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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평양 유랑> 스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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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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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북한 말은 낯설지언정 즐거움을 주는 소재다. 영화를 볼 때 자막이 없으면 선뜻 알아듣기 힘들다면서도, 단어를 요모조모 뜯어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식 표현이 거의 없고, 조어의 발상이 기발해 의미를 상상하며 읽게 된다는 거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시절, 학교마다 북한 말을 주제로 계기 수업이 한창이었던 적이 있다. 그래선지 웬만한 북한 말은 배워서 알고 있다. 예컨대 곽밥(도시락)과 가락지빵(도넛),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 닭알(계란), 단물(주스) 등은 뜻을 모르는 아이가 드물 정도다.

난이도가 꽤 되는 단어들도 있긴 하다. 화장실을 '위생실'로, 주차장을 '차마당'이라 부른다는 걸 안다면 중급 수준은 된다. 연인 사이의 데이트를 '산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오징어가 북한에서는 낙지를 가리키고, 북한에서 낙지가 우리의 오징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아이들 사이에서 '탈북민'으로 통하게 된다.

기실 북한 말 퀴즈대회는 학교마다 통일 교육의 단골 소재다. 국어나 사회 교과서에 종종 실리는 데다, 한때 TV의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다뤄지곤 했다. 북한 사람의 말투와 억양을 흉내 내는 것이, 학교 축제 때 선보이는 아이들의 '개인기'였던 때도 있었다.

한 아이는 언젠가 북한 말로 축구 경기를 해설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며, 당시의 느낌을 들려주었다. 그는 낯선 축구 용어와 해설자의 느긋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 연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단다. 정작 축구 경기의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간 방어수가 공격어김을 했습니다. 상대 방어수가 긴 연락을 막아냈습니다. 벌 차기를 얻어냈는데, 11미터 벌 차기 구역까지 거리가 멀어서 단번 차넣기가 어렵습니다. 가운데 몰이꾼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친구들에게 퀴즈를 냈다. 북한의 축구 해설의 일부인데, 우리말로 번역해보라는 것이었다. 소수의 '축알못'(축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렵지 않게 우리말로 옮겨냈다. 번역은 쉬워도, 현장 중계를 이렇게 듣는다면 우스꽝스러울 것 같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와중에 한 아이가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북한의 축구 해설이 우리말이고, 그걸 영어로 번역해보라고 해야 올바른 질문 아니냐는 거다. 그의 말마따나, 다른 스포츠 종목도 별반 차이는 없지만, 특히 축구 용어는 토씨를 빼고는 죄다 영어로 되어 있다. 그가 낸 퀴즈를 알아듣게 번역해보면 이쯤 될 것 같다.

"미드필더의 오프사이드입니다. 수비수가 롱패스를 차단했습니다. 프리킥 찬스인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거리가 멀어 다이렉트로 슛을 시도하긴 어렵습니다. 센터포워드에게 패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 말은 낯설고 어색하지만, 정겹고 재미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남과 북의 언어가 달라 통일의 장애물이 될 거라고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한다. 계기 수업까지도 필요 없고, 북한 관련 영화 한두 편이면 금방 적응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인민과 노동은 어쩌다 '이념의 언어'가 되었나

되레 남과 북 언어생활의 이질성보다, 우리말을 시나브로 잠식해가는 영어식 표현이 백 배는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아이들도 '감각이 있다'보다 '센스가 있다'는 말이, '상세하게'보다 '디테일하게'라는 표현이 훨씬 더 익숙하다고 했다. 한 아이는 북한 말은 영어가 혼재된 우리말에 '백신'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북한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적대감이 크지만, 적어도 북한 말에 대해선 반감이 없다. 영어로 '오염'된 우리글과 말에 대해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호의적이기까지 하다. 남과 북 언어의 이질성을 극복해야 한다면, 기준은 우리보다 북한에 더 가까울 거라는 '종북주의적' 발언까지 나왔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극도의 반감을 드러내는 두 단어, 인민과 노동. 낯설고 어색한 거야 여느 북한 말과 다르지 않지만, 듣는 순간 거부감부터 든다며 손사래를 쳤다. 부러 한자어에 담긴 말뜻을 일일이 풀어 설명해보지만, 아이들의 완고한 편견을 누그러뜨리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 그 두 단어는 '이념의 언어'였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평범한 보통 명사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에서 비롯된 언어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인민 대신 국민이나 시민이라고 해야 자연스럽고, 노동 대신 근로라는 말이 상식적인 표현이라고 말했다.

한 아이는 인민공화국은 공산국가이고, 노동당은 공산당과 동의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중국과 북한의 공식 국명과 지배 정당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여럿 존재하는데도 굳이 '이념의 언어'를 차용할 필요가 있는지 반문하기도 했다.

두 단어만 들어가면, 시대를 초월해 공산주의를 의심했다. 해방 직후 여운형의 주도한 근로인민당도, 지난 2004년 돌풍을 일으킨 민주노동당도 모두 공산주의 이념 정당으로 여긴다. 심지어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조차 공산주의 성향의 단체인가를 묻는 아이가 있을 정도다.
 
독립신문 중 일부분
 독립신문 중 일부분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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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창간사에 지역과 남녀 상하 귀천에 상관없이 모두 인민으로 통칭하고 있어서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개정된 한국사 교과서에 <독립신문> 창간호의 논설이 언급되어 있다. 참고로 해당 논설의 첫 구절을 잠깐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 데 조선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굳이 <독립신문>의 내용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민은 만민평등을 의미하는 단어다. 차라리 우리에게 익숙한 국민이라는 단어가 '이념적 언어'에 가깝다. 지난 1994년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일괄 개칭한 것만 봐도 그렇다. 알다시피, 이는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의 일환이었다.

일제가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바꾼 건,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을 길러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곧, 국민은 황국신민의 줄임말이었던 셈이다. 해방 후에도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존속되었으니, 비록 황국신민은 벗어났을지언정 '국가에 속한 백성'이라는 뜻은 그대로 남았다.

노동은 아예 기피해야 할 단어로 낙인찍혔다. '이념적 언어'에다 '자학의 언어'라는 편견이 덧씌워졌다. 누구든 노동이라고 하면 당장 고생과 가난, 더러움부터 떠올린다고 했다. 하긴 지금은 사라졌지만, 학년 초 가정환경조사서의 부모의 직업란엔 죄다 '회사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누구든 '회사원'이라 적고, '노동자'로 읽었다. 아이들에게 노동은 부끄러운 단어다.

그들은 근로자라는 익숙한 단어를 두고, 왜 굳이 노동자로 불리기를 바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스스로 비하해서 얻을 게 뭐냐고 따져 묻는 아이도 있었다. 한 아이는 영어 'Labor'를 일본이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노동이라고 명명한 거라며, 일제의 잔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민과 노동, 적어도 이 두 단어에 대한 반감은 북한의 정치 체제에 대한 그것 못지않게 크다. 정겹고 재미있다는 여느 북한 말처럼 쉽사리 친숙해질 것 같지 않다.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야 자주 쓰다 보면 익숙해질 테지만, 워낙 편견이 완고해 당최 틈이 보이지 않는다.

'노동절'이라는 이름을 돌려줄 때
 
 
과거 노동절이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방해할 목적으로 이승만 정부에 의해 생뚱맞게 3월 10일로 정해졌다가, 박정희 정부에 의해 관련 법까지 만들어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오늘날처럼 5월 1일로 되돌린 건 1994년이니, 거의 반세기 동안 '메이데이'의 의미를 잊은 채 살아야 했다.

노동에 대한 '정명(正名)'이 절실하다. 아이들에게조차 노동이 부끄러운 단어로 남아있는 한, 정부가 아무리 '노동 존중 사회'를 외친다 한들 백약이 무효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근로자의 날'이라는 허명을 버리고, '노동절'이라는 제 이름을 돌려줄 때다. 그러고 보니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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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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