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부산에서 나보다 3년 먼저 대학 신입생이었던 친형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잦았다. 어느 날은 지리산에서 전화가 오고 어떤 날은 서울의 대학 학생회관에서 생존만을 확인시켜 주는 전화를 가끔 할 뿐이었다.

유스호스텔(youth hostel) 동아리 활동이었다. 정신없이 대학에서 첫 중간고사를 끝내고 국제학사로 돌아오는 청송대 긴 의자에서 결심했다. OX 문제로 전공시험을 내는 자괴감 가득한 문과대학을 탈출하자 혼자 결의했다. 돌아올 체력이 부족할까 대학 정문까지는 내려가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학과 학생들을 만나는 동아리들이 있는 학생회관까지 진출해 보자 결정했다. 나도 여행동아리에서 태백산맥 전국을 다니리라 했다.

입학한 대학에는 매주 필수로 들어야 했던 예배 수업이 있었다. 그 대강당 2층 맨 끝에 그 동아리가 있었다. 그런데 대강당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따로 손잡이가 없이 넓은 돌난간만 있었다. 손으로 잡기에 너무 미끄럽고 넓어서 올라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몇 번이나 미끄러져서 정강이에 피멍이 들었다. 길고 긴 백두대간의 여행보다 그 돌계단이 나의 최초 동아리 가입을 가로막았다. 국제학사 지하 1층에서 우연히 만난 얼굴이 하얀 유스호스텔 선배가 다시 학생회관 3층의 한 동아리를 소개했다.

이제는 강제로 폐지된 총여학생회가 있는 학생회관 3층엔 왼손잡이를 위한 손잡이는 없었다. 대신에 따뜻하고 얇은 나무 손잡이가 4층까지 이어졌다. 승강기가 없어서 힘들었지만, 발을 단단히 못 디뎌 다치는 일은 별로 없었다.

12년 전쯤, 1980년대에는 서울 보라매 공원 안에 있었던 이름있는 학교, 7살짜리 나를 업고 부산에서 올라와 기숙사 앞에서 하염없이 고민했던 어머니께서 차마 맡기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던 그 학교에, 어쩌면 나의 모교가 됐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학교에 주말마다 학습지도 봉사활동을 가는 동아리였다.

설레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픔

설레임을 안고 들어갔다. 입학은 안 했지만 친한 후배들을 만나는 것만 같았다. 동아리 무리 사람들은 말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주 갈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 매주 봉사를 가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나도 딱 한 번 그곳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나처럼 걷고 나처럼 손짓하고 나처럼 말하는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름있는 학교의 대학생이라니 그곳 후배들은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봐줬지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삼켰다. 주말마다 경기도 광주 그 학교로 봉사 가겠다던 동아리 친구들은 신촌로터리에 돌아오면 마을버스조차도 잘 오지 않은 경기도 광주의 그 아이들에 대해서 안줏거리로라도 말하는 법은 없었다.

왜 그 학생들은 버스조차 잘 이용할 수 없어 외출조차 못 하는지 분노하는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아니 내 동기 중에는 딱 한 명 있었다. 학술부에서 활동하면서 '시대의 어둠을 넘어 실천하는 인간사랑' 동아리의 목표 규칙 학기마다 표지로 실었지만, 그 딱 한 명의 동기가 지면을 빌어 에둘러 대학생들의 맥주잔을 깨자고 비판을 했지만, 그들은 또 술에 취해 주말에 늦잠을 잤다.

여전히 대강당에 내가 잡을 만한 손잡이는 생기지 않았고 4층짜리 학생회관에 승강기는 만들지 않았다. 광주에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여기 대학교에 와서도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멋지게 동아리방들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학생회관 3층 총여학생회 맞은편에 자리 잡았던 동아리는 다른 곳보다 훨씬 넓었다. 낡고 오래된 갈색 소파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새내기 학부생은 국제학사에 방학기간 동안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국제학사에 들어 가는 것을 도와주었던 91학번 선배와 함께 처음으로 학교 정문 밖에서 함께 하숙집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가파른 철제 계단 옆 싼 가격의 집들은 모두 나의 부상을 걱정하게 했다고 선배는 귀띔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1학년 여름방학을 한 달 넘게 동아리방을 자취방 삼아 먹고 잤다. 학생회관 화장실에서의 샤워는 정말 차가웠지만, 창문도 없는 동아리방의 여름밤은 정말 꾸덕꾸덕 진저리나게 더웠다.

더위를 정 참기 어려우면 학생회관에서 세브란스 병원 넘어가는 길에 걸려 있는 큰 종 밑의 화강석에 누워서 잤다. 화강석은 해가 떨어지면 열기가 주변보다 빨리 식기 시작해서 새벽에는 한기가 들 만큼 차가웠다. 병원에 인턴 의사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면 일어났다. 더위를 피할 수 있다면 수십 마리의 모기라도 내버려 둘만 했다.

동아리 방에서 처음으로 농활도 출발했고 농촌 아이들의 울음을 뒤로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동아리 방으로 돌아왔다. 열흘 넘게 몸을 씻지 못하면 강남에 사는 선배가 집에서 욕실을 사용하게도 해줬다. 1990년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한 장면을 구현해 버렸다.

당연함에도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

그러나 농촌 현실을 체험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를 반대하는 나의 대학의 친구들은 나와 함께 대학에 들어온 21명의 특수교육대상자의 학교생활은 체험해 주지 않았다. 백 년이 넘었다고 기념 우표도 발행하고 당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지체 장애인 특수학교를 열었던 대학에서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화장실은 정문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백주년 기념관에 딱 하나 있었다. 친구들은 당연하게 오줌통을 들고 다녔다.

신촌에서 대학 정문까지 휘젓고 올라오면 축축한 잔디밭 말고는 마땅히 쉴 곳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백주년 기념관 앞까지 오면 백양로 길가까지 삐죽이 나온 하얀 계단석에 편히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 학교의 유일한 장애인 화장실은 뒤풀이가 끝난 동아리 가는 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기념관 운영 시간에 따라 늘 문이 잠겼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위한 건물 투자에 필요한 기성회비를 다 내었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도, 강의실도, 연구실도 거의 없었다. 등록금을 낼 것을 다 내고 입학했지만, 우리가 읽고 쓰고 싸는 것에 쓰이지 않았다. 누구는 우리를 보고 소수를 위한 과잉 투자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 누구는 우리들의 기성회비와 등록금으로 '무임승차'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어나는 차별과 어려움의 고달픔보다 입학을 '허가'해 주었으니 마냥 고마워하라는 것이 더 서글펐다.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다"

어느 날 사회학과 대학원생 서동진 씨가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에 '게이·레즈비언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과 함께 자신의 삐삐번호를 공개했다. 한 달도 안 돼서 대학 최초의 성소수자 모임 '컴투게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중앙도서관 앞에 천막 동아리방이 열렸다.

대학 오기 전까지 동성애가 무엇인지 성소수자가 누구인지 몰랐고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단어도 처음 들었지만 솔직히 부러웠다. 그 분들을 향한 욕설과 혐오조차 부러웠다. 하루가 멀다하고 그들을 향한 기사들이 학교 안팎에서 쏟아졌다. 하루는 그 천막에 가서 여쭤봤다.

"저희도 우리의 인권과 문제를 알리기 위해 농성하고 싶어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천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우리 앞에 무리지어 앉았던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가 곧 철수하는데 다 남겨주고 가겠다. 천막 간판만 '동성애'에서 '장애인'으로 바꿔 달아주겠다."
 
게르니카 언론매체담당 일꾼들. 2000년 촬영.
 게르니카 언론매체담당 일꾼들. 2000년 촬영.
ⓒ 김주현

관련사진보기

 
얼마되지 않아 그분들이 남겨 준 책상과 서명판을 가지고 학생회관 앞에서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전동 휠체어를 탄 동기가 고무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붙잡고 다녔으나 바삐 가는 사람들을 쉬이 잡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람 많은 중앙도서관까지 다 들리도록 소리만 빽빽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수십 명의 여성이 책상 앞으로 몰려들었다. 양쪽 손 가득히 김밥과 생수를 안겨주고는 서명지와 요구안을 들고 갔다. 한 두 시간 뒤에는 더 많은 여성이 몰려 왔는데 온몸에 요구안을 손으로 적은 긴 플랭 카드를 잔뜩 들고 와 우리 앞뒤 가로수에 잔뜩 걸어 주고는 서명지도 잔뜩 복사해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 현수막 아래에는 온통 총여학생회라고 적혀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는 총여학생회에서 짐을 두고 정리하라고 초대받아 올라갔다. 어안이 벙벙해서 물어봤었다. "우리를 왜...?" 그중에 한 분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너의 문제는 나의 문제, 너의 차별은 나의 차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장애인 인권운동 동아리 '게르니카'는 그렇게 탄생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형수 님은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립니다.


태그:#장애인인권, #게르니카, #성소수자, #약자
댓글

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