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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을 이틀 앞둔 7월 15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무궁화원에서 관계자가 활짝 핀 무궁화를 돌보고 있다.
 제헌절을 이틀 앞둔 7월 15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무궁화원에서 관계자가 활짝 핀 무궁화를 돌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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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제헌절은 법적으로 '경사스러운' 날이다. 2014년에 개정된 현행 '국경일에 관한 법(국경일법)'은 제1조에서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국경일을 정한다"고 한 뒤, 제2조에서 3.1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과 더불어 제헌절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2005년에 개정된 두 번째 국경일법에도 '경사스러운 날'이라는 표현이 있다. 1949년에 제정된 최초의 국경일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과연 경사스러운 날일까? 생각해볼 만한 이유가 있다.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정부 아래서 최초로 헌법이 공포된 날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날이다. 하지만 제헌헌법으로 불리는 1948년 헌법이 시대상과 시대적 요구를 반영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 판단이 달라질 여지도 있다.

직선제 개헌 투쟁이었던 1987년 6월 항쟁 뒤에 등장한 현행 헌법은 제67조 제1항에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는 직선제 조항을 둠으로써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4.19 혁명 직후에 개정된 1960년 6월 15일의 헌법은 제51조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국가를 대표한다"고 하는 동시에 국무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항을 뒀다. 일례로 제70조에서는 "국무총리는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이 된다" "행정 각부를 지휘·감독한다"라고 규정했다.

1960년 당시의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장기집권, 무엇보다 폭압 정치에 염증을 냈다. 그래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4.19 혁명을 일으켰다. 대통령에게서 실권을 빼앗은 1960년 헌법은 욕심 많은 대통령을 지긋지긋해 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오전 10시 20분에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1960년 4월 26일, 이날 이른 아침에 시인 김수영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제목의 시를 썼다. 신문지도 아닌 빳빳한 사진을 그렇게 쓰자고 했을 정도로 이승만을 증오했던 것이다.

시에서 그는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며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이라고 썼다. '아무 두려움 없이'란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승만은 '지긋지긋한 놈'인 동시에 '두려운 놈'이었다. 그런 인물이 또다시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국민적 정서가 1960년의 내각제 개헌에 어느 정도 반영됐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이 꼭 그런 이유에서만 관철된 것은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와 제휴했던 보수세력은 민중의 정치참여가 활발했던 1940년대 후반에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두려워했다. 내각제는 그들이 국민의 직접적 심판을 피하고 권세를 연장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4.19 혁명 당시의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내각제 개헌이 보다 수월하게 관철된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내각제 개헌이 당시의 시대상을 적지 않게 반영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1948년 헌법도 상당 정도로 시대상을 반영하고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켰다. 민주주의제도가 아시아·아프리카에 확산되던 그 시절, 이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 뒤 국민의 대표기관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규정했다.

1948년 헌법은 자주·독립 의지를 보여준 3.1운동 정신도 반영했다. 대한민국은 미국 덕분에 1948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우리 힘으로 싸운 1919년 3.1운동 덕분에 세워진 나라임을 명확히 했다. 이 헌법 전문(서문)은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이완용이 3.1운동에 대해 막말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1919년 당시의 친일 보수세력은 3.1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48년 당시에도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헌법 전문만큼은 3.1운동에 참여한 민중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다. 기득권은 보수세력이 쥐고 있었지만 정통성만큼은 민중이 쥐고 있어서 보수세력이 3.1운동을 대놓고 폄하하기 힘들었던 역학관계를 1948년 헌법 전문에서 알 수 있다.

또 1948년 헌법은 왕조교체나 국가교체 때마다 항상 제기되는 토지개혁 요구를 반영하여 제86조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경자유전 원칙을 규정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 민중의 지속적인 저항이 일본의 지배를 무너트린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고 그런 한국 민중의 상당수가 소작농이었으므로, 이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넘겨주겠다고 선언한 이 규정 역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농지는 농민이 소유한다'고 하지 않고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고 규정했다. 농민이 '주체'가 아니라 '수혜자'로 자리매김 돼 있는 것이다. 1948년 헌법을 만든 심의하고 통과시킨 집단이 지주계급이 아닌 소작농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었다면 제86조의 글귀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때 경자유전 원칙이 좀더 강력히 규정됐더라면, 이번 달 7일에 전국농민회총연맹·한국친환경농업협회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전체 지방자치단체장 238명 중 122명이 농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발표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농지를 불법 소유하다가 발각된 공직자들이 1948년으로부터 7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잘 몰랐다"며 발뺌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이러저러한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1948년 헌법이 경자유전 원칙을 선언한 것은 제한적으로나마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1948년 헌법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그처럼 적지 않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빠트렸다는 점에서 이 헌법은 결정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은 해방의 해인 동시에 분단의 해였다. 이로 인한 모순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1948년 헌법이 등장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 헌법에는 분단 극복의 의지가 어떻게든 반영돼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현행 헌법에는 '통일'이란 단어가 아홉 번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보다 훨씬 더 분단의 아픔을 겪던 시기에 등장한 1948년 헌법에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다.

이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했다. 대한민국정부가 실질적으로 관할하지 못하는 38도선 이북까지도 영토로 규정한 것은 통일의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동시에 이는 민족 간의 평화와 화해를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이 타이완(대만)과 중국의 통일을 촉진하는 측면 못지않게 분쟁을 조장하는 측면도 강하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을 촉진한다고도 볼 수 있고 저해한다고도 볼 수 있는 제4조를 빼면, 1948년 헌법에서는 통일에 관한 적극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헌법 전문에 있는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의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라는 구절이 통일에 대한 의지로 해석될 소지도 없지 않지만, 분단국가가 아닌 여타의 나라에서도 민족의 단결이 중시된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로 인해 치명적 상처를 입은 당시 국민들의 요구가 1948년 헌법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분단'과 함께 중시된 당시의 또 다른 과제는 친일청산이다. 만약 분단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친일청산이 훨씬 더 크게 부각됐을 것이다. 국민적 요구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분단이라는 핵폭탄급 사건이 발생한 상황에서도 친일청산 이슈는 위력을 상당정도로 유지했다. 그것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대한 뜨거운 호응으로 반영됐다.

그런데 1948년 헌법은 이런 시대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이 헌법은 부칙 제101조에서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게 아니라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만 처벌한다고 제한적으로 규정했다. 그나마 반드시 처벌하자는 것도 아니다.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했다. 처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됐다. 이듬해인 1949년,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친일세력은 살아남았다. 부칙 제101조는 친일 보수세력이 기득권을 잡고 있어 친일청산이 여의치 않았던 당시의 현실을 웅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1948년 헌법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담고 있지만, 그 시대에 가장 절실했던 두 가지를 빠트렸다. 분단 극복과 친일청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시기에 이 두 가지를 사실상 외면한 헌법이다.

이런 헌법이 공포된 7월 17일이 과연 '경사스러운 날'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경사스러워서 기념해야 할 날인지, 경사스럽지 않아서 꼭 기억해야 할 날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태그:#제헌절, #친일청산, #개헌, #국경일, #민족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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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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