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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노동자회 회원소모임 '페미워커클럽'은 2021년을 맞아 힘들었던 한해를 거치고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준 책 6권을 선정했습니다. 책을 함께 읽고, 코로나19 이후 단절이 부각된 세상에 '우리'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페미워커의 시선으로 담아냅니다.[편집자말]
"나도 간절히 쓰고 싶다. 다이어트 성공 후기와 함께 내 안의 악마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물리쳤는지 마음껏 자랑하는 책을. 아니면 내 몸의 크기가 어떠하건 간에 내 몸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담담히 고백하는 책을. 하지만 나는 그런 책을 쓰지 못하고 대신 이런 책을 쓰게 되었다." <헝거> 45쪽

1. 나는 감옥에 갇혀 있다
-120kg의 비만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사이즈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
 사이즈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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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비만, 건강검진에서 단 한 차례도 이 단어와 떨어져 살아본 적 없다. 체중감량은 해봤어도 비만인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120kg의 몸과 살아간다. 이 사이즈로 살아온 삶에는 많은 사회적 요령과 체념의 순간, 상처의 흔적이 있다. 

사람들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답답함과 아둔함, 더러움의 상징을 몸에 새기고 살아간다. 이것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실제로 이 거대한 몸 곳곳에는 튼 살 자국이 있다. 두꺼운 허벅지살 마찰로 인해 사타구니에는 수시로 피부염이 생겼다. 딱지를 뜯고 상처가 낫기를 반복하는 동안 사타구니에는 검게 색소침착이 생겼다. 

"Love yourself" 따위의 생각은 내가 내 몸을 보면서도 들지 않는다. 아니, 사랑하는 건 둘째치고 끔찍해서 도저히 보지 못한다. 그래서 6년째 정면 나체를 외면하려 몸을 옆으로 돌리고 거울 프레임 밖에서 샤워하고 있다.

거대한 몸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체념도 만들었다. 이런 몸으로는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안다. 몸 하나로 관계까지 따지냐고 하겠지만 비만인의 몸은 그렇다. 비만인은 약간의 빈틈만 생겨도 비난받기 딱 좋다. 

길에서 음식을 먹는 상황, 버스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 달릴 때 숨이 차는 상황, 엘리베이터에 애매하게 자리가 남아있는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어쩌다 단체복을 맞추거나 옷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때부터 손에 땀이 찬다. 

사소한 상황에도 비난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관계에도 머뭇거렸다. '나 같은 몸이 호감을 표해도 되는 걸까', '이런 몸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수치스러운 고민도 했다. 부끄럽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 같은 '비만인'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몸이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온갖 담론을 주워 담은 논문은 밑줄 치며 읽지만, 정작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려 애쓴다. 록산 게이가 그러했듯 그런 주제로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곧잘 재담꾼이 되곤 했다. 

얼른 분위기를 환기하고 다른 주제로 웃게 해서 사이즈라는 주제가 잊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레 내 몸으로 시선이 집중될 테니 말이다. 비만인을 둘러싼 주제를 회피하는 효과적인 전략을 쌓으며 살아간다.

2. 모순된 욕망 : 페미니스트, 사회에 부합하고 싶은 욕망
-그러나, 나는 페미니스트다

 
모순되는 욕망의 공존
 모순되는 욕망의 공존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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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인으로서 나는 사회적 시선으로 인한 두려움, 타인의 욕망 대상이 되고 싶은 욕망, 수치스러운 좌절감을 느끼고 산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다양한 몸을 삭제하고 배제하는 가부장제의 억압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내 몸을 미워하고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모순적인 인간이라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나는 사회적 억압에 대항한다고 하면서 내 몸에 가장 생생하고 잔인한 가치평가를 내리고 있는 사람이다. <헝거>의 서술처럼, 내 몸을 내 사이즈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해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있다는 이상한 죄책감도 가졌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앞에 두고 서 있지만, 몸의 정상성에 어떻게든 가닿고 싶어 발버둥 쳤다. 그 와중에 '다이어트'란 단어는 괜히 쓰기 불편하다며 숨겨두었다.

획일적 미의 기준, 몸에 대한 억압, 정상적 여성성을 규정하고 강요하는 이 사회에 분노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만인이기에 여성으로조차 보이지 않는 내 현실에 슬퍼했다. 소위 '여성스럽다'고 통칭되는 옷은 비만인 여성의 영역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어느 누구도 권하지 않았다. 비슷하게 입어봤지만 '그 몸으로 그걸 입어?'라는 잔혹한 시선만 있었다.

에스테틱 병원 문 앞도 서성거렸다. 사이즈가 어떻게 안 된다면 이 몸에 남은 색소침착이라도 지우고 싶어서 레이저 시술을 고민했다. 성형산업과 외모지상주의, 인간에 대한 모든 가치평가가 폭력적인 사회적 기준, 정상성, 자본만으로 결정되는 그곳에서 방황했다. 

애써 다독이며 병원에 갔지만,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누군가가 알아볼까 무서워 이 큰 몸은 계속해서 작아져야 했다. 페미니스트이지만 정상적 몸을 갖고 싶다. 하지만 정작 그 욕망에도 떳떳하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하는 것만 같았다.

3. 낙관하지 않기, 그러나 너무 많이 힘들지 않기를
- 이 모순이 내 몸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서로의 용기가 되다
 서로의 용기가 되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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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성이 외모와 몸을 변형하고 싶은 욕구, 다이어트라는 말조차 방어막 없이 말하기 두려운 마음, 때로는 자기 몸을 사랑하기보다는 푸념하고 미워하고 싶었던 많은 순간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대개 이 감정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꺼낼 수 없었을 고통스러운 화제였을 것이다. <헝거>가 강력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헝거는 몸에 대한 고백이 "내 몸을 긍정하자!"는 슬로건으로 일축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나 역시 "Love yourself",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욕망을 극복해보자'는 식으로 낙관을 말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그 욕망은 극복의 대상도 아니다. 앞선 이야기처럼 이중의 삶, 몸의 변형을 통해 성취하려는 욕망, 그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적 감정은 복잡하기에, 그 경험을 기계적으로 환원하고 싶지 않다. 여성현실을 억압하는 구조의 가담자라는 식으로 독해해서도 안 된다. 여성이 어떤 형태로 있고, 있고 싶던 말이다.

그렇다고 '알아서 잘해보라'는 식으로 무관심하고 싶지도 않다. 부족한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욕망 앞에 떳떳할 수 없고 자기검열을 했다며, 모순적인 인간이라며,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그 순간들과 괴리에서 너무 많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대신에 당신과 같이 그 모순적 감정과 경계들을 말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괴리에서 오는 고통을 나눌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 발화가 몸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내밀한 욕망에 떳떳할 수 있는 용기, 당신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기를 원해도 괜찮을 수 있다는 용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전 기사] '시급 만원'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진짜 이유 http://omn.kr/1t87m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여성노동자회 페미워커클럽 현입니다.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사이행성(2018)


태그:#한국여성노동자회, #페미워커클럽, #페미워커의 마주보기, #헝거, #록산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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