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5월 6일, 영국 지방 선거에서 초미의 관심은 런던 시장선거보다 하틀풀(Hartlepool) 하원 보궐 선거였다. 선거 직전, 노동당 대표 스타머(Keir Starmer)가 공개적으로 이곳만큼은 꼭 이기고 싶다고 밝힐 정도였다. 하틀풀은 어업, 선박 제조, 약간의 철강을 주산업으로 하는, 잉글랜드 북동쪽 뉴캐슬 아래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이다. 어쩌다가 인구 9만명의 소도시가 9백만 수도인 런던보다 더 관심을 끌게 되었을까.

이유는 하틀풀이 '붉은 벽'의 일부라는 데 있다. '붉은 벽'은 지리적으로는 잉글랜드 중부 지역을 가리키고 정치적으로는 영국 노동당의 심장이라 불린다. 노동당은 근 100년간 단 한번도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 지역과 노동당과의 강한 연대는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다.

철강, 석탄, 철도 산업 중심지로서 18세기 산업 혁명으로 노동자 계층이 형성된 이래, 이들은 19세기 참정권 운동, 아동 노동 폐지와 노동법 개혁 등 각종 사회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또 이곳은, 1980년대 민영화 정책 당시 보수당 대처 수상과 첨예한 갈등을 겪어 보수당에 날을 날카롭게 세웠던 곳이다.    

'보수당' 택한 노동자 지역... 노동당 전 대표 '애통하다'
 
영국 노동당 대표 스타머(Keir Starmer)
 영국 노동당 대표 스타머(Keir Starmer)
ⓒ 권신영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당시 '붉은 벽' 지역은 브렉시트 탈퇴를 택했고, 이후 2019년 말 총선에서 상당 부분이 보수당을 택했다. '붉은 벽'의 몰락은 보수당에게 "역사적 승리"였고, 이는 반대로 노동당을 전례없는 위기로 빠뜨렸다. 당시 노동당 대표 제레미 코빈이 물러나면서도 '이 지역의 패배는 정말 애통하다'고 누차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노동당은 당을 재건할 새로운 지도자로 현재의 스타머를 뽑았다.

이런 배경에서 하틀풀 보궐 선거는 스타머가 자신의 리더쉽을 증명해야 하고, 노동당으로서는 '붉은 벽'에서 노동당의 건재함을 증명해야 하는 중요성이 있었다. 가능성은 있었다. 왜냐면, 하틀풀은 브렉시트 투표에서 주민의 약 70%가 탈퇴를 지지했으나, 2019년 총선에서 아직까지는 노동당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보궐 선거는 보리스 존슨 수상의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왜 노동자 계층이 보수화되는가? 1930년대 이후 단 한번도 보이지 않았던 현상이 왜 지금 발생하고 있는가는 지지층을 잃어버린 노동당 측은 물론이고 이겨서 기쁜 보수당에게도 딱히 설명이 되지 않는 난제다.   

보수당 테레사 메이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을 맡은 필립 해먼드(Phillip Hammond, 1955-)는 독립 단체 '변화하는 유럽 속의 영국'(UK in a changing Europe)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브렉시트로 인한 대가는, 100% 확실하게 '탈퇴(Leave)'를 원했던 이들, 그 이전에 단 한번도 보수당을 찍지 않았으나 (2019년 총선에서) 보리스 존슨에게 표를 던진 이들이 흡수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 계층이 2010년대 후반 연속으로 보여준 선택은 온건 보수인 그에게도 이성적인 선택이 아닌, 납득되지 않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브렉시트의 본질

2016년 5월 브렉시트 투표를 앞두고 파이낸셜 타임즈 칼럼니스트 기디온 라흐만(Gideon Rachman)은 다소 뜬금없이 캠브리지대 역사학과를 방문한다. 유럽연합 내 잔류-탈퇴 논쟁이 정치-경제 영역을 넘어 역사까지 동원되는 것을 보고, 이 투표가 경제 질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더 본질적으로 영국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근대 국민 국가인 영국에 두어야 할지 아니면 국민 국가를 넘어선 EU에 두어야 할지, 그 본질적 선택에 대한 질문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당시 역사학자들도 "영국적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는 주제로 영국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시각과 유럽과의 상관성을 중시하는 쪽이 논쟁 중이었다. 존재한다고 보는 학자들은 중세 이후 독자적인 근대 사회로의 길을 걸은 영국의 고유성을 강조하면서 탈퇴까지는 아니더라도 EU가 각 주권 국가의 자율성을 최대 보장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영국만의 고유성은 허구다"쪽의 학자들은, 한 사회의 독자성에 대한 강조가 자칫하면 국수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우려하며 친-EU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취재 후, 라흐만은 "역사가 정치 논쟁에 휩쓸리는 것은 그 사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신호다"고 결론내린다. 정체성의 위기란 소속감의 위기로, 이것은 EU질서에 대한 불안감을 뜻한다. 세계화와 시장의 효율성이라는 슬로건하에 끊임없는 인구 이동, 경쟁이 가지고 오는 압박감과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증가하는 사회적 격차가 빚어내는 박탈감에 지쳐 문화적 코드를 공유한 전통적 정치 공동체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2019년 총선 복기 과정에서 "노동당과 민족주의"라는 주제로 등장한다.

노동당과 민족(애국)주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유럽연합(EU) 탈퇴 연설을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유럽연합(EU) 탈퇴 연설을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 CNN

관련사진보기

 
조지 오웰은 "(영국의) 좌익은 영국인이 되는 것을 약간 불명예스럽게 느끼고, 또 그들은 영국적인 제도에 대해 비웃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침묵, 영국 노동당의 약점을 제대로 끌어낸 통찰력이다. 없앨 수는 없으나 노동당이 민족주의의 발현을 경계하는 데는 나름의 역사적 이유가 있다. 역사학자 그레그 로젠은 노동당의 전통은 민족주의에 기반하였으나 1차대전을 전후로 비판적 태도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과거 한국 및 식민지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에 맞서는 저항 이데올로기였다면, 영국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를 떠받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패전국인 일본 제국주의는 강제 종료당했지만, 승전국이었던 영국은 제국주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를 내려 놓아야 했다. 게다가 1930년대 유럽을 휩쓸었던 파시즘과 나치즘과 싸우며 보았던 민족주의의 극단은 주의해야 할 대상이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노동당의 침묵은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양성을 선호하는 세계화 속에서 민족주의는 지엽적 문제에 불과했고, 영국의 인구와 문화 구성은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각각 100만이 넘는 폴란드와 인도 이민자 사회가 있고,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수십만의 EU인과 외국인이 거주한다. 탈민족주의적 사회 구성은 노동당이 국경에 대한 제약 없이 본연의 관심, 노동과 복지에 집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수상이 재임한 1997년부터 2010년은 노동자 계층부터 중산층 지지까지 끌어안았던 노동당의 황금 시대였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악화되는 사회 불평등은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 계층을 노동당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게 했다. 정치학자 크리스 비커톤에 따르면, 이들은 정부가 합법성과 목적을 유권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EU에서 찾고 있는 모습에 실망했다. 노동당을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냈지만 노동당은 어느 순간부터 그들보다 EU를 먼저 쳐다 보았고, EU 권력이 영국 내로 확산될수록 노동자 계층은 그들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음을 실감했다는 설명이다.

노동당이 자신들을 대표하지 못했을 때 보수당-노동당의 차이는 무의미해졌고 오히려 브렉시트, 즉 EU 탈퇴를 통해 영국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사회적 안정감을 약속하는 보수당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고 그는 분석했다.  

한편 잃어버린 지지층을 회복하자는 방안 중 하나로, 노동당 내에서 민족주의 요소를 당의 언어에 결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2021년 2월 초 외부로 유출된 노동당 내부 문건에 의하면, 당은 유니언 잭(영국 국기)을 활용하는 방안을 토론했다. BBC에 따르면 노동당원의 절반 이상이 이 안을 찬성하고 있다고 한다.

'민족주의'라는 손쉬운 방안에 대한 비판이 곧 제기되었다. 민족주의가 발현될 때 최대 수혜자는 결국 우파 포퓰리즘이라는 것이다. 불평등 지수가 높아가는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코스모폴리탄 엘리트, 이민자, 특정 종교(무슬림), 인종적 차별과 결합하기 쉽기 때문에 민족주의 이용은 노동당의 막다른 골목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주의보다는 영국 전통에서 보이는 상호 부조 혹은 불공정을 거부하는 사회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양날의 검인 민족주의에 대한 결론을 못내린 상황에서 보리스 존슨이 선수를 쳤다. 3월 24일, 특정일에만 국기 게양을 의무화했던 것을 변경, 모든 관공서는 항상 국기를 게양하도록 행정 조치를 취한 것이다. 결국 코로나 상황에서 선거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노동당은 하틀풀에서 패배, 노동당은 '붉은 벽'에서 한층 더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딜레마는 노동당 뿐 아니라 보수당에게도 다가오고 있다. 민족주의 활용으로 노동당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대신 스코틀랜드는 물론이고 잠자고 있던 웨일즈의 민족주의가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그:#민족주의, #노동당, #보수당, #지방 선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20년대와 대화할 수 있는 역사를 나누고 싶은 역사학도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