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9 19:30최종 업데이트 21.09.2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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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2019.7.23 ⓒ 연합뉴스

 
27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선고된 상표권 및 특허권 매각명령에 대해 미쓰비시중공업은 불복하고 있다. 이 법원 민사28단독 김용찬 부장판사가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징용과 관련해 선고한 이 명령에 대해 미쓰비시는 '즉시 항고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후지뉴스네트워크(FNN)가 발행하는 <에프엔엔 프라임(FNN Frime)> 온라인판 28일 자 기사인 "징용공 관련해 재판소가 처음으로 자산매각명령, 미쓰비시중공업 '즉시 항고한다'(徴用工"で裁判所が初の資産売却命令 三菱重工 即時抗告する)"는 "한국 최고재판소는 2018년에 미쓰비시중공업에 배상 지불을 명령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 측은 1965년 일한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며 지불을 거부하고 있다"고 한 뒤 이렇게 보도했다.
 
이번 명령과 관련해 미쓰비시중공업은 '매우 유감이며 즉시 항고하는 외에 정부와 연락을 취해 적절한 대응을 하겠다'는 코멘트를 내놓았다.
 
강제 노역

이번 사건 당사자인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지난달 21일 자 기사 "'한국어는 적국의 언어'...일본의 향후 대응 시나리오"(http://omn.kr/1uwik)에서 소개했듯이 만 15세 때인 1944년 5월 '중학교에 진학시켜주겠다'는 일본인 교장의 유인에 넘어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 미쓰비시 측이 "고향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월급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또 다른 원고인 김성주 할머니는 양금덕 할머니와 같은 해인 1929년 출생했다. 일제강점기 막판인 태평양전쟁(1941~1945년) 때 김성주 할머니 집안에는 불행이 연이어 찾아왔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1942년에는 아버지가 경남 진해 비행장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다. 뒤이어 어머니가 병을 앓고 세상을 떠났다.

15세 때인 1944년 5월에는 그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상황으로 내몰렸다. 동생의 일본인 교사인 오가끼가 부른다기에 가보았더니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며 '네가 원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에 넘어가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에서 비행기 동체 철판을 절단하는 강제노역에 종사했다. 그해 12월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 때 그는 왼쪽 무릎뼈를 다쳐 평생을 고생했다.
 

1944년 6월경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된 10대 소녀들이 일본인 인솔에 따라 신사참배에 동원된 모습. 이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소녀 김성주가 일본에서 강제노역 하는 동안, 고향에서는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제의 오가끼 교사가 1945년 2월 동생 김정주를 불러 '일본에 가면 언니도 만나게 해주고 중학교도 보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소녀 김정주는 일본 서해안 중간쯤인 도야마현의 '후지코시강재공업'으로 끌려가 비행기 부품을 제작했다.

두 자매는 이때의 한이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법원을 찾았다. 언니는 1999년에, 동생은 2003년에 각각 미쓰비시와 후지코시를 상대로 재판을 걸었다. 하지만 외면당했다. 그래서 두 자매는 2012년과 2013년에 각각 한국 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 결과 김성주 할머니는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에서 양금덕 할머니와 함께 승소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미쓰비시의 완강한 태도 때문에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해 그동안 미쓰비시의 국내 재산을 찾아 법적 수단을 강구해왔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번 매각명령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대법원 판결

미쓰비시는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 협정에서 다뤄진 것이 무엇인가와 관련해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청구권협정 제2조에 의해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가 끝났다고 하려면 이 협정을 통해 제공된 자금이 식민지배 해결에 투입됐어야 하지만, 그 자금이 그렇게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청구권협정 제1조에 의해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은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대가관계에 있다고 보이지 않는 점"을 대법원은 거론했다.

청구권협정으로 불법적 식민지배 문제가 해결됐다고 하려면 '불법행위를 저질렀지만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는 양해가 이뤄지는 게 논리적이다. 가해자는 불법행위의 존재를 인정하고 피해자는 그 인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법원은 일본이 불법행위를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불법행위 채권이 양국 합의에 의해 소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일본 정부 당국자들 역시 1965년 11월 5일, 1993년 4월 6일, 1994년 3월 25일, 1995년 8월 27일 국회에 출석해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말하는 청구권 포기는 본국의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지 개인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공식 표명했다. 법적 책임이 없다는 미쓰비시의 태도는 이처럼 한국 대법원 판례뿐 아니라 일본 정부의 과거 발언과도 배치된다.

중국인에게 사과하고

그런데 미쓰비시가 모든 경우에 법적 책임을 회피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국적의 피해자들에게는 태도를 달리했다. 2007년에 일본 최고재판소가 '중국 정부가 청구권을 포기했으므로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는데도 미쓰비시는 2016년 6월 중국인 피해자 및 유족 3765명에게 1인당 10만 위안(현재 환율로는 약 1800만 원)을 지급하는 데에 합의했다.

2007년 최고재판소 판결이 나온 뒤에 중국인 피해자들이 계속해서 소송을 제기하자, 재판 도중에 위와 같은 합의를 했던 것이다. 금액이 형편없이 적기는 했지만, 미쓰비시가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미쓰비시가 주기로 한 돈은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배상금'은 아니었다. 보상금 명목으로 주는 돈이었다. 이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미쓰비시는 자사의 인권침해를 인정했다. 그에 더해 '깊은 반성'과 '심심한 사과' 등의 표현까지 사용했다.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날 발표된 공동성명 제5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서 일본국에 대한 전쟁 배상의 요구를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를 빌미로 2007년 판결을 내놓았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런 것들에 관계없이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반성과 사과를 표하면서 소액이나마 보상금을 지급했다.

미국인에게도 사과했건만
 

"미군포로 강제노역 진심 사과"… 머리 숙인 미쓰비시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三菱) 머티리얼이 19일(현지시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동에 징용된 미군 포로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기무라 히카루(木村光) 미쓰비시 머티리얼 상무를 비롯한 회사 대표단은 이날 오후 로스앤젤레스(LA) 시내에 위치한 미국 유대인 인권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에서 징용 피해자인 제임스 머피(94)씨를 만나 머리를 숙였다. 2015.07.19 ⓒ 연합뉴스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기 1년 전인 2015년 7월,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간 미쓰비시 그룹 관계자들이 고개를 숙이는 사건이 있었다. 미쓰비시 그룹 대표자들이 제임스 머피를 비롯한 미군 포로 출신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를 표명했던 것이다.

미쓰비시는 "우리는 전쟁포로를 가장 심하게 착취한 기업 중 하나"라며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90대가 된 머피는 "70여 년 동안 갈망해온 영광스러운 날"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미쓰비시가 미국·중국 피해자들에게 보여준 태도 역시 미흡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국적을 봐가며 태도를 달리하는 악덕 기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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