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0 07:29최종 업데이트 21.08.20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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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다. 탈레반이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을 장악한 15일 이후의 현상이다.

여성 권익에 관한 이슬람권의 일반적인 기준에 비춰 봐도 탈레반의 태도는 심각하다. 지난달 8일 무기를 든 아프간 여성 수백 명이 탈레반 반대 시위를 벌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상당수 아프간 여성들이 탈레반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아프간 여성인권을 탈레반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탈레반 집권기에 특히 열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탈레반이 축출된 지난 20년 동안에도 문제의 심각성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아프간 독립 국가위원회에서 일하는 무사 술타니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07년 발간한 <젠더 리뷰> 제6호에 기고한 '탈레반 이후 아프가니스탄 여성 인권의 현황과 과제'에서 "탈레반 치하에서는 여성교육은 금지되고, 여성을 집안에 가두는 등 퇴행적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한 뒤 이렇게 말한다.
 
2001년 11월 미국에 의해 탈레반 정권이 축출되자 이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상황은 당연히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였고, 또한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프간 여성의 삶은 아직은 그러한 기대에 미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최근 며칠간 많이 보도된 악습에 가까운 결혼 풍습은 2001년 이후로도 근절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과 같이 보는 관습이 있다. 이러한 전통에 의하면, 가족과 마을의 반목을 해결하기 위해 여자아이를 시집보내는 전통으로, 한 집단이 유죄판결을 부족회의로부터 받으면 딸·여동생·누나가 보복을 멈추게 하기 위해 다른 집단으로 보내진다. (중략) 종족 간에 갈등이 있을 경우, 두 집단이 똑같이 책임이 있으면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자아이를 맞교환하기도 한다.
 
2007년 무렵을 기준으로 아프간 소녀의 57%가 16세 이전에 결혼하며 전체 여성의 38%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한다는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및 아프간 독립 국가인권위원회의 보고가 있었다고 위 기고문은 말한다.

이처럼 아프간 여성인권은 탈레반을 포함한 역대 정권들의 공통 과제였다. 미국 등 서방세계의 언론들이 2001년 이후로 이 문제를 제대로 부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는 아프간 여성인권이 특정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뿌리 깊은 문제임을 보여준다.

초기 이슬람 여성의 지위 높아
 

아프가니스탄 서부 헤라트 시에서 국회의원 총선거에 투표하기 위해 여성들이 줄 서 있다. 2018.10.20 ⓒ 연합뉴스

 
잘 알려져 있듯이, 아프간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는 국가·사회 및 가정 영역에서 여성의 독자성이 위축되어 있다. 하지만 이슬람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초기 이슬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높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일례로 결혼 생활에서도 그랬다. 2011년에 <여성·가족생활연구논총> 제6집에 실린 조희선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의 논문 '아랍·이슬람 여성에 관한 고찰'은 "이슬람 초기에는 여성의 결혼 전력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아 미망인이나 이혼녀가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었다"면서 "예언자(마호메트·무함마드)의 첫 부인이었던 카디자는 두 번 이혼한 과부로서 후견인 없이 무함마드에게 청혼하였다"고 설명한다. 

이랬던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저하된 요인은 각각의 이슬람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 이슬람 국가를 관통하는 공통 요인 중 하나는 신학적 해석권의 변화라는 해석이 있다. 다른 문명권에 비해 종교의 지배력이 훨씬 두드러진 이 사회에서 초기의 주도세력이 약화되면서 나타난 변화에서 그 요인을 찾는 것이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 사후 이슬람 세계가 여성의 사회참여가 빈약하였던 비잔틴(동로마), 사산제국(페르시아) 등을 점령하면서 아랍 여성의 위치는 격감되기 시작하였다. 피정복민의 숫자가 아라비아 혈통의 무슬림 숫자를 훨씬 상회하게 되면서, 베드윈(사막 유목민) 아랍인의 문화는 점령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후 종교를 해석하여 법제화시킨 법학자나 신학자의 상당수가 비아랍인들로 이루어져 여성에 관한 꾸란(코란) 구절을 해석하는 데 그들이 지니고 있던 옛 문화의 기준을 적용하였다. 또한 도덕적·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던 사람들이 소외된 세속화된 이슬람제국은 자연 남성중심주의적 사상에 젖어 있던 정치인이나 종교인, 법학자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슬람의 확대 과정에서 나타난 여성인권의 열악화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이 이 문화권 안에서도 당연히 있었다. 근대적 개념의 여성 인권이 비이슬람권에서 논의되던 시기에 이슬람권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다. 서양의 침략에 맞서 이슬람권을 지키려면 여성들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여권 신장운동을 일으켰다. 위 조희선 논문은 19세기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서구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식인 1세대가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세계의 서구식 근대화를 도입하면서 서구문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조국 근대화의 성패를 여성의 근대화와 해방으로 잡고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여성 작가인 파트마 알리예(1862~1936년)를 소재로 하는 '파트마 알리예: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이슬람적 여성해방을 외치다'라는 논문을 2011년에 <한국중동학회 논총> 제31-3호에 기고한 역사학자 이은정은 19세기 중반에 중동 이슬람권 맹주인 오스만제국(터키)에서 발생한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시기 서구식 근대화를 지향했던 남성 엘리트가 여성해방을 문명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함에 따라 여성 문제는 중요한 논의 과제로 부상했다. 여성을 교육시키지 않고 사회활동에서 배제한 것이 오스만제국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한말 한국인들이 여성인권을 고민하기 시작하던 시절에 이슬람권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슬람권에서 여성권익 신장이 상대적으로 지연된 것은 그 뒤 전개된 세계사적 변화와 관련 있다. 

여성해방 가로막은 민족주의

중동을 두고 '세계의 화약고'라고 지칭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19세기는 물론이고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도 중동 이슬람권에서는 외부세력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통제를 벗어난 이후로 이 지역은 영국·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제2차 대전 후에는 서서히 미국의 영향력 속으로 들어갔다. 이 속에서 이슬람인들이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슬람권에 대한 서방세계의 압박은 이슬람인들의 역량을 내부 개혁보다는 대외 항쟁으로 더 많이 유도하는 기능을 했다. 여성 해방에 투입될 역량을 감소시키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서방세계의 지속적 압박이 이슬람 여성인권의 발전을 저해해온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위 조희선 논문은 "제3세계의 여성들은 서구 식민지시대 이래로 다양한 외국의 간섭이나 제국주의에 저항하여야 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봉건군주나 가부장적 구조에 투쟁해야 하는 이중구조에 시달렸다"면서 "이 과정에서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민족해방을 위한 운동의 통합적인 일부가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민족주의는 가부장제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반페미니즘 현상을 보였다"고 설명한다.

여성인권 개혁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일차적으로 이슬람의 내부 동력이 충분치 못했던 데도 기인하지만,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몰려오는 서세동점의 물결을 이슬람권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데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에 비해 서아시아가 서세동점 앞에서 상대적으로 더 무기력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북아프리카 및 중동의 이슬람권을 지배한 유럽 열강에 의해서도 부분적으로나마 여성 권익의 증진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복민이 피정복민에게 가하는 강제적인 변화라는 요인과 더불어 이슬람에 대한 비이슬람의 몰이해라는 요인에 의해서도 그 효과가 낮아졌다. 영국·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의 이슬람권 침입과 뒤이은 강제적 개혁이 별 효과가 없었다는 점은 이슬람 여성 복장을 둘러싼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머리와 목을 가린 채 얼굴만 드러내는 '히잡'이나 온몸을 다 가리고 눈만 보여주는 '부르카'가 이슬람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인상을 적지 않게 좌우하듯이, 이 같은 베일을 착용한 이슬람 여성의 모습이 19세기 유럽인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했다. 유럽 침략자들은 여성인권 개혁의 일환으로 그런 베일부터 없애려 했다. 

모로코와 리비아 중간인 알제리를 1830년부터 침공한 프랑스인들도 그랬다. 1962년 7월 3일 알제리 독립 이전까지 프랑스인들은 알제리 여성들의 베일을 어떻게든 제거하려 애썼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적극 저항한 쪽은 알제리 남성들이 아니라 여성들이었다. 위 조희선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식민통치자들은 개혁 또는 문명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여성을 목표로 삼았다. 베일은 서구인들의 눈에 복종적인 아랍·이슬람 여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베일은 근대화와 여성 지위 제고에서 중심적인 항목이 되었다.

식민통치 기간 프랑스는 알제리 여성의 베일을 벗기려 했으나, 오히려 여성들은 베일을 프랑스 점령에 (대한) 저항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서구의 점령세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이상적이지도, 영향력이 있지도, 영구하지도 않았다. 독립 후 알제리에서는 베일을 쓰지 않거나 서구식 복장을 착용하면 반(反)애국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슬람인들의 주체성부터 존중해야
 

예멘 유엔 사무소 밖에서 열린 사우디 주도 연합군의 공습에 항의하는 집회에서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 사이에 한 소녀가 서 있다. 2015.10.4 ⓒ 연합뉴스

 
이슬람사회의 개혁은 그 구성원들의 감정을 존중하는 속에서 전개돼야 마땅했다. 여성 복장을 개선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우선시한 채 베일 제거를 강요했다. 그래서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없이 베일 착용을 적대시한 서구열강의 태도는 바로 그 베일이 독립운동에 활용되는 결과를 자초했다. 1919년에 영국보호령 이집트에서 발생한 독립요구 시위 때는 여성 수천 명이 베일을 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일이 있었다.

또 알제리 독립투사들은 프랑스 군대의 검문검색을 피하고자 무기나 문서를 여성의 베일 속에 숨겨서 운반했다. 서구인들이 혐오하는 바로 그 베일을 이용해 이슬람 여성들이 반제국주의 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존중심 없이 개혁에 착수한 것이 역효과를 낳았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인권 문제는 오로지 탈레반으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다. 서방세계의 침략 앞에서 능동적인 개혁의 기회를 상실하고 침략자에 의해 수동적 개혁의 처지에 놓인 이슬람 근현대사도 여성인권 개선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거기다가 외부세계의 몰이해적 태도도 인권 개혁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아프간을 비롯한 이슬람권 여성들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세계 시민들의 연대 투쟁은 무엇보다 이슬람인들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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