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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말]
김철수 열사
 김철수 열사
ⓒ 김동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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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인 1991년 5월 18일. 5·18 영령을 추모하고 학생들의 주체적 권리를 확인하는 행사를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는 보성고등학교에서 학생회가 주도하여 열고 있었다. 공식적인 학교 행사인지라 단상에는 교장선생님도 추모하는 검은 깃을 달고 앉아 있었다. 마지막 행사로 참여한 학생과 교사들이 운동장에 둥그렇게 모여서 학생회가 써 온 '우리의 결의'를 읽는 시간이었다.

그때 학교 건물 동편을 지나 누군가 강렬한 불길을 일으키며 뛰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겁을 하고 학생들이 물러나며 통로를 내자 어떤 학생이 원 안쪽으로 들어와서 똑바로 선 채로 호령하고 있었다.

"너희들 이렇게 잘못된 교육 계속 받을래?"

나는 입고 있던 양복 상의를 벗어서 불을 꺼 보려고 했으나 바람만 일으키는 듯하여 물통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교실에 남아 있었던 학생들이 던진 바께쓰 등으로 불을 끌 수 있었다. 옷가지들이 다 타버리고 팬티 일부만 남은 상태로 두 주먹을 똑바로 쥔 채로 서 있는 학생은 3학년 김철수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와중에도 "선생님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후송차 타기 전 "통일의 노래를 불러 달라"
 
1991년 6월 8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고등학생 고 김철수열사 민주국민장'이 거행됐다.
 1991년 6월 8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고등학생 고 김철수열사 민주국민장"이 거행됐다.
ⓒ 김태성 전대신문사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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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교사의 차에 태워서 가까운 보성아산병원으로 후송하는데 어떤 학생이 나에게 쪽지 한 장을 전해주었다. 연습장을 찢어 쓴 듯한 그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통일의 노래를 불러 달라'.

철수가 차를 타기 전에 했던 말을 적어서 내게 전달한 것이었다. 이 충격적인 장면을 본 학생들은 땅바닥을 뒹굴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무엇을 해야 할지 정신이 돌아왔다. 마이크도 꺼져 있는 단상으로 올라가서 있는 힘껏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학생들도 이내 정신을 차리는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깨를 걸고 거리로 진출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러다 학생들이 다칠까 염려가 되어 달려가서 맨앞을 가로막고 학생들을 제지해보려 했다. 가당치도 않은 행동이었지만…….

한동안 출동한 경찰과 대치하였다. 그리고 보성아산병원에 가보았더니 응급조치를 하고 광주로 이송하기 위해 철수를 구급차에 태우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철수의 침착하고 맑은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여러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확실히 믿습니다"
 
장례 행렬에서 열사의 보성고 친구들이 상여를 메고 운구하고 있다.
 장례 행렬에서 열사의 보성고 친구들이 상여를 메고 운구하고 있다.
ⓒ 김태성 전대신문사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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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가 이런 결심을 하는 데는 명지대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고, 이에 분노하여 죽음으로 항거한 전남대 박승희 열사의 분신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광주에 있는 전남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시종 꿋꿋한 모습을 보이더니 다음과 같은 유언을 녹음하고 6월 2일 오전에 운명하여 열사가 되었다.

"우리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현 시국이 어떤 사회로 흘러가고 있는지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자기만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만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로보트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엄연한 학생입니다.
제가 왜 그런 로보트 교육을 받아야 합니까?
저는 더 이상 그런 취급을 받느니
지금의 교육을 회피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여러분,
무엇이 진실한 삶인지 하나에서 열까지 생각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하는 일마다 정의가 커져 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게 힘이 없습니다.
3주일 동안 밥 한술도 못 먹고 하루에 물 한 컵만 먹고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지금까지 힘차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확실히 믿습니다.
다음에 살아서 더욱 힘차게 만납시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김철수 열사가 사망 사흘 전 녹음한 육성 유언)


'여러분'을 힘차면서도 다감한 어투로 두 차례 반복한 후에 '저는 여러분을 확실히 믿습니다'라고 한 말이 더욱 가슴에 절절히 남아 있다.

약한 친구 도와주던 의리 넘치던 친구
 
친구들과 자전거 하이킹을 가서 라면을 끓여 먹고는 '아, 좋다'라고 외치는 열사(사진 오른쪽).
 친구들과 자전거 하이킹을 가서 라면을 끓여 먹고는 "아, 좋다"라고 외치는 열사(사진 오른쪽).
ⓒ 정경호 선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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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자전거 하이킹을 가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사진 가운데).
 친구들과 자전거 하이킹을 가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사진 가운데).
ⓒ 정경호 선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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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이후에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친구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전해준 이야기는 그의 인간적 면모와 신념 등이 녹아 있어 더욱 숙연해진다.

보성 동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그 학교의 전통으로 흑염소를 장학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흑염소를 잘 키워서 새끼를 낳으면 학교에 한 마리 들여놓아 후배들이 장학금으로 또 흑염소를 받는 식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한 친구가 자전거 하이킹을 제안해서 가게 되었다. 철수가 "우리 라면이라도 끓여 먹자"라고 제안했고, 비포장길인 보성에서 회천 가는 고갯길 마루인 봇재에 들러 라면을 끓여 먹었고, 철수는 "아~ 좋다!" 하면서 뒤로 고개를 젖히고 사진을 찍었다.

체구가 작은 짝궁을 친구들이 놀리고 무시하자, 철수는 "야!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지 놀리면 되냐?"라고 말했고, 어눌하여 친구들에게 무시당한 친구를 보호하고 공부도 도와주었던 의리가 넘치는 친구였다.

그때 철수에게 보호를 받았던 친구가 분신 이후 병상에 찾아와 '얼른 일어나 백 원짜리 라면 끓여 먹자'는 편지를 남겨서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1학년 때 동아리에 들어오기 위해 선배들이 면접을 보는데 '가난이 우리 부모님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한 농촌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하여 같이 면접을 보러 대기하던 친구가 너무나도 인상이 깊어서 자신의 일기장에 써놓기도 했다고 한다.

교내 봉사동아리 지도교사로 만난 김철수
  
김철수 열사의 장례식 날이기도 한 1991년 6월 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제 관련 자료.
 김철수 열사의 장례식 날이기도 한 1991년 6월 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제 관련 자료.
ⓒ 정경호 선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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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의 인연은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교내 봉사동아리인 '인터랙트' 회원으로 들어왔고 나는 지도교사였다.

여름에 보성군 율어면 자모리에 있는 보성강변으로 캠핑을 갔다. 캠핑을 가면 꼭 하곤 했던 캠프파이어를 하기 위해서 나무를 구하는데 그 나무가 강 건너편에 있었다. 물살도 세지 않고 물길도 깊지 않아서 건너편에 쌓인 나무들을 옮겨오기로 했는데 철수가 웃통을 벗고 제일 앞장서서 나아갔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철수가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는 변호사가 되어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가까운 친구들이 증언해주었다. 또 철수의 공부 방법은 특이했다. 사회과목 중 평등의 원칙, 국민의 4대 의무 등을 배울 때 책의 뒤쪽에 나와 있는 헌법 조문을 외우는 방식이었다. 친구가 "왜 그렇게 공부하냐?"고 묻자, "그래야 기억이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했다.

이러한 학구열이 표현된 일화로 고등학교 2~3학년 때 새벽 2~3시 빈 교실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부가 잘된다고 하면서. 그런데 어느 날부터 수위아저씨에게 열쇠를 달라고 하니까 귀찮아져서 열쇠보관함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산비탈 위에서 사는 친구 집에 연탄을 나르면서도 힘들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끝나고 나서 친구 어머니에게 "라면 하나 끓여주세요" 살갑게 말해서 어른들이 더 좋아했다.

공책에 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될 것인가?'
  
김철수 열사의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하는 친구.
 김철수 열사의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하는 친구.
ⓒ 김태성 전대신문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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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는 5·18행사를 학생회가 학교 측과 협의해서 하는데, 1시간만 하게 하였다고 해서 학생주임에게 '너무 한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행사가 끝나고 교실에 들어간 후에 도저히 참지 못하여 몇몇 학생들을 규합하여 어깨를 걸고 시위를 하러 나오다가 학생주임에게 제지당한 일도 있었다.

같은 해 노동현장을 보고 오겠다는 결심으로 부산에 있는 고무신 공장에 가서 며칠 일하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아서 무단결석을 했다고 하여 담임교사에게 체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김철수 열사를 생각하는 친구들에 따르면 철수는 마음이 여리지만, 아니다 싶은 것은 돌려서 말하지 않는 진솔하고도 강직한 성격이었다.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한 학생이었던 것이다. 붙임성이 좋아서 어른들에게도 살가웠고, 자기감정에 충실하고도 정직하였다.

무엇보다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공책에다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쓴 후에 마지막 부분에 혈서를 쓰기도 했는데, 분신 후에 자취방에 가보니 그 공책이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고 친한 친구는 안타까워하였다.

한 세대 전 처참한 교육현실에 정면으로 대항
  
보성고 교정에 세워진 김철수 열사의 동상. 동상은 친구들과 후원자들의 성금, 또 전교조, 보성교육지원청, 보성고등학교 교장과 학생들의 지원과 참여로 2017년 10월 28일에 보성고 교정에 세워졌다.
 보성고 교정에 세워진 김철수 열사의 동상. 동상은 친구들과 후원자들의 성금, 또 전교조, 보성교육지원청, 보성고등학교 교장과 학생들의 지원과 참여로 2017년 10월 28일에 보성고 교정에 세워졌다.
ⓒ 정경호 선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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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열사의 약력과 삶의 여정을 기록해놓은 동판.
 김철수 열사의 약력과 삶의 여정을 기록해놓은 동판.
ⓒ 정경호 선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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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김철수 열사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것은 정의로운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정의를 말하는 이유는 정의가 있어야 공동체가 유대하고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대들에게 정의는 공정을 의미하는 것이고, 각자도생을 할 테니 기회의 공정을 보장하라고 주장한다. 즉, 내 몫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게 적어도 기회는 공정해야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이런 생각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풍토가 문제이다. 가장 순수할 뿐만 아니라 학습 능력이 우수하고, 일생을 좌우할 가치관을 길러야 할 시기에 무한 경쟁만 가르치는 학교교육이 가장 큰 문제이다.

물론 그 학교교육의 폐단을 조장하는 것은 학연에 의해 많은 것이 좌우되는 우리 사회의 병폐와 그것을 떠받들고 있는 입시정책이다. 그래서 학생의 개성과 소질을 존중하는 교육이 아닌, 무한한 학력 경쟁에 학생을 종속시키고 대상화하는 교육이다. 김철수 학생은 한 세대 전에 이런 처참한 교육현실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열사가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 이 글을 쓴 정경호씨는 1991년 당시 보성고 교사를 지내는 등 36년 동안의 교사 생활을 마감하고 지금은 퇴임했다. 현재는 김철수 열사의 염원 가운데 하나를 실현하기 위해 통일강사로 활동중이다.


태그:#김철수 , #1991년 5월 투쟁, #보성고, #노태우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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