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15 07:18최종 업데이트 21.07.15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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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별자치시 아파트 단지. ⓒ 권우성


존경하는 유현준 교수님께

최근 출간하신 <공간의 미래> 잘 읽었습니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싶었습니다. 건축과 인문학이 버무려지면 이런 상상력이 나오는구나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주택, 학교, 상업공간 등 대한민국 도시공간이 책에서 들려주셨던 것처럼 바뀐 모습을 상상하며 읽다 보니 가슴이 설렜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함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도시공간은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수님의 책을 읽고 새로운 도시공간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보여서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대한민국 부동산을 꾸준히 들여다본 입장에서 '9장, 청년의 집은 어디있는가'에 대한 팩트체크를 해드리면 좋겠다 싶어 지면을 빌려 편지를 드립니다.

자가보유 100% 사회는 이상사회인가

교수님께서 쓰신 기존의 책에서도 공공임대주택 공급에 대한 불편함을 은연 중에 드러내셨는데, 이번 책에서는 9장 '청년의 집은 어디있는가'로 한 장을 할애해서 임대주택보다 자가소유를 늘리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집값의 10% 정도만 있어도 집을 살 수 있는 미국에서 계약금 5천만 원이 없어 월세를 내며 살았던 교수님과 일가친척이 마련해준 5천만 원으로 집을 샀던 유대인 친구의 10년 후 자산 양극화 현실을 들려주시면서, 월세를 내는 청년은 21세기 소작농과 다름없기에 임대주택보다는 집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p.271).

정부의 부동산 소유 비중이 높을수록 독재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p,277), 미국 임대주택의 대표적인 실패사례인 프루이트 아이고 아파트 슬럼화를 들어(p.285) 임대주택 공급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주택소유자의 비중을 늘리고 무주택자의 비중을 줄여 자가소유와 무주택자의 경계부를 점차 아래로 내릴 수 있도록(p.280) 자가소유 촉진정책에 대해 무게추를 싣고 있습니다.

일단 '정부의 부동산 소유 비중이 높은 국가가 독재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은 사실이 아닙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한 정부의 부동산 소유와 국가의 독재 성향은 연관성이 없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10년째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미국 컨설팅 회사 Mercer 조사) 1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주택 중 43%는 영리주택이 아닌 사회주택이며, 사회주택의 절반은 공공임대주택과 정부의 규제를 통해 임대료 제약을 받는 제한영리주택입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 75%는 임대주택에 살고 있지만 오스트리아는 독재국가와 거리가 멉니다.

교수님께서 자주 언급하셨던 프루이트 아이고 사례처럼 미국의 공공임대주택 정책은 실패했지만, 북유럽,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국가는 공공임대주택 또는 주거관련 사회적 경제 주체에 의해 공급되는 주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독재국가 여부의 관건은 국가의 부동산 소유 비중이 아니라, 정부가 권력을 억압적으로 쓰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는 국민의 역량입니다.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은 정부가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국민들이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국가권력을 사용하도록 정부를 잘 통제하고 있기에 억압적 정치제도나 독재정치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EU 회원국의 자가점유율 [자료 유럽연합통계청(Eurostat)] ⓒ Eurostat

  
반면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 패망 이후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면서 국가소유주택을 국민들에게 소유권을 넘겨 자가소유율 90% 수준이지만 이들 나라를 민주주의 모범국가로 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자가소유율은 경제에도 그리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자가소유율 96%로 진정한 1가구 1주택 사회를 달성한 루마니아는 평등도, 효율도 다 놓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대다수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어 주택구매 수요가 줄어 주택건설이 중단되어 토목·건설 경제가 몰락했습니다. 대다수가 집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사가 쉽지 않다 보니 직장을 옮기는 등 노동력의 이동에 제약이 걸려 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신규주택공급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독립한 다음 세대들이 머물 집이 부족하다보니 여러 세대가 좁은 집에 같이 사는 주거혼잡도가 매우 높은 상황입니다.

루마니아의 사례처럼 주택소유자 비율이 높으면 노동력의 이동이 줄고 실업률이 높아질 뿐 아니라 과도한 주택대출로 인해 금융취약성과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선진국이 되어도 어느 정도 이상 자가소유율이 높아지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교수님께서 주목하신 싱가포르 역시 자가보유율이 90% 이상으로 매우 높지만, 토지의 80% 이상이 국가소유이며 월급의 20% 이상을 강제저축시켜 형성한 국민연금 재원을 주택구입대출재원으로 연결하였기에 가능한 모델입니다. 토지가 국가소유이기에 한국처럼 시세차익이 수억원씩 크게 발생하기 쉽지 않으며, 투기가 과열되어 시세차익이 많이 발생할 경우 일정부분 시세차익을 환수하는 장치가 있어 한국처럼 집값이 폭등하는 일이 없습니다. 싱가포르 모델은 한국이 따라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큰 상황입니다.

1가구 1주택, 직관적으론 이상적이지만 현실에서는 부동산시장이 꼬여버리는
 

세종특별자치시 아파트 단지. ⓒ 권우성

 
문재인정부의 부동산정책의 실패 요인 중 한 가지는 1가구 1주택 권장 정책이었습니다. 후반기 문재인정부 주택정책 기조는 '다주택 투기꾼, 1주택 실수요' 프레임으로 다주택자는 규제하되 무주택자가 주택을 한 채 소유하고자 하면 대출 규제 완화, 세제 완화, 시세 대비 대폭 낮은 분양가 등 다양한 혜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정책 기조의 틈을 이용해 법인 및 부동산투자신탁 활용을 넘어 세대분리를 통한 증여까지 다주택자의 1주택자 위장으로 주택시장 교란이 일어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후에는 현재 보는 것처럼 무주택자의 패닉바잉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어떤 정책도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주택을 소유하여 중산층이 두터워지는 1가구 1주택 세상은 직관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사회인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구현하기 쉽지 않은 이념적인 지향입니다. 민주당 정치인들이 다주택자에게 정책실패 원인을 돌리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동적으로 쓰는 구호이지만, 현실에서 1가구 1주택 정책을 구현하려고 하면 부동산시장이 꼬여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최근 2~3년간 뼈저리게 경험하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부동산시장에 필요한 것은 1가구 1주택을 권장하는 자가소유 촉진 정책이 아닙니다. 투자상품으로서의 '주택'으로 과도하게 쏠려있는 무게추를 가족과의 추억을 쌓고 쉼을 누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집'으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지금처럼 무게추가 자산증식 수단으로서의 '주택'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앞으로도 집값이라는 획일적 기준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투자상품으로서 집의 가치가 지금보다 많이 약해져야만 교수님께서 꿈꾸시는 다양한 가치가 구현되는 주거문화도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는 것'에서 '사는 곳'으로 집의 무게추가 옮겨질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주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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