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 정치 동맹파업으로 기억되고 있는 구로동맹파업(1985년 6월 24~6월 29일) 36주년을 맞이하여 6월 5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이 주최한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 구로 2·3공단 기행'의 여정을 독자들과 나눈다.[기자말]
초여름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가산디지털단지역 1번 출구를 나선다. '가리봉역'에서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이름이 바뀐 지 16년, 공식 이름이 아니었으나 공식 이름처럼 불리었던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된 지 21년이 지났다.

최근에는 구로공단을 구로·가산·금천의 첫 이니셜을 따서 'G밸리'라 부르기도 한다. 역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20층짜리 아파트형 공장 대륭포스트타워 6차가 눈에 들어온다.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길을 오간다.

현재 1공단에는 아파트형 공장과 '지식산업센터'라고 불리는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2공단에는 패션 아울렛 등 도소매업이, 3공단에는 기존 굴뚝형 공장과 지식산업센터가 병존한다.
 
아파트형 공장이 즐비한 가산디지탈단지역 인근
 아파트형 공장이 즐비한 가산디지탈단지역 인근
ⓒ 연정

관련사진보기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이 주최하는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 구로 2·3공단 기행' 참가자들은 첫 번째 기행 장소인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으로 이동했다. '금천 순이의 집'은 쪽방체험관 등 1960~1990년대 구로공단 여성노동자들의 생활 모습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구로공단 조성 50주년(2014년)을 앞두고 2013년에 만든 공간이다.

이날 기행은 '금천 순이의 집'에 이어 3공단 중원전자 공장부지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공장부지, 수출의다리를 지나 구로동맹파업 현장인 2공단 사거리 대우어패럴·효성물산 공장부지, 마지막으로 기륭전자 공장부지 순으로 이어졌다.

구로공단(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은 재일동포의 국내 투자유치와 수출산업의 효율적인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64년)의 제정으로 조성되었다. 1967년 1공단(현 구로동) 완공에 이어 1969년 2공단(현 가산동) 1973년 3공단(현 가산동)이 완공되었다. 2공단 준공 후 열린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에는 42일 동안 2백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당시 경부선 영등포역과 시흥역 사이에 임시로 만들어졌던 산업박람회 간이역은 나중에 가리봉역이 된다.

조성 당시 구로공단 부지는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도로 포장이 안 된 진흙길이 많고, 홍수가 많이 나던 곳이다. 또 청계천 개발로 쫓겨난 난민들이 천막을 짓고 살던 곳이기도 하다. 정부는 국유지가 많고 땅값이 싸며 한강·안양천이 있고 1번 국도와 경부선 등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공단 지역으로 선정한다. 지금의 가산동 두산아파트 자리는 산이 있던 곳이다. 이 산을 헐어 그 흙으로 공단조성 평탄화 작업을 했고, 그 자리에는 삼립빵 공장이 생겼다.

구로공단 조성 과정에서 농민들이 정부에 의해 사유지였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고 소송사기범으로 몰리는 일도 있었다('구로공단 농지 강탈사건').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을 국가 공권력 남용으로 결정한 후에 피해 농민들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하여 국가 배상금액을 받아냈고, 현재까지 그 금액은 총 1조 원을 넘겼다.

"일본계 기업, 그 중에서도 재일동포들에 의해 공단이 구성되었습니다. 재일동포 사업가들이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세금을 내지 않는 값싼 조건으로 OEM 제품을 생산해서 수출할 수 있는 면세 공단을 요구한 거죠. 5.16 쿠데타 할 때 돈이 많이 들어갔는데, 그 돈이 재일교포들을 통해 들어온 겁니다." (문재훈 소장)
 

공단기행 길잡이를 맡은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이 당시 구로공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5.16 쿠데타의 자금을 댄 재일동포 기업인들이 요구한 조건을 구로공단 설립을 주도했던 한국경제인협회 내 수출산업촉진위원회가 받아들였다는 내용이다. 수출산업촉진위원회의 전신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에 대한 면죄를 조건으로 군사정부에 산업정책 협력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제재건촉진회다.(1961년)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토대를 갖고 있는 수출산업촉진위원회는 지금의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으로 이어진다.

3백 명이 살아도 화장실은 한두 개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맘이 설레인다

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
순이네 뎅그런 굴뚝엔 파란 실오라기 펴오른다
바람은 어두워가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가수 김민기씨의 <강변에서>를 함께 듣고, '금천 순이의 집'을 둘러본다. 136일 간의 투쟁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7월 복직을 앞두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LG트윈타워분회 서인자씨는 이날 기행에 참가해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쪽방(벌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서씨는 이 쪽방을 사용했던 여성노동자들과 비슷한 시기에 일을 하고 구로공단 근처 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그 좁은 쪽방에 걸려있는 교복을 보면서 그리우면서도 슬펐어요. 일을 하면서 야간에 공부를 했던 그들이 부럽더라고요. 그 방에서는 가난해서 슬프기도 하지만, 희망이 느껴졌어요." (서인자 LG트윈타워분회 조합원)
 
금천 순이의집에 마련된 쪽방 체험관
 금천 순이의집에 마련된 쪽방 체험관
ⓒ 연정

관련사진보기

   
1967년 말 2000여명이었던 구로공단 노동자 수는 1978년 11만 4천명까지 증가한다. 출퇴근 시간이면 공단 내 육교가 흔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노동력 70퍼센트, 기계는 30퍼센트"라는 당시 공단 사업체의 슬로건을 반영하듯 봉제·섬유·가발 등 노동집약적인 상품이 구로공단 전체 수출액 중 80% 이상을 차지했다. 그 생산을 담당한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노동자들이며, 이들 중 상당수는 지방에서 온 15~19세 여성노동자들이다. 1980년 18억 7천만 달러 수출액의 원천은 이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과 노동착취에 있다.

"우리 공단 본부에 가면 여성노동자가 횃불 들고 있는 상이 있어요. 공단에서 제일 고생한 분이 여성이라는 훌륭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는데, 2천년 들어서면서 그 동상이 사라졌어요. 그러다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서 여성대통령이 됐다고 다시 동상을 복원시켰습니다. 동상 세우는 걸 찬성해야 될지 반대해야 될지 곤혹스럽죠." (문재훈 소장)
 

지방에서 올라와 살 집이 없는 여성노동자들은 1.5~3평가량 되는 방 하나와 부엌 하나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쪽방에서 살았다. 2~3층 되는 주택에 기억(ㄱ)자나 디귿(ㄷ)자 형태로 적게는 수십 개부터 많게는 백여 개의 방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1978년 경력 3년 된 1급 미싱사가 아침 7시 30분부터 근무를 시작해서 받는 일당은 980원, 연장수당 등을 다 해서 받는 월 임금은 3만1980원이었다(<동아일보>1978. 4. 11.) 이 돈에서 월세 1만 여 원을 내고 연탄값 등 외상값을 갚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고 나면 반찬 없는 밥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방세가 노동자 월급보다 비쌌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이 가족·친지, 친구, 동료 등과 방 한 개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방세를 충당했다. 많은 경우 집 한 채에 백여 개의 쪽방이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공동주거를 감안하면 못해도 200~300명이 거주하는 셈이다. 연탄가스에 의해 중독 사고가 발생하거나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옛날 쪽방에는 화장실이 한두 개 밖에 없었어요. (화장실이 아예 없어 골목 공동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출근시간에 죽어나는 겁니다. 가장 극단적으로는 저런 벌방이나 쪽방을 2부제로 했다고 해요. 한 방을 오전 오후 교대로 쓰는 거죠. 구로동맹파업 때 2공단 사거리에서 6일 동안 점거농성을 했는데, 물 전기 식량을 다 끊었거든요. 그때 노동자들이 제일 힘들었던 게 뭘까요? 화장실이었어요. 배고픈 것도 더운 것도 참을 수 있는데, 화장실이 끊겨버리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죠. 요즘 아파트형 공장하고 쪽방하고 공통점이 뭘까요? 공동화장실 입니다. 저는 원리적으로는 요즘 고시원이나 원룸이 쪽방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문재훈 소장)

정부는 10년에 걸쳐 60만평 땅에 10만의 '산업 역군' '수출의 여인들'의 노동으로 수출에 기여할 공단을 만들면서 이들이 주거할 공간과 복지 시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공장 기숙사들은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연장근무와 특근 등 노동력 동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통제의 도구에 불과했다. 1988년에는 총 800명 입주 가능한 여성노동자들의 기숙 시설인 초원아파트가 만들어져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국산업단지공단은 건물 용도 변경을 통해 '서울 디지털 드림타운'이라는 오피스텔로 재건축하여 현재는 민간 오피스텔로 사용되고 있다.
   
"15만 공단을 만들면서 종합병원 하나 만들지 않았다는 건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전형을 보여주는 겁니다. 수출의 다리를 넘으면 수영장도 있는데, 그것도 현대로 넘겼다가 지금은 어디로 넘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공단운동장은 규모가 줄었어요. 공공 영역이 민영화와 사양화를 이유로 자꾸 사유화 되고 이윤에 희생당하는 한 상징으로 이 쪼그라든 공단 운동장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문재훈 소장)

80년대까지 구로공단 여성노동자들이 사용하던 쪽방을 90년대 이후에는 싼 방이 필요한 청소년들이 이용했고, 2천년 이후에는 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들이 살았다. 최근에는 쪽방이 있던 자리에 원룸과 오피스텔이 들어서고 있다.
  
금천 순이의집 전시관을 돌아보는 구로공단 기행 참가자
 금천 순이의집 전시관을 돌아보는 구로공단 기행 참가자
ⓒ 연정

관련사진보기

  
화려한 겉모습, 공동화되는 산업과 생산 영역

한국산업단지공단이 발표한 2021년 1분기 국가산업단지 현황에 따르면, 최근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총 고용인원은 14만 2천 명이다. 입주업체 수는 1만 2천 개로, 1개 업체 당 고용된 노동자 수가 12명 정도 된다. 한 업체당 평균 250명이었던 1987년보다 업체당 노동자 수가 1/20으로 줄었고, 그 노동자의 상당수는 파견과 도급으로 일하고 있다. 공단에서 산단으로 바뀌면서 과거에 블루칼라 작업복이 화이트칼라로 바뀌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외형적인 변화에 불과하다.

IT·SW업종이라고 하는 아파트형 공장에 들어가 보면 실제로는 다단계나 부동산 같은 곳이 많다. 최근에는 파견이나 도급 형태로 운영되는 콜센터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1차 정규직은 소수이고, 노동자들은 하청의 재하청 '갑을병정...'으로 이어진다. 문재훈 소장은 '기'급 노동자까지 봤다고 했다. 이른바 프리랜서라고 하는 형태로, 층층시하 착취구조가 지금의 구로공단 모습이다. 이처럼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빈곤해진 구로공단을 문 소장은 '양복 입은 빈대떡 신사'에 비유한다.

"서울이 커지고 산업화되면서 땅값이 무지하게 오릅니다. 공장 하나를 팔면 같은 공장 10개는 만들 수 있을 만큼 땅값이 올라가요. 199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여기에서 고생하면서 공장을 돌릴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땅 팔고 여기에 건물 올려갖고 집장사만 해도 3배 4배 이득을 보거든요.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제는 생산적인 제조업을 통해 돈 벌 생각이 없어요. 그러면서 공단이 산업단지로 바뀌고, 이제는 대부분이 동산 건물 아파트 임대 이런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려고 합니다. 이른바 산업 공동화 생산 공동화가 되면서 텅 비어버린 형태가 되는 거예요. 아파트형 공장을 요즘은 지식산업센터 라고 하죠. 겉모습은 굉장히 화려해졌지만, 사실 우리 안의 산업과 생산의 영역은 텅 비어버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 옮기겠습니다. 저쪽으로 더 내려가서 꺾을 거거든요. 빨리빨리 따라왔으면 좋겠습니다."
 
구로공단 기행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구로공단 기행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 연정

관련사진보기

   
구로공단의 마지막 전노협 사업장

1990년대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사업장이었던 3공단 중원전자 공장부지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공장부지를 지난다. 중원전자는 카세트를 생산했던 공장으로 노동조합 조합원이 630명에 달했던 회사다. 1990년 20만 명으로 시작한 전노협은 5~6개월 만에 2백 명을 구속하는 등의 탄압으로 3년 만에 4만 명으로 축소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쟁의를 하면 회사는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소사장제를 도입하거나 직장폐쇄와 공장 이전 등으로 대응했다. 심지어 구로구청은 노동조합에 노조 활동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한 노동조합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 시기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위장폐업과 직장폐쇄에 대항하여 싸웠던 곳 중에 하나가 중원전자 노동조합이다. 당시 중원전자와 나우정밀 등 구로지역의 노동자들은 연대투쟁을 하다가 이른바 '제 3자 개입'으로 구속된다. 결국 중원전자는 사측의 흑자부도 위장폐업으로 문을 닫았다.

'노조탄압 공장'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던 무선원격조정기를 생산하는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부지에도 고층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있다. 1988년에 설립된 태광하이텍 노동조합을 전신으로 하는 하이텍분회(금속노조 남부지역지회 소속)는 구로공단에 남은 마지막 전노협 사업장이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은 사측의 구로공장 매각에 대항하여 공장사수와 고공농성 등의 투쟁을 통해 현재 독산역 인근 조합원들만을 위한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문재훈 소장은 "끝까지 투쟁하면 경제적 실익도 보장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며, 노동조합 활동하는 게 절대 손해 보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도 노동조합 했다는 소리를 못해요

수출의다리를 지나 오래된 육교를 건너 구로동맹 파업의 현장인 현대아울렛 앞에 도착했다. 인근 패션몰을 오가는 시민들로 거리가 북적인다.

"현대아울렛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 중심 사업장인 대우어패럴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 건너편에 있는 마리오아울렛은 효성물산이라고 함께 연대파업을 했던 덩치가 가장 크고 참여 노동자도 가장 많았던 대표적인 사업장이고요. 두 회사가 마주보고 있죠. 구로동맹파업의 역사적인 현장의 중심지입니다."(문재훈 소장)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 당시, 1985년 총선과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일시적인 유화국면에 들어가자 구로공단에는 민주노조가 속속 만들어진다. 각 노동조합에서는 임단협 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84년 대우어패럴 노동자들도 임금착취와 차별 등에 분노하여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발한 투쟁을 했다. 그 다음 해인 1985년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이 임단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두 달이 지난 시점에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3명이 구속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6월 24일 대우어패럴·가리봉전자·효성물산·선일섬유·부흥사 5개 노동조합이 동맹파업에 들어가면서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된다.

6일 동안 5개 노조의 지지연대 투쟁도 전개되었다. 물과 전기가 끊긴 공장에서 6일 동안 굶으며 버티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6월 29일 벽을 뚫고 진입한 관리자와 구사대들에 의해 강제해산 당한다. 43명이 구속되고 1500여 명의 해고노동자가 발생한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 정치 동맹파업으로 기억되고 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당시 대우어패럴이 있던 현대아울렛(오른쪽) 그 맞은 편 건물이 당시 효성물산이 있던 마리오아울렛
 1985년 구로동맹파업 당시 대우어패럴이 있던 현대아울렛(오른쪽) 그 맞은 편 건물이 당시 효성물산이 있던 마리오아울렛
ⓒ 연정

관련사진보기

 
"구로동맹파업이라는 맥락을 통해서 처음으로 우리 노동자들이 6.25의 피 묻은 이데올로기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은 노동자 스스로가 노동조합 하면 빨갱이라고 탄압 받는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우리 공단을 대표하는 분들 중에 하나인 박영진 열사 김종수 열사도 구로동맹파업과 연동되는 부분입니다. 그때 주역이 나타났어요." (문재훈 소장)

때마침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도화선이 되었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구속 간부 중 한 명인 강명자 당시 사무장이 신호등을 건너고 있다. 강씨가 도착하자마자 마이크를 넘겨 받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예전엔 블랙리스트에 걸려서 이 거리를 못 움직였는데, 지금은 돈이 없어서 이 거리를 못 움직여요. 이렇게 투어를 할 때 한번 씩 와서 여러분들한테 인사를 하게 되네요. 역사적인 장소 산업민주화와 혁명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여기만 오면 저는 슬퍼요. 제가 아직까지도 우리 대우어패럴 동지들 모임 회장을 맡고 있는데, 친구들과 동생들이 지금까지도 울면서 저한테 전화를 해요. 그때 열여덟 열아홉 되었을 때, 성폭력 당해서 결혼 해가지고도 말 못하고 고통스러워서 하는 동생들이 있어요. 지금까지도 노동조합 했다는 소리를 남편이고 아이들한테 못 한 사람들도 있고요. 실신하고 들쳐 엎는 상황에서도 자기의 소중한 부위를 만지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 성추행이잖아요. 지금 같으면 언론이나 연대싸움을 해서라도 떠들 수가 있는데, 그렇게 못한 게 너무도 한이 돼서 지금도 말 못하고 언니한테만 얘기한다고 울어요.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 슬퍼서 울어요. 사람이 사람답고자 했던 행위가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 못 받는 수치를 많이 남긴 거잖아요." (강명자, 전 대우어패럴노조 사무장)
 
공단기행에서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강명자 전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사무장
 공단기행에서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강명자 전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사무장
ⓒ 연정

관련사진보기

   
공단은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뿌리

마지막 기행 장소는 2공단에 위치한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공장 부지였다. '에이스 하이엔드 타워 클래식'이라는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14층짜리 이른바 지식산업센터 건물이 들어서있다. 주변의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륭전자 골목은 기륭전자를 제외하고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이 변화가 없다. 공업소와 슈퍼, 식당, 중국음식점, AMK가 있던 세일로 빌딩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초창기 파견노동자였어요. 기륭에 처음 왔는데, '너 어느 회사 다니니?' 하고 물으면 제가 답을 할 수가 없어요. 휴먼닷컴으로 출근하는 게 아니니까 휴먼닷컴이라고 할 수도 없고. 기륭전자에 출근해서 기륭의 작업복 입고 기륭의 업무지시를 받는데 '저는 기륭전자에 다녀요'라는 말이 안 나와. 내 소속은 휴먼닷컴 이었으니까. 정체성 혼란이 처음에 있었어요. 저는 그전에 정규직 경험 밖에 없다보니 되게 이상한 회사라고 생각했어요." (김소연, 기륭전자분회 전 분회장)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설립 당시 분회장 김소연씨(현 '꿀잠' 집행위원장)가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 역사를 들려준다. 2005년 이른바 '잡담해고' '문자해고'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시오' 등의 일상적인 해고에 저항하기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에 들어간 이야기, 수차례의 단식과 고공농성 등을 통해 2010년 어렵게 만들어낸 정규직 복직 합의, 2013년 복직을 했으나 사장이 일도 월급도 안주고 야반도주 한 이야기, 2014년 비정규직·정리해고법 전면폐기를 위한 사회적 투쟁을 선포하고 밖으로 나와 투쟁을 하게 된 이야기... 2002년에 입사하여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의 긴 이야기를 20분 동안 술술 이어간다.

기륭전자 마지막 사장 최동열은 그토록 소망하던 이 건물을 짓지 못했다. 욕심을 부리다 노동자들과의 합의를 늦춘 대가였다. 김소연씨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에게는 바로 엊그제 같은 이야기인데, 긴 시간이 흘렀다며 합의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활동을 계속 하겠다고 한다.

문재훈 소장은 파견노동은 나를 부리는 사람과 나를 책임지는 사람이 괴리되어 한쪽은 의무만 있고 한쪽은 권리만 있는 노예제에 다름 없다며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공장 부지 앞에서 구로공단기행 참가자들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공장 부지 앞에서 구로공단기행 참가자들
ⓒ 비정규직노동자의집 꿀잠

관련사진보기

   
기행에 참여한 서인자씨는 "나는 환갑이 지나 투쟁을 했는데, 이 사람들은 젊어서 투쟁을 했다"며, 그 덕분에 우리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 게 아니겠냐고 했다. 공단의 해가 저물어가고, 공단기행도 마칠 시간이 되어간다.

"공단 주변에 사는 분들은 공단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요. 공단이라는 게 집값 떨어지는 이름이지 집 값 올라가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죠. 구로구란 이름도 없애자고 합니다. 국민의힘 세력들은 자기들을 산업화 세력이라고 하고, 민주당 세력들은 민주화 세력이라고 합니다. 진짜 산업화와 민주화 뿌리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노동자 민중들이 어떻게 고생하면서 일을 했고, 어떤 투쟁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밀고 갔는지 되돌아본다면 공단은 잊혀지거나 묻혀져야 할 공간이 아닙니다.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토대이고 뿌리다. 오늘 기행이 그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문제제기 하고 싸우고 단결하고 연대할 때 미래가 만들어지고 우리 지우와 승우(최연소 공단기행 참가자)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하고 밝게 뛰어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높다란 철교위로 호사한 기차가 지나가면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아이야 불 밝혀라 뱃전에 불 밝혀라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 저어라 열여섯 살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 저어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아이야 불 밝혀라 뱃전에 불 밝혀라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 <강변에서>, 김민기
 

* 참고자료
구은정 <우리들의 구로동 연가: 구로공단과 구로디지털산업단지 사이 월드>/2009/ 이매진
김묵한 <구로공단 그리고/혹은 G밸리>/2015/<서울경제> 121호, 서울연구원
서울역사박물관 <가리봉동: 구로공단 배후지에서 다문화의 공간으로>/2013
서울역사박물관 <가리봉 오거리 :구로공단 반세기 기념 특별전>/ 2013

덧붙이는 글 | <워커스> 7월호 수록 글을 수정·보완하여 게재합니다.


태그:#구로공단,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 #구로동맹파업, #기륭전자,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 그리고 세상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