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1 13:08최종 업데이트 21.05.11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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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외무부(지금의 외교부)가 '5·18 북한 개입설'을 중남미 각국에 확산시켰음을 보여주는 대외비 문건이 보도됐다. 10일 자 <오마이뉴스>에 보도된 '1980.5.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중남미 반응 1980' 문건은 박동진 장관 때인 1980년 5~6월에 외무부가 중남미 15개 대사관을 통해 북한 개입설을 유포하고 상황을 점검한 사실을 담고 있다. ([관련기사]  '5.18 북한 개입설' 퍼뜨렸던 외무부... 대외비 문서 첫 확인)

전두환 신군부의 핵심 기구인 국군보안사령부(지금의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도 보고된 이 문서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주재 대사관은 "5월 28일 자 유력지 <라 나씨온>(La Nacion)은 국제정치상 한반도 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광주사태를 북괴가 악용할 여지를 경계하는 사설을 게재"했다고 한 뒤 "동일자 유력지 <라 쁘렌사>(La Prensa)(는) 광주사태가 북괴의 간첩 책동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아르헨티나 대사관은 그런 보도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자신들의 활동의 결과임을 강조했다. "언론계 접촉 강화"의 결과로 나온 보도들이라고 대사관은 보고했다. 멕시코·칠레·콜롬비아·파나마·수리남에 주재한 대사관들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보고됐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국가들도 있었다. 대서양에 접한 베네수엘라와 태평양에 접한 에콰도르가 그랬다. 베네수엘라 주재 대사관은 "타국 국내문제 간섭의 인상을 주는 발언은 삼가는 입장"이라고 현지 정부의 분위기를 설명했고, 에콰도르 주재 대사관은 "서울발 외신 기사가 아국에 유리하게 발신되도록 지도·조정함이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현지 언론보도에 영향을 끼칠 필요성을 언급했다.

위 <오마이뉴스> 기사는 "각 대사관의 문건을 수합한 외무부는 '종합대책'을 세우기도 했다"면서 "▲유력 인사 방한 초청 및 경제기술 협력 사업을 계획대로 적극 추진하고 우호협력 관계 증진 도모 ▲우리나라 실정을 소개하는 홍보자료를 제작하고 현지어로 배포 ▲왜곡 보도에 대한 해명 등 적극적인 대응책 수립 ▲유력 언론인 등 친한(파) 인사를 활용해 유리한 기사 게재 등 다각적 홍보활동 전개" 등의 필요성이 외무부 '종합대책'으로 수립됐다고 보도했다.

북한 남침설이 필요했던 전두환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5·17 쿠데타)로 5·18 항쟁을 촉발한 신군부는 21일 시민군에 접수당한 전남도청을 27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광주항쟁을 진압한 이날, 신군부가 국무회의를 통해 내놓은 조치가 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령 의결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5월 31일 발족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현판식 후 전두환 상임위원장(왼쪽)과 박충훈 국무총리(오른쪽)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자료사진

 
국보위는 형식적으로는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상정부 혹은 임시정부였다. 1979년 12·12쿠데타를 계기로 사실상 이뤄졌던 전두환과 신군부의 국가권력 장악은 1980년 5월 국보위 출범을 통해 '합법'의 외양을 띠게 됐다. 바로 이 시기에 외무부가 해외 대사관들을 통해 5·18 북한 개입설을 유포하며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가담했던 것이다.

전두환 신군부가 북한을 악용하는 일은 5·18 이후뿐 아니라 그 전에도 심각했다. 박정희가 암살된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 제주를 제외한 지역에 비상계엄이 시행됐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해제하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이 계엄을 제주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고자 5·17 쿠데타를 준비했다. 이렇게 신군부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5·17 쿠데타의 준비 과정에서도 그들은 북한을 악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사용한 수단은 '북괴 남침설'이었다. 이것은 국민들의 민주화 및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피해가는 방편으로 활용됐다. 군부의 정치 개입을 가능케 했던 비상계엄이 해제되는 것을 막는 데에 남침설이 악용된 것이다. 2002년 <국제정치논총> 제42집 제3호에 실린 박선원 당시 연세대 연구교수의 논문 '냉전기 한일협력의 국제정치-1980년 신군부 등장과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렇게 설명한다.
 
1980년 5월 3~12일까지 전두환은 군의 시위진압 동원태세 완료, 김대중 등 정치인 체포계획 완료,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국회해산,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 계획 등을 완료했지만, 명분이 부족하였다. 학생 소요를 이유로 전시 혹은 그에 준하는 상황에만 발동할 수 있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조치를 취할 수는 없었다. 북한 남침설이 필요했다.
 
북한 남침설이 필요한 상황에서 때마침 도쿄발 첩보가 날아들었다. 일본 외무성 북동아시아과, 아시아친선교류협회, 공안조사처와 더불어 북한에 관한 오보의 주된 진원지였던 내각조사실에서 북한 남침설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때 마침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의 제보가 있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제보의 내용은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북한이 남침을 결행하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발 '북한 남침설'은 다분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위 논문에 따르면, 1979년 12월에는 1차례, 1980년 1월에는 4차례나 일본에서 그런 정보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일상적으로 제공되던 첩보 중 하나를 신군부가 활용했던 것이다.

이 당시 <르몽드>에서는 남침 가능성이 없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이런 보도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다. 진짜 정보를 차단한 전두환은 신빙성이 확인되지도 않은 내각조사실 첩보를 근거로 분위기를 조성해갔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전두환은) 비상국무회의를 12일 밤에 소집하여 정국 안정을 위해 더 강도 높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3일 전두환은 주한미사령관인 존 위컴을 만나 특수부대 이동의 정당성과 계엄 확대 및 철저한 통제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위컴은 전두환이 '청와대로 가기 위한 마지막 빌미를 찾고 있다'고 펜타곤에 보고하였다.
 
미 국방부에 대한 보고에서 위컴은 북한 남침설을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 위한 '마지막 빌미'라고 평가했다. 한국 방위를 담당하는 주한미군사령관이 남침설을 허위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두환 신군부는 허위 정보를 퍼트렸다. 5·18과 그 후에는 북한 개입설을 퍼트렸고, 5·18 전에는 북한 남침설을 퍼트렸다.

전두환은 자신이 내각조사실 첩보를 진짜로 믿었으며 실제로 온몸이 전율했노라고 주장했다. 김영선 중앙정보부 제2차장으로부터 첩보를 보고받은 직후를 <전두환 회고록> 제1권은 이렇게 묘사한다.
 
보고를 받고 김 차장을 돌려보내자 온몸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불안해지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려하던 위협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대규모 정규전은 아니더라도, 북한의 특수8군단이 투입돼 비정규전이 벌어진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의 시위 정국을 악용해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정도로 당시 시위 상황은 심각했다. 더구나 5월 15일부터 20일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는 구체적 날짜까지 명기된 첩보여서, 북한의 정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북한을 악용하지 않고는 국민 신임을 얻을 길이 없었던 자신의 '정체'를 그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쿠데타에 9사단 동원... 자기 모순

노태우가 전두환 정권 2인자이자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2·12 쿠데타의 승부수가 된 결정적 한 방이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물태우'라는 평가에 어울리지 않게 전방의 9사단 병력을 쿠데타에 동원한 그의 무모함은 정부군을 제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무모함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전방 병력이 줄어들어도 북한이 남침하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있었기에 그렇게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북한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보여줄 만하다. 북한을 정말로 두려워했거나 남침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면, 그렇게 행동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이 전날 승진한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에게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준 뒤 악수하고 있다(1980. 8.6). ⓒ 국가기록원

 
회고록에서 내각조사실 첩보를 설명하기 직전에 전두환이 언급한 것이 있다. 박정희가 암살된 10·26 사태 직후에 발생한 일들을 설명하는 대목으로, 북한군 남침을 운운했던 신군부의 허위를 보여줄 수 있는 자료다. 전두환은 "10·26 사건이 발생하자 우리 내부의 혼란과 정국 불안을 틈타 대남 도발을 강화하려는 북한의 움직임들이 포착됐다"고 한 뒤 이렇게 회고했다.
 
네 건의 무장공비 침투도 있었다. 비무장지대 공동경비구역 내 남방 지역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미군 간의 총격이 있었다. 서울 북방 9사단 지역 한강 하구로 침투하던 무장공비가 아군에 발각돼 사살됐고, 무장간첩선 한 척이 경북 포항만으로 침투하다 우리 해군에 격침되기도 했다.
 
전두환은 10·26과 12·12 사이에 9사단 지역에서 사단 병력과 무장공비의 충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10·26 이후의 안보 위기를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전두환 신군부는 별다른 고민 없이 9사단을 쿠데타에 동원했다. '그들이 선전하는 안보 위협'과 '실제의 안보 위협'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군부는 무장공비가 침투한 지역의 군대를 쿠데타에 동원할 정도로 대담했다. 그런 신군부의 수장이 실체도 확인되지 않은 내각조사실 첩보를 듣고 "온몸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엄살을 부렸다. 이들이 강조하는 안보 위협이 허구라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전두환과 신군부는 실제로는 북한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북한 위협론을 한껏 부풀리며 5·17 쿠데타를 준비하고 5·18 학살을 합리화했다. 거기다가 외무부와 해외 대사관들을 이용해 북한 개입설을 유포하기까지 했다. 전두환 자신의 회고처럼 "북한의 정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처럼 북한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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