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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강화도에서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묘비
  한국전쟁 당시 강화도에서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묘비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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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도 권력에 의한 특정 집단에 대한 탄압이 일어난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국제사회는 규탄 성명을 내놓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모습이 당연한 게 아니었다. 이런 사건에 대한 인식은 많은 노력에 힘입어 발전해 왔고 이에 따라 대응방법이 변화해왔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이해하고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개념이라는 틀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개념의 발전은 인류 인식의 발전과 궤를 함께 한다. 그래서 국가 권력이 저지른 범죄를 규정하는 개념의 변화를 살펴본다면 한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법 철학의 변화, 국가에서 개인으로

1915년, 터키(오스만 제국)는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을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희생자는 최소 20만 명(터키 측 집계)에서 200만 명(아르메니아 측 집계)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과 같은 국제 사회의 규탄과 제재가 어려웠다.

과거에는 국가의 주권이 '국가가 원하는 대로 국민을 다룰 수 있는 권리'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에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은 주권 침해로 받아들여졌다. UN의 전신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있었지만, 국가간의 느슨한 연합체 정도였기 때문에 강제력이 약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런 주권 해석과 법철학에 반대하며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제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이 노력은 2차 대전 후 나치의 만행에 대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이뤘다. 이 때 전범의 혐의를 규정하고 법적 근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렘킨과 라우터파하트였다.

두 명 모두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시기는 달랐지만 리비우 대학 법학과를 다녔다. 또한, 나치를 피해 미국과 영국으로 피신하여 나치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고향의 가족들은 나치에게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국제적 무법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의 지배를 주장했다. 하지만, 국가의 범죄에 대한 인식과 지향하는 법철학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제노사이드,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 1900-1959)

집단 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는 종족, 인종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제노스(genos)'와 살인을 가리키는 라틴어 '사이드(cide)'가 합쳐진 말이다. 이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 렘킨이다.

렘킨이 집단 학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앞서 언급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었다. 대학시절, 그는 이에 대해 교수들과 논쟁을 벌였다. 교수는 가해자인 터키인을 체포할 법이 없고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은 '상관없는 이들의 월권'이라고 말했다. 이에 렘킨은 몹시 분노했고 새로운 국제법의 필요성을 느낀다.

렘킨은 대학 졸업 후 검사와 변호사, 법학자로 활동하다 듀크 대학의 제안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전쟁으로 대서양이 막혀서 소련과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갔는데 이 기간만 거의 1년 반에 달했다. 1941년 미국에 도착한 렘킨은 독일 법령 연구에 매진하며 나치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런 전문성을 인정받아 나치 전범 재판을 위한 연합국의 미국 검사팀에 합류한다.

렘킨은 1944년 11월에 나온 그의 책 '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에서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제노사이드의 초점을 집단에 맞추었다. 그래서 유대인 학살은 독일인 집단이 유대인 집단에게 가한 것으로 보았다.

이 책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매우 가치 있는 내용이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매우 위험한 주장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건 렘킨이 집단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렘킨은 유대인 학살의 원인은 독일 군국주의이며 그 기반에는 독일 민족의 선천적인 잔인함이 깔려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유대인을 열등한 민족으로 봤던 나치의 논리 전개 방식과 동일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학자 레오폴드 쾨르(Leopold Kohr)는 렘킨이 반유대주의처럼 반독일주의로 이어지는 '생물학적 사고방식을 채택하는 덫'에 빠졌다며 비판했다.

여기에 미국 검사팀은 제노사이드를 나치 전범의 주요 혐의로 채택하는 것을 주저했다. 여전히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과 흑인에 대한 차별 정책이 남아있었는데, 집단의 잘못에 초점을 맞춘 제노사이드는 부메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제노사이드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네 가지 기소 조항 중 세 번째에 들어갔다. 하지만 렘킨의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미국 검사팀은 그를 재판 준비에서 배제한다. 렘킨은 지원 업무에 배치되었다가 뉘른베르크 재판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주창한 제노사이드가 전범 재판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인도에 반하는 죄, 허쉬 라우터파하트(Hersch Lauterpacht, 1897-1960)

국가의 반인륜적 범죄를 가리키는 또다른 개념에는 법학자 라우터파하트가 주창한 '인도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가 있다. 그는 전쟁 당시 폴란드를 탈출해 런던으로 와서 193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국제법 교수가 되었다.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의 런던 검사팀에 합류하여 활동한다.

그에게는 운명의 장난같은 일화가 있다. 1921년, 비엔나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한 가정부를 고용했는데 이름이 파울라 히틀러(Paula Hitler)였다. 짐작하듯이 그녀는 아돌프 히틀러의 여동생이었다. 당시는 아직 히틀러의 악명이 높지 않았을 때라 라우터파하트는 히틀러가 나치의 지도자인 것을 몰랐다.

라우터파하트는 국가가 국민을 고문하고 죽일 수 있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기존 주권 개념에 반대하며 시민권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신체 및 행동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평등권 등 9개의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현대 국제법과 민주국가 헌법의 근간이 되었다. 그에게 '모든 법의 궁극적인 단위는 개인'이었다.

이렇게 라우터파하트는 집단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었고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박해하는 것을 '인도에 반하는 죄'로 보았다. 그는 법이란 집단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쓴 '오펜하임 교수의 국제법'이라는 책 서문에도 '개인의 안녕이 법의 최종 목적'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집단을 중시하는 제노사이드를 지지하지 않았다. 집단의 보호가 개인의 보호를 저해하고, 자칫 민족주의를 강화하여 그로 인한 학살을 정당화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단이 다른 집단에 보이는 배타성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이와 함께 라우터파하트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의 책임 역시 국가에 대한 대표성과 권한을 가진 개인에게 있다고 보았다. 만약 집단에 집중한다면 범죄를 저지른 개인은 집단의 뒤에 숨을 수 있었다.

실제로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인 중에는 폴란드 총독을 지내며 게토 설립과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한스 프랑크가 있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독일의 죄는 천년 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잘못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개인의 잘못을 독일 집단 전체로 확대해 희석시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모두가 라우터파하트에게 동의한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 탈출하여 독일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가 강했던 유대인들은 그의 주장을 반대했다.

라우터파하트는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기도 했다. 한 번은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가 머리 모양을 바꾸자 크게 화를 내며 당장 예전의 쪽진 머리로 바꾸라고 했다. 그렇게 강조하던 개인의 권리를 아내와 어머니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렘킨과 달리 라우터파하트는 런던 검사팀의 일원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여하였고, 그의 연구는 현대 국가의 주권과 개인의 보호에 대한 인식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념의 확대

1948년, '제노사이드의 방지와 처벌에 대한 유엔협약(UNGC)'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점점 같은 민족 내에서 학대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민족적 특성에 집중한 제노사이드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제노사이드의 개념을 확대시키거나 새로운 개념을 만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우선 전쟁이나 정치적 이유에 의한 학살을 표현하기 위해 폴리티사이드(Politicide, 정치적 학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1980년 5월 한국의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을 이 폴리티사이드로 규정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복잡한 원인과 동기에 상관없이 모든 학살을 포괄하기 위해 대량 살해(massacre 혹은 mass killing)이라는 개념도 등장한다. 그리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전쟁 중 일어났던 대량 살해를 표현하기 위해 '민간인 학살'이라는 매우 직관적인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과거 한국은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하는 인식이 있었다. 이는 학살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도구로 작용했다. 하지만 인류가 국가 권력의 반인륜적 범죄를 막기 위한 개념과 인식을 발전시켜 왔듯이 우리도 그렇게 인식의 변화를 거쳐왔다. 그 덕분에 지금은 피해자들에 대한 진실규명이 힘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을 규정하는 개념의 변화와 함께 피해자를 규정하는 용어도 변화해 왔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필립스 샌즈,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더봄
최정기(2011), <민간인 학살의 사회구조적 요인 비교 -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전남대 5.18연구소), 11(1): 321-346
곽송연(2015), <정치적 학살(politicide)의 조건과 원인 연구: 5·18의 사례를 중심으로>, OUGHTOPIA(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 30(1): 135-165

태그:#제노사이드, #민간인 학살, #인도에 반하는 죄, #뉘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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