어요. 어떤 건 무지개깃발, 어떤 건 철거민, 어떤 건 비정규직 깃발... 골목골목에서 나온 다양한 깃발들이 큰 줄기를 이뤄서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부 탄생이라는 하나의 결과를 냈죠. 광장에 모여서 큰 빌런을 무찔렀으면 우리는 다시 골목으로 돌아가야죠. 왜냐하면 그 골목들이 망가진 걸 다 해결하고 나온 건 아니니까. 광장의 에너지를 골목으로 돌려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요구를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야 했어요."

- 광장의 에너지를 골목으로 되돌려서 삶의 변화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보시나요?

"촛불은 각자가 가장 절박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해결하러 나온 사람들의 거대한 흐름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의 절박한 요구를 '나중에'로 미루면서 지금은 힘을 모으는 데만 집중하라고 말하는 건 적절치 않아요. 정치권력을 가진다는 건 이 배의 선장이란 뜻이잖아요.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진 않죠. 그래도 정부는 우리가 넘어야 할 산,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파도에 대해서 어떤 청사진과 프로세스를 보여줬어야 해요. 박근혜 퇴진 이후에 있었던 선거에서 네 번을 압승하지 않았나요? 그것으로도 부족했을까요? 촛불정부라는 이름으로 갈 수 있는 임계치가 분명히 있는 건데,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반성문도 없이 공정성과 효율성의 굴레에 빠져 버렸으니까."

- '공정성과 효율성의 굴레'라고요? 공정성도 굴레가 되나요?

"조국 대전 이후에 청년들 사이에서 공정성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지금 얘기되는 공정성은 '내가 순위를 1등부터 100등까지 매길게. 그 과정은 공정할 거야'라는 의미예요. 세월호 때도 사람이 수단이 되고 삶이 파편화하고 사회적 연대라는 게 무색해졌는데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공정성이 아니고 공공성이죠. 1등부터 100등까지 납득할 만하게 순위를 매겨 시험지 같은 인생을 만드는 게 공정성이라면, 불평등을 없애고 등수를 매기지 않는 삶이 공공성이라고 생각해요."

광장에서 골목으로, 나중에가 아닌 지금 바로, 등수 매기는 공정성이 아니라 불평등을 없애는 공공성이 사회의 주요가치가 되는 세상. 이십대 남성 유권자 이종건은 그런 미래를 꿈꾼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진순씨는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으로, 와글 간행 <듣도 보도 못한 정치>, 인터뷰집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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