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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어떤 직업이 내게 맞는지를 판단할 때 대부분 얼마나 큰 돈을 벌 수 있는지, 얼마나 안정적인 고용상태를 유지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지만 한 가지 더, 그 직업을 가졌을 때 내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도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내성적인 사람이 영업직을 맡게 되면 매일 누군가를 만나 설득하고 판매해야 하는 업무 자체가 남들에게보다 훨씬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고, 외향적인 사람이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는 직업을 택하면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겠지요. 경찰이 되는 사람은 범죄자를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시민들을 보호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소방관이란 직업은 그야말로 남을 위한 희생을 자신의 보람으로 느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사람 중에 이런 면에서 진짜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는데, 캐나다 록키산맥을 따라 배낭여행을 할 때 들렀던 아타바스카 폭포(Athabasca Falls)의 유스호스텔 주인장이었습니다.아름다운 록키산맥의 한 가운데 있던 이 유스호스텔은 제 입장에선 완전 엉망이었습니다.

상수도 시설도 안 되어 있어서 어린 시절 시골 외가댁에 가서나 쓰던 펌프에서 물을 떠서 세수를 해야 하는데, 심지어 더운 물은 모두가 함께 써야 한다며 조금만 많이 쓰면 어찌나 눈치를 주던지 말이죠. 게다가 비누 하나 비치돼있지 않아서 가이드의 조언에 따라 미리 다른 호텔에서 비누를 얻어가지고 가야 했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비누 하나쯤 사가지고 갈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도 주인장은 하나도 미안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유스 호스텔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았습니다. 마당엔 언제든지 빙하가 녹은 물을 퍼올릴 수 있는 펌프가 있고, 거실엔 TV가 없어 하루 종일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베토벤의 음악을 틀어 놓을 테니 공짜로 즐기라고 대단한 혜택처럼 말을 하더군요. 밤이 되면 여러분들이 사온 맥주를 들고 조금만 걸어가면 어마어마한 별빛 아래에서 낭만적인 파티를 할 수 있는 이 곳을 모두 사랑하게 될 거라고도 하더군요.  
 
아타바스카 폭포 호스텔의 전경.
 아타바스카 폭포 호스텔의 전경.
ⓒ 한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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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여행객들은 모두 이미 감동을 한 것 같았습니다. 다들 괜히 한번씩 펌프질을 해보며 '영광스러워' 했고, 중국인 커플에게는 이 집에서 가장 큰 침대를 사용할 수 있는 행운을 주겠다고 하더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유일한 킹사이즈 베드를 사용하게 되었는데도 전혀 불만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그 주인장이 참 부럽단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껏 즐거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캐나다의 록키 산맥에 배낭을 메고 찾아온 여행객들은 모두 이 집의 어처구니없는 단점들을 낭만적이고 특색 있는 장점으로 인식하고 행복한 여행을 이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숲속 나라의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해주듯이 펌프 옆에 있는 바가지 속의 마중물을 절대, 절대! 먹어버려선 안 된다고 강조하던 주인장의 그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제가 한의사란 직업을 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와 싸우거나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의료인은 본래 사람을 주적으로 삼지 않고 질병이나 장애를 상대로 환자와 힘을 합쳐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좀 적을 거라고 믿었고, 실제로 한의사가 되어 살아보니 틀린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치료와 호전이라는 공통 목적을 가지고 있고, 내가 그들을 전심으로 도와주는 것이 결국 나를 돕는 일이 되는 가장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난히 하루 일과가 힘들게 느껴지는 날이면, 내가 얼마나 복받은 사람인지 생각합니다. 누군가와 싸우지 않고 남을 극진히 위하고 도와주는 일이 직업이라는 건 꽤나 행복한 일입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을 돕는 일이 내 밥벌이가 되는 직업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오늘도 수많은 환자분들이 저에게 돈을 내고 치료를 받으시면서도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 가셨습니다. 분명 여기저기 아프시면서도 제가 당신들 편이라는 걸 믿기에 저를 보면 활짝 웃으며 인사하시는 우리 환자분들. 때론 여기 저기 아픈 데가 너무 많아서 미안하다고 겸연쩍어 하시는 분들에게, 여기는 아픈 게 자랑인 곳이니까 마음 놓고 어디가 아픈지 다 말씀하시라고, 환자 치료하기 싫으면 애초에 한의사가 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같이 너스레를 떨어 드리기도 합니다.

치료받고 좋아졌다고 가족들이 한 명 두 명씩 줄줄이 오는 분들, 학생 때부터 봤는데 어느새 대학 졸업하고 취직했다고 부모님을 모시고 와 보약을 지어드리는 젊은 환자들을 보면 뭉클하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한의사의 삶이 늘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하지만은 않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저런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의료인이 겪어야 할 가장 힘든 숙명 중의 하나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아픈 소식을 가장 먼저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들이 아프면 어쩔 수 없이 상담 의뢰를 받게 되지만, 마음이 아프기만 한 채 그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더구나 가족이나 친지, 혹은 오랫동안 한의원에 내원하시던 환자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전히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더라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안함과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 것은 피할 수 없지요.

여러분은 오늘, 누구를 만나 행복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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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 : 판교 한성주한의원 원장. 첨단의 전통의학을 꿈꾸는 판교의 한의사.
 
 

태그:#한의사, #한성주,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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