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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보다'가 소개하는 첫 번째 장소는 청죽이발소. 1985년에 개업하여 2021년 현재까지 활발히 운영 중이다. 간판도 달려있지 않아 용기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 아직 영업을 하는 곳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느 날 이발소의 청, 홍, 백의 삼색등이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닫힌 문을 열어젖힐 결정이 섰다.

근처를 왔다 갔다 한 지 거의 한 달여 만에 들어간 이발소 내부는 나도 모르게 '와~' 감탄을 연달아 내뱉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오래된 도구들, 그 시절엔 평범했고 지금은 완전히 낡아버렸지만 그래서 아주 특별한 가구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버려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킨 작은 물건들. 마치 홍콩영화 촬영장에 허락 없이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청죽이발소 내부 정경
 청죽이발소 내부 정경
ⓒ 김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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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이발소 내부 정경
 청죽이발소 내부 정경
ⓒ 김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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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잘라 만든 듯 테두리가 불균일한 작은 상자 안에 수많은 신문조각들이 담겨있다. 위에 올려진 면도용 칼을 보니 같은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모아놓은 조각들 같은데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상자 위에 덧붙은 하얀 종이에 요금표가 검은색 매직으로 적혀있다. 그 옆에 나란히 세워진 파란색, 회색 플라스틱 통 안에 가위들이 꽂혀있다. 그 모습이 세련되진 않아도 나름의 분위기와 색감을 지니고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두꺼운 기둥 같은 연탄난로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흰색 타일을 이어붙인 머리감기용 개수대는 1980년대나 그 이전을 시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에서나 본 듯했다. 그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재래시장이라면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파란색 물바가지가 손님들 머리 위로 물을 붓는 데 쓰인다는 것을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기 전에 미리 짐작하지 못했다.
 
청죽이발소 내부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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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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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이발소 내부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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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는 Z세대에 속하는 내게 그 자체로 박물관이었다. 물건 하나하나에 대해 그 용도와 나이를 물으며 감탄하고 있으려니, 문득 이발사 할아버지의 삶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터뷰 요청을 하였고,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질문지를 직접 만들어 다시 찾아뵈었고 우리는 한 시간 반쯤 대화를 나누었다. 그게 지난 3월 12일의 일이다. 추운 겨울의 끝물, 마당 곳곳에 동백꽃이 붉게 피고 수선화가 고개를 들던 때.

할아버지는 가만가만 기억 속을 더듬으며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그의 말속에서 묘사되는 풍경과 상술되는 경험 혹은 역사를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하고 알고 있는 지식에 빗대어 대입도 해보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소중히 가슴속에 담았다.

여든셋 이발사와 나눈 대화

할아버지는 1940년생이다. 광복하던 해 6살이었던 소년은 광복의 눈물겨운 기쁨에 대해 알지 못했다. 전간기 전라북도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소년은 마을 둔치에서 어르신들께 막걸리를 얻어마시곤 했다. 광복 후 불과 5년여 만에 터진 전쟁은 당시의 취기를 말끔히, 순식간에 걷어버렸다. 소년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난을 떠났다.

다행히 먼 길 타향은 아니었고, 1950년 여름 한 철만을 타지에서 보낸 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벗겨먹은 나무껍질과 각종 '풀떼기들'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굶어 죽은 아이들이 묻힌 오솔길을 피해 걷던 기억도. 죽은 아이를 묻은 데를 오가면 복이 온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소년은 기복을 떠나 꺼림칙함이 더 커 도저히 그 위로 걸어 다니지 못했다.

"식생활이 가장 급한 거여, 호구지책이. 그야말로 막막했지. 가세가 계속 기울고 공부할 기회가 더 없을 거 같아서, 그래서 상경했어. 야간고등학교라도 다녀보려고."

전후 호구지책마저 곤란해진 가족의 경제 사정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홀로 상경하였다. 식구를 줄여 가족의 생계 부담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서울 바닥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해 갖가지 종류의 일터를 전전하였다. 어린 나이에 눈칫밥을 적잖이 먹었다. 미용일을 배우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이발소 허드렛일을 해주는 대신 먹이고 재워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시작이었다. 그때가 열여덟이었다. 몇 달 동안만 머물 생각이었으나 하다 보니 몇 년이 되었고 입대 전까지 지속했다. 1961년 2월 18일에 입대하여 1963년 12월 18일에 전역했다. 그렇게 청년이 된 그는 또다시 일거리를 찾다 보니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미용밖에 없어서 입대 전 하던 일을 입대 이후 다시 하게 되었다.

"잠깐이라도, 다른데 어디 좋은 곳 생길 때까지 있자 하던 것이... 1967년도인가 68년도인가, 미루고 미루다 면허증 따고 지금까지 허던 거여."

천직, '말직'으로 여겨지던 미용 일을 그만두고 싶어 실력이 충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용사 자격증 취득을 계속하여 미루었다. "능력이 부족했는지는 몰라도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러다 1967년 미용 자격증을 취득하는데, 어떤 단호한 결심이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른 선택이 없었고, '독립 미용사'로 일해야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일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어딨어. 해야 하니까 했지. 요즘 젊은이들이랑 달랐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

짧은 가방끈에 돈벌이가 급한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새 결혼을 해 애들까지 셋을 낳았다. 한 가정의 생계를 짊어진 채, 미용일은 선택이 아니라 삶이 되었다.

중년이 되고서도 전세금 까먹으면서 일자리 주선을 받으려고도 해봤으나 일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들 셋 대학까지 보내고 나니 이미 반평생 이상을 이발사로 일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만 훌쩍 흘러가 현재 여든셋 이발사(史)로서 청죽이발소를 곧은 대나무처럼 한결같이 지키고 있다.

연로한 그와 청죽이발소는 마치 남노송동의 이정표 같다. 그의 쭈글쭈글한 손이 백발의 주민들을 언제까지 맞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 존재와 관련된 모든 것은 유한하니까.

하지만 사람과 공간에 대한 기억은 영원할 수 있다. 귀 기울여 듣고 정성껏 기록해놓으면 된다. 전주에서 가장 발전이 더딘 곳이기에, 어느 곳보다도 귀하고 특별한 노송동, 이곳의 사라져가는 기억들을 캐내고 추적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시로 적어보았다.
 
청죽이발소

언덕배기 아스라이 기어오른 세 살배기
어르신들 주는 막걸리 겁 없이 홀짝이고는
어느새 눈 떠보니 제집 안방이었다.

어느덧 또 다른 삼 년이 흘러
우리 겨레에 울려 퍼진 만세 소리
화들짝 놀라지만 아직 까막눈을 씻지 못해
표정을 갖지 못한 소년은
떡가루에 입가만 더 지저분해질 뿐이었다.

이런 바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떡가루를 까막눈에 비벼 넣을 수 있었다면.
어수선하게 다섯 살을 더 먹은 소년은 죽음을
경험했고,
전쟁, 포탄, 총알, 잿더미, 빨치산, 게릴라, 실향, 생이별 이런 것들을
뜻을 깨치기도 전에 피부에 돋은 소름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은 죽은 아이가 묻힌 오솔길 양옆으로 자라난
풀떼기와 나무껍질 입안 가득 채우며
살아남았다. 그렇게 자라났다

소년에게 부모형제란 가족이 아니라
식구(食口)였으니 그 수를 줄이려고
책가방 하나 달랑 메고 올라간 서울 바닥
눈칫밥만 말리도록 말다가
열여덟 소년은 가위를 들었다.

사람들 정수리 냄새가 물려
가위를 몇 번이고 내던졌지만,
결국 다시 들 도리 외에 없었다.
놓았다 쥐었다 반복한 60년은
소명이 아니라 연명이었다.

언덕배기 아래 돋아난
푸른 대나무를 깎는 노인이 있다.
가위를 든 노인이 거울을 보면
세 살배기 막걸리잔 들고 실실댄다.

여든셋에 찾아온 스물일곱 청년이
어찌하여 가위를 들었느냐 물었다
아무리 물리어도 물릴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태그:#노송동, #청죽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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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 해, 다른 이들의 치열함을 흘긋거리는 중입니다. 언젠가 나의 한 줄을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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