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난리를 만난 뒤로 먹고 자는 것도 잊었다. 한밤에 잠 못 드는데 밝은 달이 창을 비추었다. 뜰에 서서 의관을 벗고 바라보건대 '노모를 다시 뵐 수 있다면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천지신명께서 굽어살피시어 반드시 저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다." - <쇄미록> 1592년 5월

"길에서 거적에 덮인, 굶어 죽은 시체를 보았다. 그 곁에 두 아이가 앉아서 울고 있어 물었더니 제 어미라고 한다. 병들고 굶주리다 어제 죽었는데 그 시신을 묻으려고 해도 제힘으로 옮길 수 없을뿐더러 땅을 팔 연장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잠시 후 나물 캐는 여인이 광주리에 호미를 가지고 지나갔는데 두 아이가 하는 말이 저 호미를 빌린다면 땅을 파서 묻을 수 있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 <쇄미록> 1594년 2월 14일
 
오희문이 목격한 임진왜란 당시 거리의 참상.1594년 2월 14일 일기 중에서, 그림은 수묵인물화가 신영훈 그림
▲ 임진왜란 당시 거리의 참상 오희문이 목격한 임진왜란 당시 거리의 참상.1594년 2월 14일 일기 중에서, 그림은 수묵인물화가 신영훈 그림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쇄미록을 지은 오희문 초상화와 오희문이 임진왜란때 유랑한 지도
▲ 오희문과 유랑지도 쇄미록을 지은 오희문 초상화와 오희문이 임진왜란때 유랑한 지도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이는 임진왜란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은 오희문이 9년 3개월 동안 쓴 일기 <쇄미록(瑣尾錄)>(보물 제1096호)의 일부다. 쇄미록이란 '보잘것 없는 사람이 떠돌아 다니며 쓴 기록'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유래한다.

일기 제목은 '보잘 것 없는 기록'이라지만 사실 오희문의 <쇄미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생생한 백성의 기록이라는 면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자료다. 그러나 <쇄미록>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만큼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져있지 않은 자료이기도 하다.
 
오희문의 《쇄미록》 원본 표지, 표지에 원본을 베낄 때 종이를 훼손하지 말라는 당부가 기록되어 있다.
 오희문의 《쇄미록》 원본 표지, 표지에 원본을 베낄 때 종이를 훼손하지 말라는 당부가 기록되어 있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이 <쇄미록>에 관련된 흥미로운 전시가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어 어제(1일) 다녀왔다. 진주 남강변에 자리 잡은 국립진주박물관을 찾은 시각은 평일(화요일)인데다가 코로나19 거리두기 방역 지침 탓인지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이 거의 없어 한산한 분위기였다.

<쇄미록>을 쓴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해주 오씨 추탄공파로 오희문 당대에는 이렇다할 관직이 없었지만 아들 윤겸이 인조 때 영의정에 올랐고, 손자 오달제는 병자호란때 삼학사(三學士)에 오르는 등 정치와 문장에서 이름을 날렸다.

오희문은 1591년 11월 27일, 한양의 집을 떠난 이후 전라북도 장수에서 생각지도 못한 임진왜란 소식을 접한다. 이후 1년 뒤에 헤어졌던 어머니와 처자식을 한양에서 만난 뒤 다시 집을 떠나 충청도, 강원도 등을 떠돌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일기로 적었고 이 일기는 1601년 2월 27일까지 꼬박 9년 3개월간 이어진다.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제수를 마련할 길이 없어 밥과 국만 올렸다. 종가의 맏며느리는 죽었고 종손 정일이 제사를 받들어 술잔을 올려야하는데 정처 없이 떠돌고 빈곤하니 분명 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비록 지파의 자손이지만 이날을 차마 그냥 지날 수 없어서 잠깐 제수를 진설하여 잔을 올리니 추모하는 감회가 지극히 일어 견디지 못하겠다." - <쇄미록> 1594년 7월 3일

"단아는 지난밤 초경 뒤로 다시 두통이 생겨 아침까지 아프다고 난리다.(중략) 새벽 이후로 병세가 너무 심해졌다.(중략) 결국 말 한마디 못하고 사시(9-11시)에 훌쩍 떠나버렸다. 붙들고 통곡해 보지만 한없는 슬픔을 어찌하겠는가?" - <쇄미록> 1597년 2월 1일
 
단아는 오희문의 4남 3녀 가운데 막내딸이다. 아끼고 사랑하던 막내딸을 먼저 보낸 오희문 부부의 애통함이 영상 속에 잔잔하게 흐른다. 이번 <쇄미록> 전시는 수묵인물화가인 신영훈 선생이 그린 '여정의 시작', '일본군이 쳐들어오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나날들', '한양 잿더미의 참혹함', '불에 타버린 집에 작약꽃만', '호미를 빌려 어미를 묻고' 등 모두 21장의 그림으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희로애락을 엿볼 수 있는 다채로운 전시물들 
 
고난의 기록, 인간의 고통을 상징하는 가시나무 오브제를 배경으로 오희문이 겪은 임진왜란을 표현
▲ 오희문이 겪은 임진왜란 고난의 기록, 인간의 고통을 상징하는 가시나무 오브제를 배경으로 오희문이 겪은 임진왜란을 표현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또한 인터랙티브 가상현실 VR 영상, 장녀의 결혼식, 장남의 과거급제, 사위와 뱃놀이, 막내딸의 죽음 등 모두 10분짜리의 영상이 대형 화면을 통해 연속 방영되고 있어 임진왜란 난리 속에서도 이어지는 희로애락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집안에 역병이 들었지만 4명의 남녀가 모두 잘 견뎌냈고 또 윤함(아들)의 처(며느리)가 14일 사시(9-11시)에 아기를 낳았단다. 게다가 사내아이로 7일 안에 큰 역병까지 잘 치렀다고 한다. 몹시 기쁘다. 이후로는 종이도 다 되어 그만 쓰기로 했다. 또 한양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오희문의 <쇄미록> 마지막 대목으로 1601년 2월 27일로 끝을 맺고 있다. 9년 3개월간 이어진 일기의 끝부분인 것이다.
 
대형화면에 가상현실로 제작한 오희문의 희노애락 일상을 소개한 영상을 관람하는 관객
 대형화면에 가상현실로 제작한 오희문의 희노애락 일상을 소개한 영상을 관람하는 관객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국립진주박물관의 전시품으로는 오희문의 초상, 그의 셋째아들 오윤함의 초상, 오희문과 해주오씨 묘지명 등이 특히 눈여겨 볼만하다. 한편 <쇄미록> (1~7)의 원본도 전시되어 있으며 더불어 임진왜란 시기 중요한 개인 일기로 남아 있는 <김용 호종일기>(보물 제484호), <조정 임진란 기록 일괄>(보물 제1003호), <노인 금계일기>(보물 제311호) 등도 함께 전시되어 당 시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오희문의 9년 3개월 일기인 쇄미록을 21장의 수묵화로 그린 신영훈 화가의 작품들
▲ 신영훈 화가의 작품들 오희문의 9년 3개월 일기인 쇄미록을 21장의 수묵화로 그린 신영훈 화가의 작품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오희문의 쇄미록을 요약한 신영훈 화가의 그림을 책으로 엮어 갈 수 있게 한 코너에서 책으로 묶고 있는 모습
▲ 책 만들기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오희문의 쇄미록을 요약한 신영훈 화가의 그림을 책으로 엮어 갈 수 있게 한 코너에서 책으로 묶고 있는 모습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오희문의 난중일기 《쇄미록》 전시
 오희문의 난중일기 《쇄미록》 전시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역사의 고장 진주, 논개의 충절을 간직한 채 도도히 흐르는 남강변의 촉석루와 나란히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기획전시물 <쇄미록> 전은 신록의 초여름, 추천하고 싶은 전시회다.

* 때 : 2020.10.13 ~ 2021.8.15
* 곳 : 국립진주박물관 기획전시실, 무료 관람
*대상 : <쇄미록>(보물 제1096호) 등 52점(보물 4건 18점 포함)
*내용 : <쇄미록>의 역사 및 내용
- 16세기 임진왜란을 겪은 한양 양반 오희문의 기록과 일상

덧붙이는 글 | 우리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태그:#쇄미록, #오희문, #임진왜란, #국립진주박물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