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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이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대표적인 행궁으로 수원 화성 안의 행궁이 규모가 가장 크기도 하고, 유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수많은 행궁 중에 전란이나 유사시에 그 기능을 실제로 행했던 곳은 남한산성의 행궁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 행궁으로 피난 와서 47일 동안 머물렀다. 인조가 돌아간 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여주로 능행길을 갈 때, 수시로 남한산성의 행궁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로터리에서 서문 또는 수어장대 방향을 바라보면 산성으로 올라가는 탐방로 입구부터 격조 높은 행궁의 처마가 어른거린다. 터는 비록 좁지만 기단을 쌓고 높은 단위에 건물을 올려놓아서 최소한이나마 궁궐의 위엄을 느끼게 해 준다. 

남한산성은 한때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산성과 행궁 등을 점령하고 저항을 펼쳤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는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행궁 등 남한산성 내의 수많은 시설물을 불태웠다가 2011년이 되어서야 복원을 통해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한남루는 상, 하궐을 포괄하는 행궁 외곽 담장의 정문에 해당하는 행궁 외삼문의 누각이다.
▲ 남한산성의 정문인 한남루 한남루는 상, 하궐을 포괄하는 행궁 외곽 담장의 정문에 해당하는 행궁 외삼문의 누각이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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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이라 볼 수 있는 한남루로 간다. 당당한 2층 누각 형태의 문으로서 행궁이 처음에 지어질 당시에는 없던 건물이었으나 삼문 삼조, 즉 세 개의 문을 거쳐 정전으로 들어가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기 위해 1798년 광주유수 흥억이 건립했다고 한다. 

한남루를 지나자마자 으레 일직선으로 뻗어야 할 건물들이 오른쪽으로 각을 꺾어버린다. 게다가 급격한 경사의 높은 계단이 나의 눈앞을 막고 있었다. 지형적인 한계로 인한 타협일 수도 있고, 왕의 안전을 위한 보호를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급격한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며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채 외삼문과 외행문을 지나간다.
 
행궁의 정문 한남루를 지나면 외삼문이 나오고 문을 하나 더 통과하여 외행전으로 이어진다. 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꺾여 있는 구조가 이색적이다.
▲ 외삼문의 전경 행궁의 정문 한남루를 지나면 외삼문이 나오고 문을 하나 더 통과하여 외행전으로 이어진다. 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꺾여 있는 구조가 이색적이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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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행문을 지나면 궁궐의 정전이라 할 수 있는 외행전이 나타난다. 가운데 전돌을 깔아놓아 건물의 권위를 높이고 엄숙함이 지금도 감돌고 있었다. 행궁은 산자락 계곡을 따라 건설되었기에 안으로 들어갈수록 기단이 점점 높아진다. 그래서 행궁 뒤의 건물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화성 행궁과 또 다른 개성이 느껴지는 것이다.

외행전은 병자호란 당시 임금이 정사를 논하고,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행하기도 했던 곳이라 전해진다. 인조는 외행전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증이 일어났다. 이미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 부침을 많이 겪기도 했지만 당대 최강의 청군을 맞아 최소한의 돌파구라도 마련되어 있었을지,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뉜 신료들에게서 어떤 명분을 잡아야 왕권을 계속 부지할 수 있을지 여러 생각에 잠겼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행궁의 중심전각인 외행전은 궁궐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외행전 앞에서 인조가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 남한산성 행궁의 중심전각인 외행전 남한산성 행궁의 중심전각인 외행전은 궁궐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외행전 앞에서 인조가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 이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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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청나라도 입장이 급하긴 매한가지였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한양을 함락했지만 후방에 명나라가 아직 득세하던 시절이고, 후방의 보급이 생각보다 원활하지 않았기에 조선의 문제를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삼전도의 굴욕이란 사건이 있었지만 조선왕조는 명줄을 이어나갔고, 청나라의 큰 간섭을 받지 않았다. 각설하고 외행전의 우측 편으로 가면 가건물 같은 발굴지가 나오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라고 한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역사적으로 요충지로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그 당시 최대 격전지인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일종의 감제고지의 위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은 본래 신라 문무왕때의 성터를 기반으로 축성된 것으로서 많은 세월의 흐름이 켜켜이 쌓여있다.
▲ 남한산성 행궁의 외행각에 있는 통일신라 건물지  남한산성은 본래 신라 문무왕때의 성터를 기반으로 축성된 것으로서 많은 세월의 흐름이 켜켜이 쌓여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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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컨대 삼국사기에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쌓았던 성인 주장성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남한산성에서 왕은 잠깐만 있다가 가는 존재지만 평시에는 광주 유수부의 관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외행전의 바로 왼편에는 광주유수가 집무를 봤던 건물인 일장각이 있다. 

또다시 계단을 올라 내행전 권역으로 넘어간다. 비록 행궁의 건물들이 새로 복원된 건물이지만 주위의 고목들이 운치를 더해주면서 건물의 품격을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이런 요인들로 있기에 문화재는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그 가치를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한산성 행궁의 내전이라 할 수 있는 내행전의 권역에 도달했다. 임금의 안위를 위해 사방이 벽으로 둘러쳐 있으며 임금과 세자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내부를 둘러볼 수 있게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가구와 침구류까지 배치되어 있어서 역사적 상상력을 더욱 펼칠 수가 있었다.

임금과 세자는 불과 한 칸의 공간만 남겨두고 서로 불편한 동거를 했을 터이다. 그 주인공이 인조와 소현세자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소현세자가 인조의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조선이 근대화에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조선의 기득권층이 주름잡고 있기에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남한산성 행궁의 가장 깊숙한 부분에 자리한 내행전은 왕과 세자의 거주공간 으로 그들이 생활했던 가구와 침구류가 재현되어 있었다.
▲ 내행전에 재현되어 있는 왕의 침실 남한산성 행궁의 가장 깊숙한 부분에 자리한 내행전은 왕과 세자의 거주공간 으로 그들이 생활했던 가구와 침구류가 재현되어 있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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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이 전란기에 주로 쓰였다곤 하지만 그래도 왕궁의 위엄을 최소한으로 갖추어 놓고 있기에 후원과 같은 공간이 남아있다. 좌승당 뒤편 아름드리 소나무가 인상적인 이위정이라는 정자가 바로 그곳이다. 

조선말 순조 시절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아마 정자가 있던 터가 행궁 전체와 로터리까지 훤히 보이기에 예전 호란 시절에도 왕이 답답한 심사를 풀기 위해 종종 바람 쐬러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겉보기와 달리 궁궐의 격식을 갖추고 있고, 볼거리가 상당히 풍부했던 남한산성 행궁이다.

그 행궁의 담장 너머에 흡사 종묘와 비슷한 두 채의 건물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 전국에 있는 행궁 중에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모신 전각이다. 좌전이라 불리는 건물은 유교 풍습에 나오는 '좌묘우사'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이 건물을 보기 위해선 다시 한남루까지 내려가서 담장을 끼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행정의 편의를 위해서 관람의 편의성을 떨어뜨리는 전형적인 행태인데 이런 아쉬운 순간이 더러 있다. 강화도에서 고려왕릉을 보러 갈 때도 이정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군부대 사격장까지 가는 불상사가 있었고, 홈페이지나 기타 정보의 미흡으로 인해 문을 열어 두지 않은 유적이나 박물관도 상당히 많다. 이제는 관람객들도 적극적으로 개선을 위해 어필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올라가기도 전에 한나절 이상이 소모된 것 같다. 경기도의 웬만한 도시 못지않게 역사와 이야깃거리가 무척 풍부함을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경기도는 남한산성을 체류형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남한산성의 마지막 이야기인 성곽 이야기로 들어가도록 하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일주일 후 작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ugzm87와 블로그 https://wonmin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연, 취재, 출판 등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ugzm@naver.com으로 부탁드립니다. 글을 쓴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면 탁피디의 여행수다 또는 캡틴플레닛과 세계여행 팟캐스트에서도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별곡 시리즈는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general_list.aspx?SRS_CD=0000013244에서 연재됩니다.


태그:#경기도, #경기도 여행, #광주, #광주여행,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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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 경기별곡2편>, 경기별곡 3편 저자. kbs, mbc, ebs 등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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