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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노동자회 회원소모임 '페미워커클럽'은 2021년을 맞아 힘들었던 한해를 거치고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준 책 6권을 선정했습니다. 책을 함께 읽고, 코로나19 이후 단절이 부각된 세상에 '우리'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페미워커의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기자말]
병원이라는 낯선 세계 병원이라는 낯선 세계. 그러나 오히려 가장 낯설었던 건, 병원 밖의 익숙한 공간에서 나를 대면한 상대방의 눈에 깃든 공포와 경계를 발견하곤 하는 일이었다.
▲ 병원이라는 낯선 세계 병원이라는 낯선 세계. 그러나 오히려 가장 낯설었던 건, 병원 밖의 익숙한 공간에서 나를 대면한 상대방의 눈에 깃든 공포와 경계를 발견하곤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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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1. 바이러스가 확인된 코로나바이러스 질환, 2019. 2. 기타 바이러스 폐렴." 약 열흘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하는 날, 두 가지 서류를 발급받았다. 소견서와 퇴원증명원. 이 서류들은 내가 아팠다는 것과 이제 아프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었다.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 문제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바이러스 전파의 위험 없이)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증명 절차는 서류를 제출한다고 하여 깔끔하게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퇴원 후 나에게 이제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누구에게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 인사였고 누구에게는 선의였으며 누구에게는 업무적 절차였을 테다.

그 각기 다른 결을 가진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네, 이제 괜찮아요." 달리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진실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에겐 가능한지도 모를 '완전한 회복' 여부보다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돈을 벌고 학기를 마치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고통은 번역되기 어렵다

어떤 경험은 사람을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몸의 고통도 그렇다. 아픈 몸으로 이끌려 닿은 곳은 낯선 세계다. 이곳은 추방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건강'을 표준으로 삼는 세계의 언어가 표준어라면 아픈 사람의 경험이 만드는 언어는 방언이다. 질병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나의 발화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이 된다.

두 세계의 영토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의 세계의 양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가 확진자와 접촉했다는 것을 국가가 인지한 순간부터 병원 밖을 나올 때까지, 나는 어떤 것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았다. 모든 과정은 행정 및 의료 시스템에 의해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나는 진료비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라는 '표준'의 질서가 이토록 철저하게 개입하고 구성한 경험은, 내 입으로 발화되자 행정적 언어로 전혀 번역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퇴원 이후에도 잦은 기침이 약 한 달 동안 계속됐다. 그동안 나는 학교에 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채기만 해도 눈총을 받는 때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정은 병결로 인정될 수 있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타당한 조치였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담당 직원은 물었다. 왜 퇴원한 직후, 한 달 정도 쉬어야 한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았느냐고. 그건 놀랍게도(!) 당시 내가 한 달을 쉴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몸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다.

의사도 언제 기침이 멎을지 말해주지 못했다. 어떤 날에는 좀 괜찮은 것 같았다가 그다음 날엔 다시 심해졌다. 3회 이상 결석한 수업은 수강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한 학기 등록금을 날리느냐 마느냐의 갈림로에서, 나는 가능하면 상세하고 진실하게 내가 겪은 일을 번역하여 스스로 변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담당 직원의 눈빛으로 판단해보건대 그 이야기는 도통 믿음직스러운 증언으로 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 필요한 건 서류였다. 나의 아픔은 서류로 증명되지 않았다. 증명될 수 없는 아픔은 인정될 수도 없었다. 

이토록 낯선 몸의 존재감, 그리고 이토록 익숙한 불화의 감각
 
방 이 많은 방, 이 많은 침대에 누워 있을, 이 많은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어디에 있을까?
▲ 방 이 많은 방, 이 많은 침대에 누워 있을, 이 많은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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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기쁨과 고통의 장"(각주 1)이다. 그러나 기쁨은 자연스럽고 고통은 돌출된다. 낯선 도시에서 해가 지는 풍경을 보며 시원한 바람이 내 몸을 스쳐 가는 것을 느낄 때, 그러니까 몸을 통해 즐거운 감각이 경험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그것이 몸의 감각임을 잊었다. 잊힌 존재는 트러블이 될 때 비로소 인식된다.

기침이 끊이지 않아 몸을 옹송그리고 밤을 지새울 때, 잊혔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존재감으로 나를 일깨웠다. 이상한 것은 이토록 낯설고 무거운 몸의 존재감이 아니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몸의 존재감을 낯설게 느끼는 감각 그 자체다.

일생을 몸을 통해 살아왔는데 나는 왜 몸의 존재를 낯설게 느끼는가? 때로 모조리 규명할 수 있을 만큼 투명하고 빈틈없이 배치할 수 있을 만큼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몸은, 동시에 왜 이토록 "미지의 땅"인가? 거꾸로 말하자면, 이렇게 모호한 '미지의 땅'을 '표준의 세계'는 어떻게 그렇게 분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까?

그러나 아픈 사람의 세계에 거주하며 느끼는 몸과 불화하는 감각도, 나의 경험이 '보편타당'하게 간주되는 표준의 언어로 번역되기 어렵다고 느끼는 어긋남의 감각도, 실은 낯설지만은 않다. 남성이라는 표준 밖의 존재로서, 여성인 나는 정상성과 불화하는, '이상한 세계'의 예외적 존재, 즉 타자의 자리에 놓이곤 하기 때문이다.

표준의 세계와 그 밖의 세계는 표준어와 방언이 그렇듯 단지 나란히 놓인 두 세계가 아니다. 여기엔 권력이 작동한다. 표준은 다른 모든 것을 비표준으로 뭉뚱그린다. 표준은 그것의 구체적인 속성 때문이 아니라, 표준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된다. 표준 바깥으로 내쫓긴 존재들은 늘 그러한 표준에 자기를 비춰보며 자신의 존재를 해명하고 승인 받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질병이라는 추방 혹은 여행

질병을 추방하고자 하는 세계와 질병과 함께 거주하는 세계. 높고 단단한 격리 벽이 놓인 것 같은 두 세계는, 말 그대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개의 다른 나라 같다. 표준의 세계에서 취약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마치 그런 것이 없다는 듯이 그 세계는 굴러간다. 고통이라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증상으로 몸의 존재감을 직면하게 될 때, 나는 아픔과 취약함을 나를 구성하는 당연한 요소들로 다시 설정해야 했다. 그건 아주 낯선 일이었다. 

"낯선 곳에 가면 우리는 또 다른 존재가 된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자기를 알게 되기도 한다."(각주 2) 그건 이 낯선 곳이 내가 언제나 가고 싶어 하던 아름다운 도시일 때도, 한 번도 가본 일 없는 음압 병동일 때도 마찬가지다. 내 통제 바깥의 무언가에 의해 온통 흔들리는 일은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난다. 나는 아프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아프게 되었고, 건강이라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낯선 거리를 거닐며, 가진 것의 일부는 잃고 일부는 새로 얻었다. 여행이 늘 그렇듯이 말이다. 

취약함의 세계를 환대하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누군가의 취약함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자신의 취약함 역시 용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내가 자신의 취약함을 없는 것으로 여기는 한, 다른 누군가의 취약함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낯설고 불편한, 그러나 이미 내 안에 있었던 취약함이라는 얼굴을 어떻게 다시 만날 것인가? 

폴 리쾨르는 번역 작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언어적 환대'라는 개념을 통해 말한다. "언어적 환대란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자신의 집에 맞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각주 3) 질병과 나이 듦으로 인해 몸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낯선 경험을 내 안의 일부로 자리매김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 나는 그러한 변화를 기꺼이 기쁨으로 환대할 수 있을까?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취약함에 기초한 세계의 언어는 늘 불화하였으나 모국어이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었던 표준의 언어를 그저 다양한 언어 중에 하나로, 혹은 일종의 외국어로 낯설게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권력의 언어는 번역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학교라는 행정 권력이 이해 불가능한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므로 번역의 가능성은 표준의 바깥으로부터 생성된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질병과 함께 표준의 바깥을 여행하는 이들의 기록이자, 같은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가이드북이며 나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는 어학 교재다. 이처럼 각자의 유배지에서 길어 올린 무수한 방언들이 다양한 웅성거림의 목소리로 범람하게 될 때, 표준의 세계 또한 스스로가 가진 취약함을 외면할 수 없는 실존으로 다시 만나야 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다.

[각주]
(각주 1) 로빈 롱허스트, '몸', <현대 문화지리학>, 논형, 2011. 
(각주 2) 로런 엘킨, <도시를 걷는 여자들>, 반비, 2020.
(각주 3) 폴 리쾨르, <번역론>, 철학과 현실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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