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역사연구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학술대회(《동학농민전쟁의 민족운동사적 성격 검토》)가 지난 5월 20일(목) 서울역사박물관 야주개홀에서 열렸다. 학술대회는 오전 10시에 시작하여 오후 17시까지 진행되었다. 필자는 학술대회에 줌으로 참관하였고, 두 번에 걸쳐 질의하였다.

아래는 학술대회 일정이 나온 내용이다.
 
《동학농민전쟁의 민족운동사적 성격 검토》
▲ 학술대회 포스터 《동학농민전쟁의 민족운동사적 성격 검토》
ⓒ 한국역사연구회

관련사진보기

 
필자는 사전에 배포된 학술대회 자료집에 의거하여, 이날에 발표하고 토론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 회복 문제 즉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해 살펴보겠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한국근대사)는 「동학농민군의 명예회복과 예우에 대한 법률적 검토」라는 발표 논문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고 항거한 독립유공자로 보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은 이미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하여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임을 국가적으로 공인받았다. 따라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독립유공자로 간주해야 한다."(107쪽)
 
즉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명예회복 특별법(2004)에 의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에 참여한 사실이 국가적으로 공인을 받았고, 따라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약칭 독립유공자법)에 따라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바다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인정받은 동학농민군이 이후 대표적인 독립운동인 3·1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하면서, 손병희·김구 등이 3·1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한 핵심 인물이었다고 아래와 같이 논증하였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인정받은 동학농민군 3,146명 중 21명이 대표적인 독립운동인 3.1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유바다, 2019, 「동학농민혁명의 3·1운동으로의 계승」, <전북사학>56) 공식적으로 확인된 3,146명 중 1,810명은 3.1운동까지 생존하지 못했고 그 중 대다수는 1894∼1895년 활동 당시 처형당했다. 그리고 생존 가능성이 있는 1,834명도 대다수는 그 당시에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었다.(중략) 따라서 3.1운동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21명은 결코 적은 인원이 아니며, 손병희, 김구 등 3.1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한 주요 인물이 포진한 바를 볼 때 매우 유의미한 사례였음을 알 수 있다."(107쪽)
 
실제로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지도자 9명(손병희,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이종훈, 임예환, 홍기조, 홍병기)이 다시 3·1운동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옥고를 치렀다. 특히 손병희는 항일구국투쟁의 총사령관인 전봉준과 함께 2차 동학농민혁명을 진두지휘하였고, 3·1운동을 기획하고 지시한 최고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김구는 팔봉 접주로써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해주성 공격을 지휘하였다. 이 내용은 <백범일지>에 상세히 나온다. 반일 투쟁을 2차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한 김구는 이후 의병투쟁에 참여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광복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끝까지 이끌어갔다. 
계속해서 유바다 교수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역사학계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독립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아래와 같이 밝혔다.
 
"이미 1980년대부터 학계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반봉건/반외세의 근대민족운동으로서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특히 2차 봉기는 일제 침략세력에 대항한 항일독립운동의 출발과 본류로 평가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0년대부터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동학농민운동"을 일본 침략 세력에 대항하고, 후에 의병운동에 가담하여 구국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기술하고 있다."(106쪽)
 
이어서 유바다 교수는 "비슷한 시기(1895∼1896년)에 활동한 의병 참여자에게는 서훈하면서, 의병활동보다 더 먼저 일어났고 활발하게 일제에 대항하고 희생도 컸던 1894년 동학농민군을 국가에서 서훈하지 않은 것은 형평성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106쪽)라고 하면서, 1894년 갑오의병 서상철의 사례를 들어가며, 같은 시기 침략자 일본군과 싸운 동학농민군을 "독립유공자가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다"라고 아래와 같이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학계에서는 이미 1894년 갑오의병 서상철을 발굴한 바 있다.(김상기, 1989,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3.) 같은 시기 일제에 항거한 동학농민군 또한 독립유공자가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동학농민전쟁 및 의병전쟁에 대한 현 학계의 연구 수준을 반영하여 이들 모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새로운 심사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107∼108쪽) 

실제로 국가보훈처는 1894년 갑오의병을 독립유공 서훈대상에 넣었고, 갑오의병 의병장 서상철에 대해 서훈 심사를 진즉 진행한 바가 있다. 오로지 1962년부터 2020년까지 을미의병에만 참여한 공적만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사람이 120명에 달하였다. 을미의병, 을사의병(1905), 병오의병(1906), 정미의병(1907)에 참여한 의병 가운데 현재 2682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아주 잘한 조치였다.

그러나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지금까지 단 한명도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유바다 교수가 동학농민전쟁 및 의병전쟁 참여자 "모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새로운 심사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제기한 주장에 대해, 필자는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다.
 
2015년 고 양상현 교수가 전봉준 사진을 발굴 공개함
▲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2015년 고 양상현 교수가 전봉준 사진을 발굴 공개함
ⓒ 양상현

관련사진보기

 
토론자로 나선 고태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한국근대사)는 발표자 유바다 교수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동학농민전쟁 참여자들이 충분히 서훈 대상이 된다고 아래와 같이 토론문에서 밝혔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애국애족정신'이 있었다고 규정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해당 조항과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의 적용 대상자(순국선열, 애국지사) 조항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전쟁 참여자들이 충분히 서훈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슷한 시기의 을미의병 참여자가 서훈 대상이 되는 점과 비교할 때, 동학농민군이 배제되는 것은 법적 논리상으로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발표자의 기본적인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109쪽)
 
고태우 교수의 "동학농민군이 배제되는 것은 법적 논리상으로 모순된다"라는 의견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위의 두 개의 법률을 위반하고,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일을 강변하는 것은 법치주의의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 연구동향에 간략히 살펴보겠다. 심철기(근현대사기념관) 교수는 「일제의 국권침탈과 동학농민전쟁 제2차 봉기-연구동향과 쟁점 검토-」라는 발제 논문을 통해, 먼저 2010년 이후 일본군의 국권침탈에 대한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뒤에 아래와 같이 총평하였다.
 
"2010년 이후 일본군의 국권침탈에 대한 연구는 제2차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을 항일투쟁으로 규정하는데 진전된 연구성과를 보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진행한 정보활동, 조선 파병, 경복궁 점령 등이 궁극적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었고 동학농민군에 대한 진압도 항일투쟁을 막기 위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제2차 동학농민전쟁이 이전부터 전개되고 있던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것으로 항일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30쪽)
 
이어서 심철기 교수는 2010년대 이후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탄압 및 2차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에 대한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뒤에, 여기에 대한 총평을 아래와 같이 하였다.
 
"2010년대 초반 이후 본고와 관련해서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탄압, 제2차 동학농민전쟁의 성격, 동학농민전쟁과 의병과의 관계 등에서도 연구의 진척이 나타났다.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탄압에 대해서는 지역적 사례, 일본군 관련 문서, 일본군의 진압활동 등을 통해 계획적으로 진행된 것이고, 항일투쟁에 대한 탄압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동학농민전쟁이 항일투쟁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이 항일투쟁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30쪽)
 
요컨대 2차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이 항일투쟁이었고, 2차 동학농민전쟁이 항일투쟁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토론자로 나선 조재곤(서강대학교) 교수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 전개되는 조선 '보호국화' 실행에 맞선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거족적 항일 민족운동으로서의 큰 역사적 의미를 보인다."(34쪽)라고 그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였고,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을 아래와 같이 비교하였다.
 
"독립운동으로서 을미의병을 이해할 수 있는 요소는 이미 1년 전 동학농민군의 활동에서도 모두 보이고 있었다."(34쪽)
 
즉 2차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독립운동으로서 을미의병을 이해하는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의 계승 관계'에 대한 발표와 토론, '동학농민군의 일본 인식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항거'와 관련한 발표와 토론도 있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학술대회의 기조 강연에서 박맹수 교수(원광대학교 총장)는 「동학(농민혁명)으로 여는 새로운 미래-독립운동 유공자 서훈을 위하여-」라는 발제를 통해, 이번 학술대회의 성격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군 대학살, 즉 제노사이드였다는 사실도 만천하에 드러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컨대,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그 성격이 명백한 '항일구국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하는 일은 이 시대 모든 한국인에게 부여된 역사적 책무입니다."(13쪽)
 
학술대회 하루 전날 19일 여야 국회의원 37명이 '전봉준·최시형 등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 촉구 결의안'을 공동 발의했다는 소식을 필자는 들었다. '서훈 촉구 결의안'은 금세기에 들어 처음 있는 일로 안다. 독립보훈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국가보훈처(황기철 처장)가 이 서훈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다고 본다.

덧붙이는 글 | 다른 매체에 송고한 바가 없습니다.


태그:#국가보훈처, #2차 동학농민혁명,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자 서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