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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부모님 댁에 가지 않은 지 꽤 되었다.
 명절에 부모님 댁에 가지 않은 지 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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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부모님 댁에 가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친척이 다 모이는 자리에서 독거 중년인 나는 동물원 원숭이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우리 친척들의 자유분방하고 배려 없는 입담으로 내가 이미 너덜너덜한 동네북 신세가 될 것은 너무 뻔했다.

명절 전에 부모님에게 미리 다녀오면 된다. 요즘은 함께 텃밭 농사를 하기 때문에 매주 밭에서 부모님과 만나고 있다. 그건 그거고 그래도 명절은 명절대로 챙겨야 하지 않냐고? 그도 말이 되지. 그리하여 명절은 오빠에게 평소 못한 효도를 할 기회를 주는 날로 삼기로 했다. 나는 평소 엄마 아빠에게 늘 명절처럼 하니까 진짜 명절날 만큼은 그 효도를 쉬어도 되지 않을까.

어릴 적, 명절 전이면 나와 엄마는 각각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장착하여 윗마을 큰집으로 부엌일 부역을 갔다. 집안네 여자들이 죄다 모여 제사상 음식하는 날이다. 그 와중에 큰집의 자녀들은 이미 외출하여 부엌일에서 열외인 게 참 신기했다. 남존여비 안에서도 섬세한 서열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더 신기한 건 음식은 우리가 다 했는데 막상 본무대인 제사상에서는 안 보이던 남자들이 출연하여 제사를 집도한다는 것. 오빠들도 이미 집안 어른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본무대에 입성해 있었다. 나와 오빠들의 신분 차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라고나 할까.

어린시절, 우리들은 조연도 아니고 스텝 정도로 신분이 전락하는 상황이 참으로 싫었다. 그 넓은 거실은 남자들에게 내어주고 좁은 부엌에서 집안 네 여자들이 엉덩이를 포개며 대기하던 장면이 선하다. 그 집안 여자들 사이에서 나 혼자 오빠들을 따라 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명절 전부터 한반도 며느리들의 푸념 기사는 매해 단골이다. 백신 접종을 하였으니 올해는 전염병 코로나 핑계도 못 대고 방법도 없고 속수무책으로 가시 싫은 먼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덕분에 건너 뛴 작년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고. '내가 이럴려고 백신을 맞은 게 아닌데...' ' 추석 때 안 가려고 접종을 미루었다'는 씁쓸한 글도 보았다.

"엄마, 언니는 오지 말라고 해. 오빠가 오면 됐지. 남의 집 딸을 왜 우리 제사에 불러?"
"넌 왜 언니를 자꾸 왜 오지 말라 그러냐. 며느리인데 시댁에 오는 게 맞지."
"언니는 언니네 조상한테 가고 오빠는 우리 조상 모시고 하면 얼마나 좋아."
"그렇잖아도 와야 오는 거지. 내가 보고 싶다고 온다냐. 못 오면 또 으찌할 수 없구."
"엄마, 너무 기다리지는 마."


자신은 시댁에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고, 이젠 며느리에게 그 도리를 대접 받고 싶은 우리 엄마 세대는 참으로 운이 없다. 그런 문화가 대물림되기엔 이 시대가 너무 확확 변했다. '제사는 나로 끝낼 것이며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친구 엄마가 생각이 났다. 그런 합리적 각성이 엄마한테는 무리인 걸 알기 때문에 "엄마, 내가 언니 몫까지 잘해줄게"라는 말 밖에 나는 못한다.

나홀로족의 추석도 쓸쓸하진 않습니다 

친구들과는 나의 생사 확인 겸 추석 인사를 미리 나누었다. 친구들은 요새는 시댁이 음식을 많이 하지 않아서 명절이 편해졌다는 말과 함께 그래도 시댁 안 가는 내가 부럽다며 깊은 저음의 한숨까지 내뱉는 것을 잊지 않아 주었다.

가입한 기억도 없는 사이트의 추석 메시지도, 명절맞이 세일 상품 동네 마트 안내 문자도 연휴 전날까지는 요란하다. 하지만 추석 당일은 진짜 고요와 고립 그 중간 어디쯤이다. 모든 문자와 메신저들이 침묵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구애를 하던 주식 문자마저 내 안부를 건너뛸 정도로 추석 당일의 전화기 알람은 고요하다. 혹시 전화기가 꺼졌나 괜히 확인 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 독거인들을 보며 명절에 가족도 못 보고 혼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불쌍하게 지낼 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을라나 싶다. 요즘은 연휴에도 영업을 하는 상가가 많긴 하지만 그럼에도 연휴 내내 평안한 칩거를 위해 먹거리를 사서 쟁여놓았기 때문에 명절에 혼자 못 먹고 쓸쓸하게 지낼 거란 생각은 착각이다.

우리는 한반도 민족 대이동 그 시끌벅적함 가운데 보다 밀도 있는 평화와 가을 감성 충만한 한 때를 보낸다. 운동을 평소보다 더, 독서를 평소보다 더, 미루던 영화도 보고 또는 벼르던 베란다 청소를 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청소를 마친 깨끗한 베란다에 누워 가을 하늘을 쳐다보며 가을 햇살에 졸고 있는 고양이 배를 쓰다듬는다. 이번에는 프리랜서 일을 일정보다 앞서 미리 처리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수익이 많은 연휴였다.

시골에서 명절을 보낸 추억 때문인지 아파트에서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이 처음엔 어색해 보였다. 그렇지만 덕분에 나는 아파트 1층부터 올라오는 각종의 기름내를 모두 맡을 수 있는 축복이 주어졌다. 소믈리에처럼 냄새만으로 그 전의 종류를 맞추어보기도 한다. 방금 한 기름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침이 고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엄마가 해준 전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추석,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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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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