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를 작성하는 데에 있어 철칙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평가자가 원하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 평가자를 만족시키는 학생부가 좋은 학생부라는 이야기다. 학생부가 가장 중요한 대입 전형 자료로 활용되는 상황에서 이를 부정하는 교사는 없다.

이는 교과 성적이든 비교과 활동이든 아이의 학교생활을 담임교사의 마음대로 적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교사는 보고 느낀 대로 적었다간 아이의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학생부를 기록한다. 지침에도 아이의 부정적인 면은 적지 못하게 돼 있다.

학생부 작성의 몇 가지 철칙 
 
 학생부 조작 사건은 무소불위의 학교장만 아니었다면, 또 교사들 간 자유롭고 수평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면, 애초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학교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데에 있어 철칙이 몇 가지 있다.
ⓒ 픽사베이

관련사진보기


부정적인 면은 감추고, 긍정적인 면은 과장한다. 학생부는 평가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사가 그럴듯하게 미화하는 것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부만 보면 우리나라 모든 고등학생은 '천사'이거나 '천재'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각 대학의 입학사정관들도 이를 손금 보듯 잘 알고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일선 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진학지도를 담당했던 교사 출신들이다. 첫 줄만 읽어도 해당 아이와 작성한 담임교사의 수준과 심정을 단박에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이른바 '꾼'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각 학교의 교육과정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다. 개설된 과목만 봐도 학교의 특징을 간파해내고, 아이들이 학년별로 선택한 과목을 통해 그의 진로와 성향을 정확히 짚어낸다. 학생부에서 학교명을 가린다 해도 그들은 말하지 않을 뿐 귀신처럼 알아낸다. 

그런 그들 앞에서 일개 교사의 학생부 '마사지'는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다. 뛰고 날아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이야기다. 교사가 학생부 기록을 두고 전문가인 그들과 '기 싸움'을 벌이는 건 무모한 짓이다. 그럴수록 학생부는 점점 '위인전'이 돼간다.

두 번째 철칙은 학생부에 계량화된 성적으로 알 수 없는 학업 역량이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교사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이는 모순이다. 교사가 학업 역량을 높이 평가해도, 평가자는 해당 기록의 신뢰 여부를 교과 성적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이다.

하긴 따져볼 필요도 없다. 교과 성적과 비례하지 않는 학업 역량을 기록하는 교사는 거의 없다. 교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아이의 교과 성적이 우수할수록 그의 학생부의 질과 양은 풍성하다. 평가자뿐 아니라 교사도 학생부를 쓰기 전 아이의 교과 성적부터 들여다본다. 

곧, 학생부는 비슷한 성적의 아이들을 세분화시켜 줄 세우는 '새로운 방식'일 뿐이다. 옛날 같으면 소수점 따져 가며 순위를 매겼겠지만, 이젠 교사의 '마사지' 능력으로 그걸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학생부의 기록으로 교과 성적 몇 등급 차이를 극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같은 등급의 아이들과 경쟁을 벌이다 보니 학생부의 양조차 필연적으로 '인플레'를 겪게 된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학생부가 최소한 30~40쪽은 넘어야 서울대에 지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질'만큼 '양'도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교과 성적이 압도적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어차피 '깻잎 한 장' 차이인 터라 '양'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영역별로 글자 수 제한이 있는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제한된 '양'에 누가 더 '질'을 높이는가가 관건이다. 교사의 '마사지'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교사가 한석봉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고등학교에 마련된 수능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학생부의 기록이 풍성해지려면 무엇보다 수업이 바뀌어야 한다. 사실 교실 수업의 변화를 바라며 도입한 게 학종이다. 사진은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세 번째는 교사로서 쓸데없는 '죄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최상위권 아이들의 학생부를 작성할 때는 '이상과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최상위권의 학생부는 학교 하기 나름이다. 그들에게 교사는 기꺼이 '한석봉 어머니'가 돼야 한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최상위권 아이들이 수능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교사가 그들의 학생부를 관리해주는 현실을 빗댄 것이다. 대학이 요구하는 수능 최저 등급을 맞춰야 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학생부와 수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학생부의 비중이 커지면서 수업보다 학생부 기록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됐다.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좋은' 교사란 학생부를 잘 써주는 교사다. 학생부 내용이 부실하면 교사의 수준이 낮고 열정이 부족하다며 손가락질을 한다. 어느새 학생부는 교육력의 판단 기준이 됐다.

아예 '학생부 관리가 철저하다'는 문구를 홍보물에 버젓이 실은 학교도 있다. 좋게 해석하면 학생부종합전형(학종) 등 수시에 강하다는 뜻일 테지만, 솔직해지자면 '한석봉 어머니'를 자임하는 교사가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 학교일수록 진학실적이 우수하고 명문고 대접을 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학생부의 기록이 풍성해지려면 무엇보다 수업이 바뀌어야 한다. 사실 교실 수업의 변화를 바라며 도입한 게 학종이다. 그런데,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핵심 내용을 정리하고 반복적으로 기출 문제를 푸는 기존의 강의식 수업이 가장 효과적이다. 

결국, '수업 따로 학생부 따로'인 상황이 벌어진다. 실제 수업은 수능을 대비하기 위한 강의식이 태반인데, 학생부만 보면 학교마다 다양한 형태의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대학의 입학사정관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조차 그러려니 한다. 

학생부가 온전히 교사의 관찰 기록이 되려면, 학생 수가 적고 개별 수업이 가능해야 한다.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교사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학생 수는 여전히 많다. 참고로, 올해 내가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을 기록해야 하는 아이들은 200명이 넘는다. 작년에는 245명이었다. 

이럴진대, 교사가 아이들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학생부에 꼼꼼하게 기록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들의 학업 역량을 파악하는 데 교과 성적과 학생부 기록 중 어떤 것이 정확할까. 사실 이는 우문이다. 숫자냐 문장이냐일 뿐, 두 항목 간 차이는 없다. 교과 성적의 산출 기준인 시험 문항을 출제한 교사도, 학생부를 작성한 교사도 모두 같은 사람 아닌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 뒤틀린 우리 교육 현실에 가장 부합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학생부로 아이들의 학업 역량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학종으로 공교육이 정상화될 것이라는 판단도 모두 틀렸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작성하는 교사가 '을'이고, 판단하는 평가자가 '갑'인 상황에선 학생부의 신뢰를 담보하지 못한다. 학생부가 오로지 대입 전형 자료로만 기능하는 현실에선 결코 '순수한' 기록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좋은 취지로 도입한 학종이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더욱 부추기는 꼴이 됐다.

학종의 한계가 명확해진 지금, 과거 수능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아니다. 기존의 오지선다형 수능이라면 필연적으로 기출 문제 풀이만 반복하게 돼 있다. 자신의 주장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교육의 고갱이라면, 지금의 수능 방식으론 어림도 없다. 

수능과 학종 사이의 의미 없는 논쟁은 이제 벗어날 때도 됐다. 둘 다 공교육 정상화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음이 증명된 터다. 대입 전형 방식을 두고 벌이는 갈등은 변죽만 울리는 것임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이젠 우리 교육의 지향점을 재고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이 IB를 검토할 적기 

우리 사회의 온존한 학벌 구조를 혁파하는 게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과도기적으로는 기존의 수능을 손보는 게 대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IB(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일부 교육계 인사들로부터 제기된 적이 있다. 

IB란 세계 40여 개국에서 시행 중인 국제공인 대학입학 자격제도다. 개인적으로, 지금이 IB를 검토할 적기라고 본다. 교과 융합과 통합 교육을 골자로 한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취지에도 부합하고, 정부가 2025학년도 전면 시행을 밝힌 고교 학점제와도 충분히 연동시킬 수 있다. 

사족. 내년 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 앞다퉈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 공교육 개혁을 거론하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 모든 국민이 '교육 전문가'를 자처하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들이 교육을 말하지 않는 게 안타깝다 못해 황당하다.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