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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회생은 빚을 안 갚겠다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성실이 갚고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빚만 탕감받는 것이다. 개인회생에는 빚을 떼이는 채권자들의 희생도 있지만 3~5년 동안 극도의 궁핍한 생활과 성실한 노동으로 최대한 많은 빚을 갚고자 노력하는 채무자의 희생도 있다. 개인회생을 신청한 여러 사례를 통해 개인회생 제도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이를 신청한 이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개선해 보고자 한다.[편집자말]
대성(가명)씨의 부모님은 농부셨다. 농촌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에게 농사는 가장 친숙한 일이었다. 학교에 다니면 공부를 못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성적도 아주 우수한 것은 아니지만 매번 상위권에는 들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 수능 모의고사를 보면서 도시의 아이들과는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네에서는 상위권이었지만 전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수능 모의고사 성적은 형편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지방에 있는 대학에는 진학할 수 있을 정도의 수능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진학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대학 등록금도 부담되었지만, 농부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농대라면 모를까 굳이 대학에 가서 엉뚱한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40대 농촌 노총각의 국제결혼
 
비닐하우스를 하겠다며 얻었던 대출까지 더해져 대성씨는 한 달에 이자만 70만 원 넘게 내는 상황에 부딪혔다. 더는 버티기 어려웠던 대성씨는 결국...
 비닐하우스를 하겠다며 얻었던 대출까지 더해져 대성씨는 한 달에 이자만 70만 원 넘게 내는 상황에 부딪혔다. 더는 버티기 어려웠던 대성씨는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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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다 군대를 다녀오고 다시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한두 해 농사꾼으로 살다 보니 어느덧 40대에 접어들었다. 시골에는 또래 여성들이 없었다. 몇 차례 선도 봤지만 대성씨가 좋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덜컥 40대가 되니 겁이 났다. 부모님도 "어서 장가를 가라"며 성화셨다.

시골에서 외국인과 결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곳곳에 외국인과 결혼한 형님들이 가정을 꾸려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외국인과의 결혼을 주선해주는 중개업체의 홍보 현수막이 어김없이 걸려 있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선택한 스무 살이 엊그제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눈 깜빡할 사이에 50대가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대성씨는 캄보디아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세대 차이까지 나면 더 어려울 것 같아 가급적 비슷한 또래의 여성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소개해주는 여성들은 모두 20대였다. 어쩔 수 없이 열 살도 넘게 어린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신혼생활은 행복했다. 아내는 지역에 있는 이주민지원센터 한국어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아내의 한국어 실력이 늘어갈수록 부부간 대화도 많아졌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아이를 돌봐주러 온 외국인 처제

40대인 대성씨는 서둘러 아이를 갖고자 했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더 늦으면 혹시나 난임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다행히 아이를 갖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출산 역시 비교적 순조롭게 했다. 아이를 낳자 아내는 고향에 있는 여동생을 불러오고 싶다고 했다. 방문동거 비자(F-1)를 알아봤다고 했다. 아이가 생겼으니 동생이 아이를 돌봐준다고 하면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처제가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결혼 중개업체에 수수료를 지급하고 신혼살림을 차리는데 의외로 많은 돈이 들어갔다. 비닐하우스를 하겠다며 얻었던 대출까지 더해져 대성씨는 한 달에 이자만 70만 원 넘게 내는 상황에 부딪혔다. 더는 버티기 어려웠던 대성씨는 결국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그런데 개인회생 과정에서 뜻밖의 난관을 맞아야 했다. 처제였다.

처제의 체류자격인 방문동거 비자(F-1)는 언니인 아내와 함께 살면서 조카인 대성씨 아이를 돌봐주는 조건으로 받았다. 아이를 돌봐주는 조건이었기에 처제의 한국에서의 근로활동은 제한되었다. 함께 살며 가사를 돕고 근로활동은 제한되는 처제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녀를 초청한 대성씨다. 하지만 법원은 처제를 대성씨의 부양가족으로 인정해줄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부양가족이 한 명 늘어날 때마다 다달이 갚아나가야 할 금액은 40~50만 원씩 줄어든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회생 신청자들에게 부양가족의 수는 매우 민감하다. 처제가 부양가족으로 인정된다면 대성씨의 부양가족은 아내, 아이, 처제 이렇게 셋이 되어 최저생계비는 290여만 원(4인 가족)이 된다. 반면 처제가 부양가족에서 탈락하면 230여만 원(3인 가족)으로 줄어든다.

가족관계증명서에 기재된 가족을 기준으로 부양가족을 판단하는 법원의 태도를 알았기에 대성씨는 처제에 대한 부양의무는 애초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문동거 비자로 입국한 사람은 취업할 수 없지만, 지자체장이 인정할 경우 한시적인 계절근로는 가능했다. 농번기에 일손이 모자라는 농촌에서 한시적으로 방문동거 외국인을 채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침 대성씨의 마을에서는 계절근로 노동자가 필요했고 처제는 그곳에서 일을 했다.

처제의 아르바이트로 문제된 부양가족

외국인이었던 처제는 은행 계좌를 만드는 것이 번거로워 언니인 아내의 계좌로 급여를 받았다. 그런데 법원은 아내 명의 계좌로 입금된 급여를 근거로 아내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으니 부양가족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아이의 양육은 부부가 공동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 역시 온전히 부양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고 절반 즉, 0.5인으로 인정하겠다고 했다.

대성씨는 졸지에 대성씨와 아이의 절반인 1.5인 가구가 되었다. 부양가족 한 명에 40~50만 원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애초 기대했던 4인 가족은커녕 1.5인 가족이 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처제 역시 계절근로이기 때문에 농번기가 끝나면 다시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처제의 생활 역시 다시 대성씨의 몫이 될 것이다. 대성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부양가족 산정 문제로 세네 번의 보정명령과 보정서가 오고 갔다. 하지만 법원의 입장은 완고했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회생위원과 상담을 했다. 대성씨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회생위원의 답변은 "저야 이해하는데... 판사님이 이해하실지 저도 모르겠습니다"였다. 1.5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147만4773원인 반면 3인가구는 239만370원으로 90만 원 넘게 차이가 났다. 돈도 돈이지만 1.5인 가구가 된다면 월 변제금이 너무 높아져 개인회생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대성씨는 처제가 일하는 모습을 시간대별로 촬영했다. 다른 사람 명의 통장으로 급여를 지급한 것이 문제 되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까지 써주고 나서야 께름칙해 하는 사장님에게 확인서도 받았다. 아내가 아이를 돌보는 모습과 한국어반에서 공부하는 모습도 모두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이들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법원에 제출했다.

그제야 법원도 실제 근로자는 아내가 아닌 처제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끝내 아내는 부양가족에서 제외시켰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라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성씨는 아이만 온전히 한 명의 부양가족으로 인정받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대성씨는 예외적 계절근로 일자리를 가진 처제가 받은 임금, 얼마 되지 않은 그 돈 때문에 자칫 개인회생을 포기해야 할 뻔 했다. 상식적 수준에서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소될 의혹에 개인회생 자체를 무산시킬 정도의 심사를 하는 법원의 태도는 조금은 과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민 변호사는 '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입니다. 본 기사 '브런치'에도 게시 될 예정입니다.


태그:#개인회생, #부양가족, #최저생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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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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