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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즈음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종종 나오는 소재가 있다. 가진 것도, 기댈 데도 없는 홀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몸이 닳도록 노력해 남부럽지 않게 공부를 시키는 것. 전쟁 이후라고 하면 까마득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내 아버지가 1953년생. 그러니 아주 먼 이야기만은 아니다.

하지만 내 할머니는 드라마 속 홀어머니가 될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뼈와 살이 닳고 변해 버리도록 한평생 열심히 일한 것은 같다. 그녀는 육십이 되기도 전에 이미 노인의 모습이 되었다. 허리는 굽었고, 이를 잃었으며, 귀도 잘 들리지 않았다. 고된 노동과 삶의 흔적이었으나,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막내딸을 뱃속에 품은 채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작은 산촌의 어려운 살림으로 오남매를 홀로 먹이고 입혀야 했다. 늘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했다. 훗날 치매에 걸린 뒤에도 남몰래 나가 풀을 뽑고 다녔을 정도로 자나깨나 일할 생각뿐이었지만, 먹고사는 것은 쉬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장남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학업을 중단시켰다. 학교 대표로 뽑혀 대회에 나가게 됐고, 그걸 준비하느라 귀가가 늦어졌기 때문에. 당장 농사를 도울 손이 필요했고, 어차피 중학교에 보낼 수도 없었다. 제 의사에 반해 학교를 그만두게 된 내 아버지는 가슴에 한을 품고 머지않아 상경했다. 

시골엔 일할 사람이 줄었지만 입도 하나 줄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나 보다. 장녀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집에 수양딸로 보냈다. 말이 좋아 수양딸이지, 식모살이였다고 한다. 다른 자녀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마음껏 공부할 수 없었고 일찍이 가족을 떠나야 했다.

다행히도, 오남매 모두 근사한 어른이 되었다. 제 본분을 다하고, 어머니를 귀히 여기는 사람들로. 그러나 다들 크기와 모양만 다를 뿐 가슴속에 한이 있고 내내 외로웠다는 것을, 나는 지난주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하나 같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왜 본인은, '우리 식구'는 정이 없다고들 하는지.

그 '밥' 때문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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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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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신세 지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셨다. 서울에 올라왔다가도 얼른 다시 내려가지 못해 늘 안달복달하셨다. 누구에게도 의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셨을까. 어쩌면 노동하지 않고는 밥을 넘겨 보신 적이 없어서 그런지도. 

야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할머니를 남달리 좋아한 적은 없다.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언니와 남동생에게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주실 때도 나는 건너 뛰기도 했고, 주실 때에도 끝내 아까워하는 기색을 드러내곤 하셨으니.

그러니 나만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와의 아련한 일화 같은 것은 없지만,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있다. 바로 밥. 내가 어른이 된 뒤 시골집에 가면, 이른 새벽부터 할머니는 엉덩이 걸음으로 다가와 꼭 이 말씀만 하셨다. 

"밥 해라. 밥 안 하고 뭐하나. 밥 해라."

밥 때문에, 온 가족이 모이면 웃지 못할 광경도 벌어졌다. 우리는 내내 잔치 음식과 주전부리를 끊임없이 먹은 데다가, 맛깔난 반찬들도 많아서 밥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 고봉으로 밥을 퍼야 했다. 할머니는 밥이 조금이라도 덜 담겨 있다면 쌀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고 식사를 물리셨으니까. 

할머니는 밥솥이 비어 있는 것을 참지 못하셨다. 자식과 손주들의 그릇에는 밥이 수북해야 했다. 그래야만 숟가락을 드실 수 있었다. 비워진 밥솥은 금세 다시 채워져야 했다. 이제는 살을 빼기 위해 일부러 굶는 경우도 있다고 말씀드려도 요지부동. 할머니에겐 일용할 밥이, 정말 중요했다.

처음 남편을 시골에 데려갔을 때, 그가 상차림을 돕는 것에 할머니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셨다.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그에게도 말씀하셨으니, "밥 해라."

남녀가 유별하다는 관념마저 희미해진 뒤에도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좀처럼 할머니를 떠나지 않았나 보다.

한평생 먹고 사는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입관식에서야 처음으로 할머니의 구부정했던 몸이 펴진 것을 보았다. 앉으나, 서나, 누워서도 굽었던 허리가 이제야 곧게 펴져 있었다. 내가 모르는 그 어딘가에 꽃과 낭만이 가득하진 않다 해도, 부디 밥 걱정 없이 편히 쉬실 수 있기를 바라본다.

태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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