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6 11:41최종 업데이트 21.09.2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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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끝나가는 2016년부터 고강도 압박을 받았다. 임기 말의 오바마와 임기 초의 도널드 트럼프로부터 그는 이전에 없었던 강도 높은 제재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 압박은 아버지 김정일이 겪은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대북 압박인 1993년 이후의 제1차 북·미 핵위기를 경험했다. 세계인들이 전쟁 발발을 염려했을 정도로 위험천만하게 전개된 제1차 북·미 핵대결을 겪은 것이다.


이 사건은 김일성 사망(1994.7.8) 전에 시작됐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일인 1993년 2월 25일에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의 미신고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촉구하고 3월 12일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함에 따라 핵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김정일은 노동당 비서 겸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후계자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 시기에 실권을 갖고 있었다. 특히 핵문제에서만큼은 그가 실질적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김정일과 제1차 핵위기의 상관성이 매우 높다는 점은 그가 핵개발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1994년 10월 21일의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위기를 직접 봉합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제1차 위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1994년 9월 하순에는 김일성 사망으로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가 돼 있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미 핵협상이 개시된 9월 23일에는 김정일과 클린턴(재임 1993-2001년)의 대결 구도가 선명하게 형성돼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북·미 핵위기의 실질적 주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이 제4차 핵실험(2016.1.6) 이후에 겪은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또 아버지 김일성이 한국전쟁 때 겪은 것보다 어찌 보면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다.

김일성 전 주석은 최전성기의 미국을 이끈 해리 트루먼 대통령(1953년 1월 퇴임) 및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한국전쟁(1950~1953년)을 치렀다. 이때 그는 핵위기 당시의 김정일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미국과 대결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모택동)의 지원을 받았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한미연합군에게 평양을 빼앗긴 적도 있지만, 동맹국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기에 외롭지 않은 싸움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점은 그가 전쟁 상황을 활용해 정적들을 숙청하고 장기집권 기반을 구축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나 홀로 미국 상대

그에 비해 제1차 핵위기 당시의 김정일은 전통적 동맹국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빌 클린턴 정권을 홀로 상대했다. 김정일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이전과 판이한 국제환경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을 전후해 세계적 탈냉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북아 국제질서의 주요 행위자인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소련 사이의 양자관계는 총 15개였다. 스포츠에서 6개 팀이 풀 리그로 게임을 벌이면 총 15차례의 경기를 치르게 된다.

그 15개의 양자관계 중에서 탈냉전 직전까지 얼어붙어 있었던 것은 남북관계·한중관계·한소관계·북미관계·북일관계였다. 미수교 상태인 이 다섯 개의 양자관계로 인해 동북아 냉전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다섯 중에서 2개인 한소관계·한중관계는 각각 1990년 9월 30일과 1992년 8월 24일 탈냉전 상태로 바뀌었다. 나머지 3개를 탈냉전 관계로 바꾸기 위한 노력은 전부 다 실패했다. 남북관계·북미관계·북일관계는 냉전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 셋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북한과 관련됐다는 점이다. 이 세 개는 지금까지도 냉전 상태로 남아 있다.

북한이 탈냉전 흐름에서 뒤처지는 현상은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한층 심화했다. 이 고립은 남한 및 미·일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중·소와의 관계에서도 심각했다. 한소수교·한중수교로 북한과 소련·중국의 동맹관계가 소원해졌던 것이다. 이는 6개 국가 중에서 북한이 홀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같은 북한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우방국인 소련의 변심이다. 1995년 9월 7일 자 <경향신문> 1면 기사는 "러시아는 내년 9월로 효력이 끝나는 북한·러시아 군사동맹조약인 조·소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의 폐기를 최근 북한에 공식 통보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한다. 러시아가 전통적 동맹관계의 파기를 선언한 것이다.

얼굴 표정을 확 바꾼 러시아와 달리, 중국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중국은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예전의 그 미소가 아니었다. 차라리 러시아처럼 이별을 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쇼가 아닌 실제 상황

이처럼 북한이 극도로 고립돼 있었기에 클린턴은 강도 높은 압박을 추진할 수 있었다. 김정일(1942년 생)보다 네 살 적은 클린턴은 한때 김정일과의 한판 전쟁까지 검토했다. 1993년 6월 2일에 제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린 뒤에 발행된 1993년 12월 14일 자 <동아일보> 기사 '북-미 핵협상 깨진다면'은 "<워싱턴 포스트>지는 레스 애스핀 국방장관이 지난 10일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한 'USFK 50-27'이라는 제목의 한반도 전쟁 상황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12일 보도했다"고 전한다.

"이 시나리오는 북한과의 핵 협상이 실패, 유엔이 북한에 대해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거나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했을 경우, 북한 측이 남침을 강행하는 데 대한 미국 측의 작전과 상황 판단을 한 것"이라고 위 기사는 설명한다.
  

4일 평양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9.8.5 ⓒ 연합뉴스


국방장관이 백악관에 전쟁 시나리오를 보고하는 장면이 북한을 겁주기 위한 쇼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은 핵 위기 종결 6개월 뒤에 나온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1995년 4월 14일 자 <경향신문> 1면 기사는 "미국은 지난해 5월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위기 때 영변 핵시설의 공습을 검토했으며, 이를 위해 모의 컴퓨터 실험까지 했다고 <워싱턴 포스트>지가 보도했다"고 전한다.

클린턴이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검토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외교적 고립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장 심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동맹국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김정일을 상대로 전쟁까지 계획했으니, 빌 클린턴만큼 북한 지도자를 강도 높게 압박한 미국 지도자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미·소 냉전구도를 만들어 한반도를 불행의 굴레로 몰아넣은 트루먼이나 '악의 축'과 '불량국가' 등을 운운하며 한반도 위기를 조성한 조지 부시(주니어)보다도 빌 클린턴이 가장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전쟁 위기까지 치달았던 북·미 핵 대결은 1994년 9월 23일 개시된 제네바 협상이 10월 21일 마무리됨에 따라 전쟁 없이 봉합됐다. 북한은 NPT 복귀 및 IAEA 사찰 수용에 더해 핵개발 동결을 받아들이고 미국은 경수로 원자로 2기와 중유를 제공하는 한편, 양국 모두 관계정상화를 추구하기로 약속하는 선에서 이 일은 마무리됐다.

대외관계 복원 

김정일은 핵위기 때 클린턴이 보여준 자신감이 어느 정도는 북한 동맹관계의 약화에 기인했음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그 뒤에 그가 보여준 노력에서 알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그는 고강도 자력갱생을 통해 내부 안정을 도모하는 것에 더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 복원에도 보통 이상의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 삼년상을 끝내고 1998년 9월 5일 개헌을 통해 권력을 안정화시킨 그는 1999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중국 방문 및 2000년 그 자신의 비공식 중국 방문, 1999년 북·러 우호선린협조조약 체결 및 2000년 북·러 공동선언 등을 통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상당 수준으로 복원시켰다.

물론 냉전 시절의 동맹관계에는 근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3국들이 볼 때 '북한이 곤경에 처하면 저 나라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겠구나'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에는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중·러 이외의 국가들에도 신경을 썼다. 친미 진영인 유럽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일례로 1998년 12월 2일에는 유럽연합과 정치 대화를 갖게 됐고, 2000년 1월 4일에는 이탈리아와 수교를 했고, 2001년 2월 6일에는 캐나다와 수교를 했다. 이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클린턴과의 핵 대결 때 약점이 됐던 것을 클린턴의 제2기 임기가 끝나갈 즈음에 어느 정도 해결했던 것이다.

김정일이 2002년 10월 이후의 제2차 핵위기 때 조지 부시의 압박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것, 아들 김정은이 오바마·트럼프와의 대결 때 비교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이 2000년을 전후한 시점까지 전통적 동맹관계를 어느 정도 회복해 놓은 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자체 역량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겠지만, 탈냉전으로 사라지는 듯했던 중국·러시아와의 우호관계를 어느 정도 복원해놓은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와중에도 대외관계 복원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내부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면 대외관계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질 만도 한데, 그 와중에도 동맹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라이벌 클린턴이 그렇게 하라고 그에게 가르쳐준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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