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03 11:24최종 업데이트 21.07.0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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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산속에 있는 최영 장군 묘. ⓒ 김종성

 
최영 장군은 '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했다. 이 말을 최영은 아버지한테 들으면서 성장했다. 이 말의 원조는 아버지 최원직이었다. <고려사> 최영 열전은 "예전에 영(瑩)이 나이 16세였을 때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훈계를 하면서 '너는 금 보기를 돌 같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최영은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집과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동산 투기 전수조사'를 한다 해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삶을 살았다. 이 점은 그의 명성이 후세에도 대대로 이어지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에게 져서 역사의 패자가 된 그가 죽어서도 명성을 유지하는 데는 이 점 역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적인 명성

최영은 강직함과 청렴성으로도 유명했지만, 용맹함으로도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입술에 화살을 맞고도 계속 싸워 전세를 뒤바꾼 장군이었다. 최영 열전은 숲속에 숨은 왜구가 쏜 화살이 입술에 꽂혀 유혈이 낭자했는데도 그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숲속의 적군을 찾아내 쓰러트린 뒤 입술에서 화살을 뽑아내고 더욱 용감히 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전한다.


몽골족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때인 1316년에 출생한 최영은 사대부 가문인 집안 분위기와 관계없이 직업 군인의 길을 택했다. 훗날 조정에서 기반을 잡은 뒤에도 그는 선비들과 거리를 뒀다. 떠오르는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들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철저히 무인의 길을 걸은 그는 지금의 충청과 강원·경기 일부인 양광도에서  근무하다가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주상 경호원인 우달치가 되고 각종 전쟁에서 무패의 전적을 기록해 공민왕 시대에 절정기를 구가했다.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졌다. 주원장·장사성·진우량 같은 군웅들이 활약하던 몽골 말기에 원나라의 요청으로 장사성 반란군 토벌에 참가해 수십 차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반란군을 거의 토벌했다.

쇠락하는 중이기는 했어도 몽골은 아직은 세계 최강이었다. 그런 몽골을 무대로 일대 활약상을 펼쳤으니, 국제적인 장군이 아니라 세계적인 장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역사의 패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세계적 활약상이 좀 더 적극적으로 조명됐을 것이다.

최강의 동맹

최영은 공민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 아들 우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왕은 최영보다 49세 어렸다. 최영은 그런 우왕을, 마치 공민왕을 대하듯 또 자기 아버지를 대하듯 충성을 다해 보좌했다. 우왕이 유흥이나 사냥에 빠지면 꾸짖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우왕 정권을 수호했다.

최영은 '손자 같은 임금'의 앞길에 장애가 되는 것을 치워버리고자 했다. 2014년에 드라마 <정도전>에서 배우 박영규가 연기한 이인임이 바로 그런 장애물이었다. 보수 기득권세력을 대표하는 이인임의 권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우왕의 미래를 보장하자면 이인임에게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영의 강직함과 용맹함만으로는 힘들었다. 그것만으로는 이인임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영은 동맹을 선택했다. 그가 택한 동맹자 역시 선비가 아닌 무인이었다. 그 무인 역시 그때까지 무패의 전적을 자랑했다. 지금의 함경도인 동북면 출신의 이성계 장군과 제휴하게 됐던 것이다.

최영과 이성계는 최고의 장군들이었지만, 이들 중 어느 쪽도 군부 전체를 확실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이성계 군단은 동북면 여진족 병사들을 주축으로 했고, 최영 군단은 주상 친위부대를 주축으로 했다. 그래서 이인임을 상대하자면 두 진영을 결합시켜야 했다.

무패의 최영과 무패의 이성계로 이뤄진 조합을 이인임은 당해내지 못했다. 이 조합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로 이인임 정권은 조선 건국 4년 전인 1388년에 붕괴됐다.

동맹의 균열

그런데 이성계와 합세해 우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정권을 창출한 최영은 그 직후에 동맹자의 의심을 살 만한 조치를 취했다. 명나라의 위협을 명분으로 요동 정벌을 단행하는 기회에 이성계를 출정시키기로 한 것이다.

최영은 이제 막 공동정권을 수립한 이성계더러 고려 땅을 떠나 원정을 다녀오라고 요구했다. 최영의 요구는 명나라의 야심에 맞서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고 고토를 수복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쉽사리 거부할 수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이성계 입장에서는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신정권의 주도권을 쥔 최영이 자신을 고려 땅 밖으로 내모는 동기를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최영은 이성계의 배신 가능성을 막고자 조민수 장군을 함께 파견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조민수를 설득해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고 개경의 최영을 향해 군대를 진격시켰다. 최근까지 동지였던 최영과 이성계가 한판 승부를 겨뤄야 할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 대결에서 이성계는 무패 전적을 계속 이어갔고, 최영은 생애 최초의 1패를 기록하면서 역사무대를 떠나게 됐다.

이성계가 요동으로 진격했다면

만약 1388년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그대로 진격해 명나라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면, 역사는 당연히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영토가 크게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고, 최영의 운명이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가능성도 있다.

민족의 영토가 바뀌었을 가능성은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고 최영과 이성계의 운명에만 논의를 국한하면, 그로 인한 경우의 수는 당연히 두 가지가 된다. 이성계가 실패했을 경우, 성공했을 경우의 두 가지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요동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인 팔도도통사는 전장에 직접 출전하지 않는 최영이었다. 그다음인 좌군도통사는 최영이 믿는 조민수였다. 조민수 다음인 우군도통사는 최영이 손은 잡았지만 완전히 믿지 않는 이성계였다.

현장의 최고 지휘관은 좌군도통사 조민수였지만, 그는 이성계의 기운을 당해내지 못했다. 원정군의 실질적 지휘권은 이성계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성계가 날씨나 외교관계 등을 명분으로 최영의 진군 명령을 거부하면서 갈등을 일으킨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원정군은 최영의 의도와 달리 이성계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실질적인 좌군도통사가 이성계였으므로, 이 부대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최영의 명령대로 전쟁에 나선 뒤 패배했다면 실질적 최고 지휘관인 이성계의 위상이 약해질 게 뻔했다. 그 사이에 최영이 국내 기반을 공고히 해둔다면, 패전 후의 이성계는 한층 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이성계는 훨씬 위축된 상태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고, 쿠데타를 벌일 가능성도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최영이 인생 막판에 의외의 1패를 기록하면서 역사무대를 떠날 가능성 역시 자연히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반대로, 이성계가 요동정벌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경우. 이 경우에는 최영이 불리해졌을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되기는 힘들었다.

세계 최강 몽골을 몰아낸 명나라 군대를 상대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설령 이성계가 승리한다 해도 상당한 출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최영이 준비를 탄탄히 해둔다면, 승리한 이성계가 귀환한다 해도 최영을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를 상대로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고도 역사무대에서 곧바로 사라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력이 취약한 무인들은 군사적 대승을 거둔 뒤에도 정치적 패배를 당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국내 무대에서 대승을 거둔 을지문덕도 그런 일을 당했다면, 국내가 아닌 요동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은 그런 일을 당할 가능성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가 그렇게 되지 않고 않고 에너지를 보존한 상태에서 귀국했다면, 상황은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영과 이성계가 승부를 점치기 힘든 대결로 돌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최영에게는 단기전이 유리

최영과 이성계 어느 쪽도 군부 전체를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다. 이 상태에서 이성계가 명나라를 꺾고 금의환향하고 그 사이에 최영이 국내 기반을 굳혔다면, 양쪽의 대결은 그것이 군사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예측이 힘든 상황으로 전개됐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대결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이성계 쪽이 아무래도 좀 더 유리했다. 이들의 대결이 장기화되어 여론이 승부에 영향을 주게 될 경우에는, 선비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최영이 좀 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위화도 회군 전부터 이성계는 신진사대부 그룹의 리더인 정도전·정몽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결이 장기화되면, 선비들의 지지를 받는 이성계가 좀 더 유리한 상황에서 대결을 펼쳤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내용을 정리하면, 요동 정벌을 나간 이성계가 패배하거나 혹은 승리하더라도 지친다면, 최영이 '어린 손자' 우왕과 함께 오래도록 정권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승리한 이성계가 지치지 않은 상태로 귀환해 대결이 벌어지게 됐다면, 최영 입장에서는 단기간에 승부를 보는 게 유리했다. 상황이 장기화 되면 여론주도 계층인 선비들과 가까운 이성계가 아무래도 좀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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