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10 13:42최종 업데이트 21.06.10 13:45
  • 본문듣기

"내 친구 중에도 저런 애 있어, 남자 데리고 소박하게 잘 살더라고, 둘 다 성격이 참 좋아." 게이를 호모라고 부르지만, 혐오주의자는 아닌 이 퀴어(Queer)한 사람의 탄생. ⓒ 픽사베이

 
언젠가 한 친구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이그룹 멤버들이 매우 '성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으로 등장해 당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영상의 내용까지 정말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예능에는 동성 출연진 간의 맥락 없는 '커플링'이 자주 등장하곤 하니까.)

할아버지는 '왜 쟤네는 남자끼리 저러고 있느냐, 쟤네 호모들이냐'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는 자신의 할아버지도 훨씬 보수적인 시대를 살아왔으니 이 정도의 혐오는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할아버지의 그다음 말이었다.


"아, 내 친구 중에도 저런 애 있어. 남자 데리고 소박하게 잘 살더라고. 둘 다 성격이 참 좋아."

이 미스터리한 대화의 흐름을 곰곰이 생각한 후 친구와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아마 할아버지는 남성 동성애자를 '호모'라고 지칭하는 게 무례한 일인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어쩌다 할아버지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호모'라고 지칭됨을 알았을 수는 있다(혹은 상대적으로 젊은 내 친구가 영어식 표현을 써야 알아들으리라 지레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에게 '호모'로 사는 건 딱히 이상한 게 아니고, 심지어 그렇게 사는 사람이 주변에 있기까지 했다. 즉 게이를 호모라고 부르지만, 혐오주의자는 아닌 이 퀴어(Queer)한 사람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혐오는 지성의 문제?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

한때 웃으며 넘겼던 이 에피소드가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 전이다. 나는 페미니스트 책방 '달리, 봄'이 주관한 <퀴어한 서재>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당시 '인생은 우리가 완벽히 알 수 없기에 황홀하며,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니 차별과 혐오를 내려놓고 낯선 존재들에게 겸손해지자'는 요지의 글을 썼다. 쓸 때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보니 언젠가 내가 했던 이야기와 모순이 되는 내용이었다.

한때 나는 혐오란 '무지의 소산'이며, 이는 소수자를 제대로 알기를 거부하는 게으름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혐오는 지성의 문제'라는 말에도 별로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낯선 존재'는 사실 '미지의 존재'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글에 '내가 모르는 대상'이라도 차별하고 혐오하지 말라는 주장을 한 셈이다.

'혐오는 지능순', '혐오는 지성의 문제'와 같은 표현을 SNS에서 찾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식의 이야기에 '좋아요'를 누르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사회가 정상성을 부여하는 '지적 능력'이라는 것은 사실 보편이 아니다. 그리고 능력의 다름은 차이로 여겨야지, 이걸 '격차'라고 해석하는 건 매우 무례한 일이다. '지능순'이라는 말이 문제인 이유다.

또한 사람은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취득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도 무척 상이하다. 지역·계급·교육 환경 등에 따라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알기 어렵고 모를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차별주의자나 혐오자가 되는 것인가. 지식이 없는 사람은 곧바로 혐오를 가지게 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혐오를 행한다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의 프로그램인 '아찔한 무지개'에 출연한 은하선이 대중매체에서 트랜스젠더와 어린 아이가 함께 등장하는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 큐플래닛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등장할 때, 그 캐릭터들은 높은 확률로 어린아이와 함께하곤 한다. 이에 대해 칼럼니스트 은하선은 '편견이라는 것도 우리가 사회를 살면서 때 묻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 트랜스젠더와 어린아이를 함께 등장시키는 게 아닌가'라는 분석을 한 바 있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가 소수자인 상대방을 편견 없이 볼 수 있다는 설정은 사실 '몰라서 더욱 가능하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덜 알면 알수록 편견으로부터 멀어지고 더 쉽게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안다는 것'과 혐오의 관계는 곱씹을수록 이상하기 짝이 없다. 알면 혐오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성소수자가 무엇인지 알고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만'으로 시작되는 차별 발언의 사례는 노트에 빽빽이 써 내려 갈 수 있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왜 비거니즘(다양한 이유로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철학, 식생활에서는 식물성 음식만을 섭취)을 실천하는지 이해하는 사람들도 막상 비건인 이들을 만나면 그들의 주장을 도덕적 젠체하기나 혹은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반응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사람은 대중교통이 지나치게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장애인들이 제대로 이용조차 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에 탑승하는 '투쟁'을 벌일 때마다 대다수 사람의 반응 앞에는 '그럼에도'가 꼭 붙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심하지만 수용적인 태도

앎이 차별과 혐오에 그리 영향이 있지도 않고, 이를 척도로 삼는 게 문제조차 있다면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많은 경우 이는 낯선 존재를 대하는 태도와 더 관련이 있다. 잘 모르고 생소하지만 그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무심하면서도 수용적 태도가, 오히려 차별과 혐오를 막는 데 더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런 태도의 반대쪽에는 아마 근거 없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배제적 반응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소수자를 자신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차별하고 혐오하는 유형이다. 성소수자 혐오 선동을 통해 교인들을 결집시키며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려는 보수 개신교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나는 이 목록에 소위 '트랜스젠더 배제적인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그룹을 넣을까 생각하다 빼버렸다. 그들이 혐오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혐오가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다.)
 

"뭘 빼 드리면 되나요?" 나는 이것이야말로 채식주의자를 대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가장 최소한의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김혜리

 
마지막으로 사족처럼 남기는 에피소드. 비건인 내 동료가 하루는 중식당을 찾았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식당을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을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는 채식을 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간섭을 하고 트집을 잡아 왔던가. 이야기를 듣던 나는 비슷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내 동료가 자신이 메뉴를 주문하며 자신이 채식주의자임을 알리려 하자, 식당의 사장은 딱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뭘 빼 드리면 되나요?"

나는 이것이야말로 소수자를 대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가장 최소한의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