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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의 섬이라고요? 섬이 태극기를 닮았나요? 그건 아닐테고..."

태극기의 섬을 아느냐고 지인에게 물으니 되돌아온 질문이다. 섬 전체에 태극기가 펄럭여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푸른 하늘에도, 바다 한가운데에도, 무궁화동산에도, 사람들 사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섬사람들의 가슴속에 한시도 쉬지 않고 태극기가 펄럭인다. 여기는 바로 '항일의 섬' 소안도(전남 완도군 소안면).

소안도는 항일정신이 가득 스며있는 곳이다. 섬사람들은 암울하고 참담한 일제강점기를 쉬지 않고 일제에 항거하며 꿋꿋이 버텨냈다. 그래서인지 소안항에 닿자마자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는 표석이 사람들을 반긴다.

소안도는 가는 곳마다 태극기가 펄럭인다. 항일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태극기의 섬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섬 주민들이 민가와 도로 곳곳에 우리나라 국기를 게양하기로 한 것. 대한민국국기법에 따르면 아무 때나 태극기를 게양할 수 없지만, 소안도는 1년 365일 국기를 게양하도록 조례를 개정했다. 이곳은 항일정신을 불태운 항일의 땅이요, 태극기의 섬으로 거듭난 것이다.

소안도는 함경도 북청, 부산의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린다. 이곳 주민들은 무력항쟁과 평화적 시위, 노동운동과 교육운동, 그리고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일제에 항거하고, 빼앗긴 토지반환 법정투쟁을 이어가는 등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동안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소안도는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20명, 역사에 기록된 89명이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소안도는 명실공히 항일운동의 성지로 우뚝 선 것이다.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은 한반도 수탈의 시작 

시대를 거슬러 가보면 1912년 8월, 일본이 토지조사령을 공포하고 토지조사사업추진 속도를 계속해서 높이고 있었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10년 9월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사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근대 조선인의 토지 소유관계를 분명히 한다는 명목으로 토지 소유권과 토지 시세를 조사하여 우리 국토를 측량했다.

토지세를 안정적으로 거둘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일본은 식민 통치자금을 충당하고자 했던 것. 토지사업은 조선인의 토지 신고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래서 일부러 서류를 복잡하게 만들고 짧은 기간 안에 소유한 토지를 신고하도록 강요했다. 이로 인해 글을 모르는 소작인의 대부분 소유가 일본에 강탈당했고, 시간이 촉박해서 국가 소유와 문중의 토지가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못해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조선인의 많은 토지를 '소유자 불확실' 명목으로 일본이 직접 소유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노림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의 지세 수입은 1910년의 약 2배였다. 조선총독부는 대부분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했다. 그렇게 확보한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 민간회사들에 나눠 일본 본토에 있는 일반인을 우리나라로 끌어들였다. 이주한 일본인은 싼값에 토지를 받아 한반도에서 생활의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 결과 일본인 대지주가 늘어났다. 총독부가 일부 한국인 대지주들의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하며 권익을 보장했던 것은 한국인 대지주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바로 친일 세력을 키웠던 것.

우리의 소작민들은 대부분 경작권을 잃게 됐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이 토지조사사업을 약탈로 간주하고, 조사원을 습격하거나 측량을 방해하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때 논의 약 65%, 밭의 40% 정도가 소작지가 되고, 전체 농가의 3.1%에 해당하는 지주들이 농경지의 절반 이상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대부분 소작인이 광산이나 부두 등에서 날품을 파는 노동자가 되거나 만주나 연해주로 떠났다. 토지를 잃은 대부분 사람은 간도 땅으로 떠났는데, 1910년 10만이던 간도 인구가 1920년에는 60만으로 급격히 늘어나게 됐다. 그들의 울분이 폭발해 3.1운동은 소작농들의 울분이 포함된 무력 시위로 번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한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민간 지주들의 농장 체제를 꾸려 조선의 수탈체제를 완벽히 갖추었다.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심해지자 조선의열단 단원인 나석주는 1926년 12월 28일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일본인들을 사살하는 의거를 단행하기도 했다. 조선인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 침탈의 첨병으로서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존재했던 것.

독립운동가와 유공자를 배출한 항일운동의 성지, 소안

소안도는 원래부터 일본과 악연이 깊은 섬마을이다. 일제강점기에 절정을 이른다. 특히 당사도 등대 습격과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 불복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이곳 소안도에서는 주민들이 토지 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해 13년간 일본과 법정투쟁을 벌여 승소했다. 그런 이유로 송내호와 정남국 선생 같은 독립투사와 100여명의 선열들이 감옥에 갇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처럼 소안도 주민들의 끊임없이 일어나는 항일정신은 바로 교육의 힘이 밑바탕이었다. 교육을 통해 나라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를 일찍 깨달았던 주민들은 독립자금을 모으고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현재, 사립소안학교 도서관이 들어서 있는 곳이 바로 중화학원을 거쳐 사립소안학교로 이어져 왔던 곳이다. 지난 1990년 비로소 소안도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지면서 이 섬의 이야기가 외부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안도  어느 곳에 서 있어도 자랑스런 태극기가 펄럭이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친일을 일삼는 정치권 세력을 여전히 보고 있으니 이것 또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계속>

정지승/다큐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소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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