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1편 나라 망한 을사년에 태어난 도서관계의 별들에서 이어집니다. 

이규동은 1952년 7월 경북대학교 초대 도서관장에 취임했다. 영어와 일어까지 여러 언어를 잘하고, 대구사범대학 시절부터 도서관장을 맡아온 점이 발탁의 이유였을 것이다. 원암은 1958년 12월까지 6년 5개월 동안 도서관장으로 일했다. 대구사범대학 시절인 1950년부터 헤아리면, 이규동은 역대 경북대학교 도서관장 중 가장 오랫동안 관장으로 일한 사람이다. 

이규동은 1955년부터 1959년 한국도서관협회(도협) 이사를 지냈다. 히로시마고등사범 한 해 선배 김원규 교장도 비슷한 시기 도협 이사로 활동했다. 원암이 한 대학의 도서관장에 그치지 않고, 한국 도서관계를 위해 여러 해 동안 열정적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경북대학교 개교 4개월 후인 1952년 10월,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경북대 도서관은 의예과 앞에 자리한 목조건물에서 탄생했다. 80평 정도 공간에, 초기 장서는 대구사범대학이 보유하고 있던 1만 수천여 권으로 출발했다. 초대 도서관장으로 부임한 이규동은 직원 두 명과 도서관 업무를 시작했다. 

경북대학교 초대 도서관장
 
1965년 4월  28일 회갑을 맞아 찍은 사진. 약골로 태어난 원암은 주변 지인으로부터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걱정을 사기도 했다. 우려와 달리 이규동은 장수했다. 그 비결은 마음의 평안, 욕심의 조절, 소식과 적당한 운동이었다.
▲ 원암 이규동 1965년 4월 28일 회갑을 맞아 찍은 사진. 약골로 태어난 원암은 주변 지인으로부터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걱정을 사기도 했다. 우려와 달리 이규동은 장수했다. 그 비결은 마음의 평안, 욕심의 조절, 소식과 적당한 운동이었다.
ⓒ 역락출판사 <참스승 원암 이규동>

관련사진보기

 
이규동이 남긴 회고에 따르면, 개교 시점에 경북대 직원 수는 적지 않았다. 직원 수가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도서관에 배치된 직원은 단 2명이었다. 그나마 직원 두 명도 자주 바뀌는 바람에, 도서관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대학 당국이 도서관을 '대학의 심장'이 아닌 '대학의 맹장' 쯤으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동은 이런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도서관의 사서(司書) 사무란 오랜 경험과 기술을 가져야만 능률적으로 추진시킬 수 있는 것인데 일에 익을 만하자 전직(轉職)치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부딪힘을 본 때는 실로 안타까웠다. 해방 후 각 방면에 있어서 인재의 부족을 느낀 바 컸으나 도서관계처럼 우심한 데는 없었다."

원암은 도서관과 사서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대해서도 일침을 남겼다. 
 
"도서관에 대하여 이해가 적은 이들은 흔히 도서관에 있는 것을 한직(閑職)으로 간주하며 관원들은 마음에 드는 책이나 읽고 시간적으로 아주 여유가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실정이다."

이규동이 도서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우현서루의 사부총서 4천여 권, 목산문고 희귀 문집 3천 권, 옥보문고 한의서 3백여 권을 기증받았다. 경북대 도서관이 대한제국 말기 대구에서 문을 연 우현서루 장서를 소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현서루 기증본은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특수문고에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으로부터 장서 5천 권을 기증받은 것도 이규동 재임 시절이다.

미국공보원(USIS) 도서관이 한국 도서관에 끼친 영향
 
미국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은 미국 해외 공보처 산하 기구로 세계 각국에서 미국의 대외 정책 선전과 문화 홍보를 담당했다. 1948년 한국 반도호텔에 본부를 설치하고 이후 부산, 청주, 전주, 광주, 대구, 제주에 지방 공보원을 설치했다.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영어 교육, 영상물 상영, 출판, 전시를 통해 미국 문화를 소개했다.
▲ 대구 USIS 도서관 미국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은 미국 해외 공보처 산하 기구로 세계 각국에서 미국의 대외 정책 선전과 문화 홍보를 담당했다. 1948년 한국 반도호텔에 본부를 설치하고 이후 부산, 청주, 전주, 광주, 대구, 제주에 지방 공보원을 설치했다.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영어 교육, 영상물 상영, 출판, 전시를 통해 미국 문화를 소개했다.
ⓒ NARA(제공처 :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사진보기

 
이규동은 도서관장 재직 시절에 서울과 대구 미국공보원(USIS) 도서관으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학 분야의 다양한 책을 입수해서 도서관에 비치했다. 당시 대구 미국공보원은 대구 중앙로 동북단(지금의 대구스테이션센터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암은 1956년 대구 문화원장으로 부임한 아더 맥타가트(Arthur Joseph Mctaggart) 박사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30년 동안 우정을 나눴다.

아더 맥타가트는 이중섭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고, 하회탈을 해외에 알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대구 문화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자신이 평생 모은 한국 문화재 482점을 대구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맥타가트의 동생 윌리암 역시 전직 도서관 사서였다. 대구 여러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 그의 흉상이 영남대 인문관 1층에 있고, 충주에 그를 기리는 맥타가트도서관이 있다. 

'개가제'로 운영했던 미국공보원 도서관은 당시 대학도서관뿐 아니라 학교도서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 일본을 통해 이식된 도서관에 익숙했던 시절, 서구 도서관의 전형을 보여준 미국공보원 도서관은 그 자체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 도서관 성장 과정에서 미국공보원 도서관은 나름의 역할을 했다. 미국식 도서관 제도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미국공보원 도서관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규명하는 건 향후 한국 도서관계의 과제다. 

경북대학교는 1956년 12월 10일 새롭게 도서관 건물(지금의 박물관)을 신축해서 이전했다. 경북대 도서관은 이규동 재임 시절에 도서관 신축과 이전을 마쳤다. W자 모양의 도서관 건물은 '도깨비 박사'로 유명한 건축가 조자용의 작품이다.

이규동은 1958년 도서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퇴임하던 시점에 경북대학교(74,558권)보다 더 많은 장서를 가진 도서관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590,481권), 국립도서관(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 332,744권), 연세대학교 도서관(128,393권), 고려대학교 도서관(94,096권), 해군 도서관(85,778권), 중앙대학교 도서관(78,627권), 부산대학교 도서관(77,899권), 남대문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 75,348권) 8개뿐이었다. 

개교 6년 만에 경북대 도서관은 대한민국 도서관 중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장서를 늘렸다. 이규동 관장 시절 경북대 도서관이 얼마나 빨리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어려워도 남을 도왔던 삶 
 
1951년 10월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을 합쳐 '국립 경북대학교'가 출범했다. 1952년 경북대 도서관은 사범대, 의과대, 농과대에서 보유하고 있던 자료를 인수해서 발족했다. 경북대 도서관은 1953년 5월 가건물(현 출판부 자리 목조건물)에서 문을 열었다.
▲ 초창기 경북대 도서관 1951년 10월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을 합쳐 "국립 경북대학교"가 출범했다. 1952년 경북대 도서관은 사범대, 의과대, 농과대에서 보유하고 있던 자료를 인수해서 발족했다. 경북대 도서관은 1953년 5월 가건물(현 출판부 자리 목조건물)에서 문을 열었다.
ⓒ 경북대학교 대학기록관

관련사진보기

 
1959년 12월 16일 이규동은 한국영미어문학회의 전신인 대구영어영문학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61년에는 중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인 < Highroads to English >를 출간했다. 1964년에는 경상북도 교육위원이 되었다.

회갑을 맞은 1965년 5월 6일 이규동은 '원암장학금'을 만들어 사범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이규동과 그의 아내는 근검절약하며 소리소문없이 학생과 이웃을 도왔다. 그의 선행은 퇴임 후 궁핍하게 지낸 이유가 되기도 했다. 원암이 지은 가훈은 "의롭게 살자, 부지런히 일하자, 남을 돕자"였다.

이규동은 1966년 2월 2일 '준사서' 1호로 등록되며, 대한민국 사서 자격증 발급 1호로 기록을 남겼다. 이규동이 어떻게 '대한민국 사서 1호'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 한국도서관협회가 사서 자격증을 발급할 때 나름의 '고려'를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준사서 자격증 순번을 정할 때 자격을 지닌 사람 중 도서관계에 기여한, 상징적인 인물을 1호로 삼지 않았을까.

참고로 1966년 5월 23일 '정사서' 1호 발급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을 지낸 이종문(李鍾文)이다. 2호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 백린(白麟)이다. 

1971년 8월 31일 이규동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서 정년퇴임했다. 그의 퇴임식은 그해 8월 28일 학생회관 2층에서 열렸다. 퇴임식을 끝으로 이규동은 21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규동이 정년퇴임한 1971년, 경북대학교는 사범대학 건물을 신축하면서 1층 로비 벽면에 '박정희 부조'를 새겼다. 박정희는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경북대의 전신인 대구사범학교를 다녔다.

퇴임 2년 후인 1973년 이규동은 충남 예산 가루실농민학교를 찾아가 길영희 선생을 만났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출신으로 교육과 도서관 현장에서 헌신한 두 사람의 해후였다. 1979년 원암은 경북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신의 소명을 다한 대한민국 '사서 1호'
 
경북대학교 도서관은 원래 지금의 박물관 건물에 자리했다. 1956년 12월 10일 개관한 옛 도서관 건물은 건축가 조자용의 작품이다. W자 모양의 도서관 건물은 제트기가 웅비하는 모습과 날아가는 박쥐 형상으로 지었다. 행운을 상징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 경북대학교 박물관 경북대학교 도서관은 원래 지금의 박물관 건물에 자리했다. 1956년 12월 10일 개관한 옛 도서관 건물은 건축가 조자용의 작품이다. W자 모양의 도서관 건물은 제트기가 웅비하는 모습과 날아가는 박쥐 형상으로 지었다. 행운을 상징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 백창민

관련사진보기

 
1991년 7월 31일 병원에서 투병하던 아내 이갑희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고령인 이규동이 충격을 받을까 봐 아내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2개월여 후인 10월 17일 아침 원암도 '파란 지붕, 파란 대문'으로 유명한 대명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페스탈로치'를 사표로 살아온 원암이 세상을 떠나고 13년 후, 추모 문집 <영원한 스승 원암 이규동>이 발간되었다. 2018년에는 <시대의 스승 원암 이규동>이라는 책이 4권 분량으로 출간되었다.

원암의 둘째 딸 이기남은 원암의 정신을 잇자는 취지로 2003년 '원암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원암문화재단은 언어학자인 아버지의 뜻을 이어 인류의 문맹 퇴치 사업을 벌이고 있다. 원암문화재단이 기탁한 기금으로 경북대학교는 매년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긴 교수에게 '원암학술상'을 시상하고 있다. 

원암 이규동과 같은 해 태어난 이재욱과 박봉석은 한국 도서관계에 뛰어난 발자취를 남겼다. 강진국 역시 농지개혁을 진두지휘하며 대한민국 출발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과 같은 을사년 생인 이규동 역시 새롭게 탄생한 경북대학교 초대 도서관장으로, 와해된 한국도서관협회 초기 재건 멤버로, 존경받는 스승으로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

대한민국 사서 1호, 원암의 묘소 추모비에는 <원암 이규동 선생을 추모함>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무심한 이 돌에 한 스승의 절절한 사랑과 눈물을 새기노라. 우리 겨레 일본의 강압으로 눈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 있어도 듣지 못하던 시절에, 스승은 일제 마수에 맞서 우리말, 우리 역사를 깨우쳐 먼 훗날 나라의 대들보를 기약하셨더라. 언 사람을 데려와 뜨건 가슴으로 녹였고, 헐벗은 사람을 위해 쌀독과 옷궤를 비웠고, 미욱한 사람을 위해 밤늦도록 지혜의 불길을 당기셨더라. 해방과 전쟁이 휩쓴 땅에 올곧음과 청빈으로 나라의 교육을 바로 잡으셨고, 절망의 긴 밤을 연민과 기도로 새우셨더라. 계절이 무상하듯 스승은 가셨으나, 진한 제자 사랑이 가슴을 흔들어 이 돌덩이에 하소하지만, 들리듯 사라지는 스승의 음성에 하염없이 고개만 떨구노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이규동, #원암, #경북대학교도서관장, #대한민국사서1호, #경북대학교도서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