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노래한 영상을 보내준 아이들에게 준 기념품 배지. 지난번 통일 티셔츠 사업 때 함께 제작한 것으로, 태극 문양 위에 20400815라는 통일 염원 날짜와 구한말 고광순 의병장이 외친 "불원복" 세 글자를 새겼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대안이자 차선이었다. 원래는 학교 근처 근린공원에서 마을 주민들과 작은 통일 음악회를 꾸릴 요량이었다. 2학기쯤 되면 코로나도 진정되고 교외 활동이라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루 천 명이 넘는 확진자 수에도 별로 놀라지 않는 현실이지만, 학교는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1학기 말, 기다리다 못해 계획을 변경했다. 사람들은 아이들과 마을 주민이 공원에 한데 모여 음악회를 열 수 있는 세상은 적어도 올해 안엔 오지 않는다고들 했다. 비말로 감염되는 코로나의 특성상 밀집 환경에다 마스크를 쓸 수도 벗을 수도 없는 음악회는 애초 지나친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쉬움이 컸다. 마을 음악회의 효과를 잘 알고 있어서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듬해인 2015년에 학교가 주축이 되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추모 음악회를 연 적이 있다. 학교가 보유한 음향 장비와 조명 세트, 악기 등을 총동원해 공원을 근사한 추모의 마당으로 꾸몄다.

당시 모든 교사와 아이들이 뜻을 함께했고 주민자치위원회와 시민단체를 비롯해 주변 상가의 자영업자들까지 힘을 보탰다. 학교와 마을이 함께 분노하고 다짐했던 뜻깊은 자리였다. 이후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까지 해마다 4월이 되면 연례 행사처럼 마을의 활동가들이 앞장서 추모 음악회를 열고 있다.

또 매년 5월이면 교정에서 윤상원 열사를 기리는 작은 음악회를 연다. 그의 모교로서,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다. 방과 후 시간을 빌려 민주주의를 주제로 함께 시를 낭송하고 영상을 보고 노래를 부른다. 늘 행사의 마지막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이다.

어느덧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이들에게 교가만큼 익숙한 노래가 됐다. 광주 시민으로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이 곡을 어찌 모르랴마는, 교정에서 해마다 열리는 음악회로 인해 더욱 친숙해진 느낌이다. 요즘 아이들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영상으로 느끼고 노래로 배운다.

세월호 추모 행사와 윤상원 음악회는 이제 정규 학사일정에 번듯하게 포함돼 있다. 비록 일회성 이벤트일지언정,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교훈을 되새기는 시간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사실 교실 수업만으로 아이들의 공감을 끌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통일 노래 제목 알려주자, 처음 듣는다는 아이들

고민 끝에 찾아낸 방식이 바로 랜선 통일 음악회다. 모이지 않고 각자 노래를 부른 뒤 영상으로 한데 묶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음악회가 될 것이라 여겼다. 남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보다 직접 한 소절이라도 따라 부르는 게 기억에 더 오래 남는 법이다. 교육적 효과가 크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작년의 경험이 힘이 됐다. 교내 종교행사 때 신자 학생들이 같은 방식으로 각자 노래를 녹음한 뒤 하나의 영상으로 묶어 마치 성가대의 합창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준비와 녹음, 편집 등의 과정이 복잡해 적잖은 품이 드는 일이었지만,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너무 만만하게 여긴 탓일까. 방식만 확정되면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다. 막상 아이들에게 음악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함께 부를 노래를 선정한 뒤 연습을 시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돌의 인기곡이라면 따로 연습할 필요도 없겠지만, 워낙 생소한 노래라 한두 주는커녕 한두 달로도 버거웠다.

처음엔 두세 곡 정도를 염두에 뒀다. 한 곡만으로는 아이들이 입맛만 다시고 끝날 것 같아서다. 통일 교육이라는 이름을 내건 프로젝트이니만큼 이왕이면 더 많은 공감과 호응을 끌어내고 싶었다. 세월호 추모 행사와 윤상원 음악회를 경험한 아이들에게 취지를 설명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정작 문제는 곡 선정과 연습에 있었다.

<터>, <서울에서 평양까지>, <통일이 그리워>, <백두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등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를 메모했더니 끝도 없었다. 그래도 통일을 주제로 삼았으니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도 괜찮을 성싶었다. 이내 이게 비현실적인 계획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적어도 처음엔 꿈에 부풀어 설레어했다.

아이들은 죄다 처음 듣는 노래라고 했다. 그들 앞에 가사를 들려주고 곡을 흥얼거려도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반응 정도는 기대했는데, 순간 막막해졌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카메라 앞에서 따라 부른다는 건,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일이다.

일단 아이들의 귀에 익숙하면서도 주제에 부합하도록 통일의 염원을 담아낸 노래가 절실했다. 몇 날 며칠 일일이 물어가며 그렇게 찾아낸 곡이 바로 <광야에서>다. 아이들은 노랫말과 곡을 쓴 문대현은 몰라도, 노래한 김광석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과거 촛불이 타오른 광장에서 많이 불린 노래라고 짐짓 알은 체 하기도 했다.

열심히 듣고 부르고 익히는 아이들이 대견스러웠다
 

큰사진보기
▲  랜선 통일 음악회 영상의 한 장면
ⓒ 살레시오고등학교	관련사진보기

 
랜선 통일 음악회를 기획한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실제 연습부터 개별 녹음, 영상 편집과 수정, 완성에 이르는 전 과정은 동료 음악 교사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그는 남다른 열정과 책임감으로 '일인 다역'을 기꺼이 해냈다. 지난 여름방학 이후 석 달 가까이 이 프로젝트에만 온전히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음악 수업 시간을 일부 할애했다. 아이들은 그 시간에 악보를 보며 원곡을 반복해 들었다. 이어 듣고 따라 부르면서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으로서 '한가하게' 노래 부를 여유가 없다고 하소연하면서도 열심히 듣고 부르고 익히는 아이들이 대견스러웠다.

시나브로 아이들이 노래를 익숙해 하자 그는 직접 편곡에 나섰다. 떼창이 아닌 화음이 어우러진 합창으로 랜선 음악회의 갖춤새를 도모한다는 거다. 테너와 바리톤, 베이스로 음역을 나누어 아이들 각자의 목소리에 맞도록 역할을 분담시켰고, 이미 노래를 잘 알고 있는 동료 교사들도 하나둘 함께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천군만마였다.

내친김에 그는 반주팀도 스스로 꾸려보자고 제안했다. 작업의 편의와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시중에 나와 있는 음원을 사용하는 게 낫지만, 기왕에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으로 마무리 짓자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수소문해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교사와 아이들이 모였고 연습이 시작됐다. 교육의 일환이라면, 아마추어리즘이 제격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어느 학교에나 피아노를 치고 기타와 드럼 등을 다룰 줄 아는 아이들은 많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친구들 앞에서 음악적 기량을 뽐낼 수 있는 숨은 능력자들이다. 원곡에 충실하도록 하모니카와 간주 부분을 채워줄 일렉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아이까지 모이니 제법 근사한 반주팀이 꾸려졌다. 나 역시 서툰 솜씨나마 어쿠스틱 기타를 맡아 힘을 보탰다.

한 달 넘게 개별 연습이 이어졌다. 여전한 코로나로 한데 모여서 연습할 수가 없어서다. 그러자면, 음역별로 누군가가 시범을 보여야 했다. 화음을 넣지 않은 떼창이라면 굳이 필요 없겠지만, 세 음역으로 나눠 '가이드 영상'을 별도로 제작했다. 노래에 소질 있는 동료 교사들이 발 벗고 나섰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통일 음악회
 

▲ 2021년 살레시오고등학교 통일기원 온라인 합창제
ⓒ 서부원	관련영상보기

 
이윽고 지난주 몇 차례의 수정과 보완 끝에 최종 완성본이 나왔다. 100개 가까운 개별 영상과 통일 음악회의 취지를 소개하는 문구가 한 영상에 담겼다. 비록 5분 남짓에 불과하지만, 각자 애쓴 시간을 모두 합하면 족히 수백 시간을 될 것이다. 아이들은 그간 노력에 보상이라도 받은 듯 뿌듯해했고, 함께한 한 동료 교사는 듣다가 소름이 돋았다며 감동을 전했다.

처음엔 한 곡뿐인 음악회라 내심 서운했는데, 그건 섣부른 생각이었다. 한 노래를 100명이 함께 불렀다면, 그건 한 곡이 아니라 100곡이다. 해마다 열리는 윤상원 음악회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익숙해졌듯, 이번 랜선 통일 음악회를 계기로 <광야에서>의 웅혼한 노랫말이 아이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으리라 믿는다.

기회가 된다면, 계획만 세우다 만 다른 통일 노래들도 아이들과 함께 불러보고 싶다. 그 노래들을 어색해 하는 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다. 한 아이는 낯설었던 <광야에서>도 자꾸 부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더라며 경험을 전했다. 노랫말에 통일은 어디에도 없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통일에 대한 염원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성숙한 아이도 있었다.

동료 음악 교사의 헌신과 아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랜선 통일 음악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지난 석 달 동안의 경험은 음악의 교육적 효과를 새삼 깨달은 계기가 됐다. 통일 교육은 음악 등을 활용한 감성적 접근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통일은 노래를 타고 찾아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