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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낀40대'는 40대가 된 X세대 시민기자 글쓰기 그룹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 이번 주제는 '마흔, 두 번째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남편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뒤, 그간의 기록을 찾았다. 블로그에 '남편'이라고 입력하고 기록을 찾으니 873건의 글이 나왔다. 지난 10년간 쌓인 3000여 개의 글 중에서 29%를 차지했다. 대략 반올림을 하면 3분의 1에 해당한다. 적어도 그가 내 인생에서 3분의 1만큼 영향력을 미친다는 증거다. 직장일, 내 꿈, 육아, 일상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율.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블로그 기록은 내 생활의 극히 일부이고, 모든 기록을 블로그에 다 남기지는 않았으니까.
 
블로그 글에서 '남편'이란 이름으로 검색했다. 샘플이지만 내 인생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율은 29%쯤 되는 것 같다.
 블로그 글에서 "남편"이란 이름으로 검색했다. 샘플이지만 내 인생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율은 29%쯤 되는 것 같다.
ⓒ 이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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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서 30대, 그러니까 결혼 전까지 나는 그를 참 좋아했다. 나는 성급했지만 그는 신중했고, 내가 팍팍한 현실에 지쳐 울먹일 때 그는 나를 토닥였다. 그는 내가 하는 건 무조건 응원했다. 내가 실패해도, 의기소침해 있을 때에도, 집안 일로 곤란을 겪을 때에도, 그는 항상 곁에 있었다.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이 몹시 좋았다. 항상 공기처럼 조용히 곁에 머무는 사람.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시기, 나는 어쩐 일인지 남편에게 늘 화가 나 있었다. 아이들 씻기는 걸 떠넘기다 화를 냈고, 당연히 해야 할 집안일을 왜 자기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지 화가 났다. 시댁에 불만이 생겨도 남편에게 화를 냈다. 당연히 부부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게다가 연속되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 곤란을 겪으며 우리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이혼 이야기가 오갔다.

남편과의 편안한 동거를 위해서 노력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책도 찾아보고 주변에 조언도 구했다. 집안일과 육아를 분담하려면 남편을 잘 구슬리고 애교를 부리고 칭찬을 하라는 등의 팁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따라 하다가 더 화가 나곤 했다. 맞지 않는 옷에 몸을 억지로 구겨 넣다가 화내듯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내가 아직 남편을 좋아하고 있구나, 적어도 나에겐 남편이 필요하다고 느낀 사건이 있었다.

나에겐 남편이 필요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 sukantsharma,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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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아 실패의 시간을 쌓아갔다. 아이들은 한참 어려서 손이 많이 갔고, 나는 회사에서 매일 야근과 주말 근무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승진에서 밀리는 등 예민함이 극에 달할 때였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그건 성공을 기반으로 한다. 계속 실패의 경험을 쌓다보면 결국 사람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당시의 남편은 자신도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대로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부적응자로 살 수도 있다는 압박감이 커져왔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도 힘들었다. 왕복 출퇴근 4시간에 야근까지 했을 때라 남편의 심리적 위축이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남편이 보기 싫었다.

남편에게 혼자 여행을 다녀오도록 제안했다. 여행지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은 곳이 좋으므로 산티아고 순례길과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제안했다. 남편에게 여행 이야기 할 때 남편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그곳에서 무언가 결론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자신의 길이든, 우리의 관계든.

남편은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선택했다. 기간은 3개월 예정이었고, 나는 남편에게 500만 원을 주었다. 3개월에 500만 원이라는 돈이 많은지 적은지 몰랐다. 다만, 그 돈도 마이너스 통장에서 빼서 준 돈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편은 가장 싼 항공권과 가장 싼 숙소를 예약해서 떠났다.

그런데 남편이 가고 나서 얼마 후, 네팔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남편과는 일주일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매일 통화하던 아빠의 연락이 없자, 큰 아이는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었고, 그즈음 시어머니가 물으셨다.

"어제 꿈에 애비가 나왔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연락 한 번 해봐라."
"바빠서 전화 못 받더라고요. 제가 내일 회사 가서 전화해볼게요."


시부모님께는 당시에 남편이 사업 아이템 알아보러 미국에 가는 것이라 둘러댔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나는 혼자 바늘방석에 앉은 마냥 어쩔 줄 몰랐다. 카톡으로 연락을 했지만, 읽지 않았다는 '1'표시는 지워질 줄 몰랐다.

그때, 남편의 죽음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실감이 왔다. 공기처럼 항상 자연스럽게 머물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두려워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남편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죽도록 미워했는데 그 조차도 사랑의 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필요하지만, 나에게도 남편이 필요했다. 제발 살아서 내 곁에 조금 더 머물러주었으면 했다.

일주일만에 남편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 남편은 다행히 무사했다. 지진이 난 지역은 카투만두 시내 근처였는데, 남편은 워낙 싼 숙소를 잡다 보니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지역이라 안전했다고 한다. 다만 지진으로 통신이 두절되어 연락을 못했다고.

일주일 만에 전화기 건너로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큰 강을 건넌 느낌이었다. 남편은 3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30대의 낭만과 40대의 현실

남편이 안나푸르나에 다녀왔다고 해서 갑자기 사업이 잘되었다거나 현실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점은 우리가 대화를 좀 더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그때 여행 가라는 당신 제안을 듣고 솔직히 겁났어. 만약 다녀와서도 내가 정신 못 차리면 그때 우리 관계는 정말 끝이겠구나. 마지막 카드를 나에게 쥐어준 거구나."

돌이켜보건대, 만약 내가 회사에서 잘 나갔더라면, 남편과의 관계에서 조금 더 여유를 가졌을 것 같다. 처음 남편이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그래, 내가 지원해줄게'라고 흔쾌히 말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0대 중반이었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었고, 나는 내 능력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부부라면 당연히 꿈을 응원해야지'라고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그 낭만은 꿈의 성공을 기반으로 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이 자리를 잡으면, 그다음은 나를 지원해줄 것이라 믿었다. 계속되는 실패와 흘러가는 시간은 나를 조급하게 했다. 직장에서의 위치도 불안했다. 아이 둘 워킹맘으로 산다는 건 결코 낭만적이지 못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던가. 30대에서 40대 초반까지, 육아기와 경제적 위기를 거치며 우리의 곳간은 텅텅 비었다.

이후, 우리는 곳간을 새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천천히 일어났고, 사업도 천천히 자리를 잡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텅텅 빈 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넣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결혼이라는 곳간은 물질만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었다. 인내와 노력,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까지도 모두 쌓는 곳이었다.

우리에겐 중간맛 사랑이 필요하다
 
중간맛은 같은 곳을 바라보다가 가끔 서로를 바라보는 거 아닐까.
 중간맛은 같은 곳을 바라보다가 가끔 서로를 바라보는 거 아닐까.
ⓒ krakenimage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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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나는 휴직을 했다. 퇴사를 고려한 휴직이었지만, 다시 복직할 것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언젠가 퇴사는 할 테지만, 그 시점이 지금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휴직하는 날,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통장으로 돈을 좀 보냈어. 잠시 여행 다녀와. 내가 그때 혼자 시간 가진 게 내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시기였어. 당신도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아쉽게도 코로나로 인해 멀리 가지는 못했다. 혼자만의 여행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대신, 그 돈으로 아이들과 여행도 다녀오고, 글을 쓰기 위한 노트북도 새로 장만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꿈을 돕는다. 나는 사업을, 남편은 나의 글쓰기를.

20대의 사랑은 달콤했고, 30대의 사랑은 매웠다. 매운맛에 얼얼하게 당한 우리는 이제 중간맛을 찾는다. 달콤함은 쉽게 질렸고, 매운맛은 고통스러웠다. 때때로 흔들리지만, 적당한 양념을 찾아가며 우리는 중간맛에 도달하기 위해 애쓴다. 지금 이 글은 그에게 어떤 글이 되려나. 달콤함도 매운맛도 아닌 중간맛이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longmami) 및 브런치(https://brunch.co.kr/@longmami)에도 실립니다.


40대가 된 X세대입니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애쓰며 사는 지금 40대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중년, #낀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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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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