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2 12:55최종 업데이트 21.11.0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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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한국 사회에선 '영어 공용어화' 논쟁이 있었다. 세계화를 위해 민족주의적 언어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이를 주장하는 측의 주된 논리였다. 이들은 현대 지구촌 국제어가 된 영어를 한국어와 함께 우리의 이중 국어로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들의 주장은 언어의 경제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외교, 상거래, 문화 교류 등 대부분 국제무대에서의 소통이 영어로 이뤄지고 있는 만큼 영어 습득은 필연적 운명일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외부와의 소통 수단에 외국어가 아닌 국어의 위상을 부여한다는 것이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경제성만 고려한다 해도 언어를 소통의 가치로만 생각한다는 것은 유아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다. 언어는 한 문명의 혼이다. 선진 문명이라면 그 언어로 만들어지는 모든 문화의 경제적 가치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그러한 증명 사례들을 우리는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폭발적 한류의 성장으로 실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언어의 가치를 경제적 득실로 셈한다는 것 자체가 인문학적 천박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다. 영어 공용화론 논쟁은 90년대 우리의 문화적 역량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사건에 다름 아니다. 20세기 절반을 무력에 의한 정치적 피지배로, 그 후 절반을 압도적 힘을 가진 신문명의 문화적 피지배로 살았던 한국은 세기말 그렇게 몸살을 앓았다.
 

31일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인수위 간사단회의에서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2008.1.31.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영어몰입교육을 밀어붙여 반발을 샀다. 이 과정에서 이경숙 위원장이 '오렌지'를 '어륀지'로 발음해야 한다고 한 말이 회자됐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언어 주권

인류 역사 속에서 문화의 자립적, 자족적 힘을 가진 민족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언어 주권을 포기하는 일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심지어 외세나 공권력의 강요에 의한 언어 말살이나 새로운 언어 강요도 성공 사례는 많지 않다. 언어는 정신적 생명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민중이 깨어 있는 한 언어가 죽는 일은 없다.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체제는 물론 문화 차원에서도 그들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당시 혁명 세력은 모든 프랑스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할 통일된 삶의 기준을 만들어 보급하려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 중 하나가 미터 체계다. 당시까지 사용된 다양한 길이와 질량 단위는 보편적 단위인 '미터'와 '그램' 등에 자리를 양보하고 1800년부터 프랑스 전역에서 사용이 금지됐다.

혁명 정부는 이 통치 이념을 언어 정책에도 적용하려 했다. 당시까지 프랑스에서는 지방마다 쓰이는 언어가 달랐다. 물론 대부분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로망스어군의 하나였지만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에서는 라틴어와 뿌리부터 다른 켈트어의 일종인 브르통(Breton)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한 마을 ⓒ pixabay

 
모든 공화국 시민은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이념에 따라 파리에 사범학교가 만들어지고 대규모 프랑스어 교사가 양성된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전국의 학교로 파견돼 그때부터 전국에서 프랑스어 교육이 실시됐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정부의 기대와 달리 프랑스어 보편화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들과 지역 언어를 사용했다. 그 결과 프랑스어는 '외국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역 언어가 그들의 혼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적 시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는 지방 언어들을 물리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용어'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공화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언어를 계량 단위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피하지는 못한 것이다.

혁명 이후에도 지방마다 고유의 언어가 사용되던 프랑스는 그로부터 세 반세기가 지난 20세기 초 비로소 보편적 프랑스어를 국어로 가지게 됐다. 혁명 이념에 따른 정책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언어 통일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는 30년 동안 생사의 갈림길에서 징병된 프랑스 젊은이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군인에게 소통부재는 곧 치명적 위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인들 사이에서 하나가 된 언어는 이후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되기에 이른다. 물론 미디어의 탄생이 언어 통일의 다른 축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언어는 정책이 아니라 삶이다. 민중들의 실존적 삶에 관여가 될 때 언어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정신 속으로 스며든다. 인위적 언어정책으로 국어를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만약 성공한다면 그것은 한 문화의 치명적 손상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더 타임스>의 콩글리시 진단

최근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가 한국어 속에 깊이 침투한 영어의 영향과 관련한 보도를 했다. 타 문화의 영향을 어느 때보다 많이 받았던 20세기 한국의 모습을 영국인의 시각에서 관찰한 글이기도 하다. 기자는 '콩글리시'라는 표현을 통해 한국어에 깊이 침투한 영어의 영향에 주목했다. 심각한 언어 오염을 경계하는 총리의 한글날 담화도 함께 소개했다.("콩글리시는 베프가 아니다:한국은 언어 오염과 싸우고 있다" Konglish is not your bepu:South Korea fights corruption of its language, <더 타임스> 10월 21일자) 
 

<더 타임스> 10월 21일자 보도. "Konglish is not your bepu:South Korea fights corruption of its language" ⓒ 더 타임스 캡처

 
기자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할수록 한국어의 사용은 줄어들"며 "이런 경향이 이어지면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국내의 우려를 소개하면서, 하지만 외래어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언어학계의 목소리도 함께 소개했다. 한국어로 유입되는 많은 외래어들과 함께 최근에는 반대로 한국어에서 유래한 다양한 말들이 영어사전에 등재되고 있다고 기자는 소개한다. 실제 올해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피시방, 오빠, 먹방 등 한국어에서 유래한 26개의 신조어들이 등재되기도 했다.

인류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어휘와 표현법들을 발달시켜왔다. 발음 역시 타 언어의 영향을 받아 변화를 겪는 것이 필연적이다.

국내 일각에서 한국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현대 영어도 사실은 어마어마한 외래어를 수용한 결과물이다. 11세기 브리튼 섬에 상륙한 노르망디 왕조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엄청난 규모의 프랑스어 단어가 영어로 유입됐다. 그 결과 현대 영어 어휘 가운데 최소 3분의 1, 많게는 3분의 2가 프랑스어를 차용한 단어에 해당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문화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21세기 영어도 이처럼 '순수 혈통' 출신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변 언어들과의 열린 소통 과정을 통해 면역력을 키워온 결과물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다.

현대에 와서는 거꾸로 수많은 영어 단어들이 프랑스어로 유입된다. 프랑스어를 향한 영어 쓰나미 현상에 대해 프랑스어 어휘 연구의 대가 알랭 레이(Alain Rey)는 "우리의 언어가 빈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단언한다.

일간지 <르피가로>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언어 변질의 우려에 대해 "모든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다"면서 프랑스어로 영어 단어들이 유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다만 우려할 것은 유입되는 외래어가 자국어 어휘군 속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단어를 대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프랑스어로 "전화할 데가 있어"를 "J'ai un appel"(제 앙 나펠)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프랑스인들은 "J'ai un call"(제 앙 콜)이라고도 한다. "통화"를 말하기 위해 프랑스어 "appel" 대신 영어 "call"을 쓰는 것인데 두 표현의 뉘앙스는 다르다.

전자는 친구나 부모 등 개인적 전화통화를 의미하지만 후자는 업무상 필요한 전화통화를 뜻한다. 따라서 첫 번째보다 두 번째로 말할 때 더 '중요한 전화'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결국 현대 프랑스인들에게 "call"은 단지 영어의 한 단어일 뿐 아니라 새 의미를 담은 프랑스어 단어가 된다.

한국어에서 '모임'과 '미팅'의 차이가 이와 유사한 예에 해당한다. 직장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미팅'을 '모임'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뉘앙스의 차이는 분명 있다. "오늘 오후 모임이 하나 있어"와 "오늘 오후 미팅이 하나 있어"는 직장인들에게 분명 다른 용도로 쓰인다.

특정 맥락에서 쓰이는 영어의 특정 단어가 한국에서는 토착어화 됐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회망에서 상대방의 글이나 사진에 동의나 호감을 표할 때 쓰는 영어 "like"는 한국어에서 "좋아요"로 정착됐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aimer"(에메)라는 동사가 있지만 영어에서 변형된 "liker"(라이케)를 사용한다.

특정 단어가 두 언어체계를 왕래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도 많다. 오늘날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challenge(도전)"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영어에서 온 외래어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과거 프랑스에서 사용되다 14세기에 영어로 유입된 경우다. 이후 프랑스에서 쓰이지 않다 최근 다시 영어에서 유입됐다. 영어식 발음으로.

언어는 이처럼 정책자의 결정이 아니라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유입되기도, 변화하기도, 소멸하기도 한다. 다수의 사용자가 받아들이면 그 문명의 언어가 되고, 역시 다수의 사용자가 배척하면 소멸하기도 한다. 언어는 인위적인 정책 결정으로 도입할 수도, 바꿀 수도,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다.
 

ⓒ pixabay

 
언어의 오염보다

<더 타임스>는 영어의 대량 유입 앞에 서 있는 한국 사회의 보호주의적, 개방주의적 두 현상을 보여주면서 언어의 사회적 현상에 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다만 언어에 대한 기자의 몇 가지 몰이해가 설득력을 방해한 측면도 있다. 첫 번째로 발음에 관한 문제다. 기자는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포크(fork)를 한국인들은 포크(pokeu)로 발음한다는 점을 들었다. 주스(juice)가 주스(juseu)로 발음된다는 것 또한 콩글리시의 한 예로 들었다.

어휘의 문제에서도 몇 가지 예를 지적한다. 봄가을 코트(trench coat)를 버버리(Beobeori)로, 구토(vomit)를 오바이트(obaiteu)로 쓴다는 것이다. 또한 신조어와 관련한 지적도 한다. 코로나19의 극복 과정에서 엄격한 격리와 통제를 하지 않고 일상과 병행하는 것을 한국에서 '위드코로나'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의 콩글리시 예는 잘못된 선택이다. 왜냐하면 '주스', '포크'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어 어휘의 일부분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사과주스'와 '사과즙'은 엄연히 다르다. 이는 영어권 사용자가 가질 수 없는 한국어의 장점이다. 

영국인 기자가 표기한 '버버리' 또한 한국어에서 '바바리'로 사용되며 사전에도 등재된 단어다. 영국에서는 Buberry(버버리)가 한 상표명일 뿐이겠지만 한국어에서 '바바리'는 특정 연령대의 한국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고유의 정서가 녹아 있는 '복식문화' 용어다.  

심지어 '바바리맨'이라는 새 조어에도 일조했다. 특정 일탈행위자를 지칭하는 이 표현은 영어의 한 단어로는 표현이 안 되고 부가 설명이 필요하다. 엄연한 한국어 단어이며 영어 대체가 불가능하다. 혹시 아는가, 내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Babariman이 등재될지. (Buberry man은 해당사의 반발로 불가능할 것 같다.)

최근 사용되는 '위드 코로나', '언택트' 역시 마찬가지다. 영어에 없는 국적 불명의 엉터리 단어라는 비판도 나오지만, 언어학적 차원에서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이들 단어는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착된 '한국어' 단어들이다. 

'위드 코로나'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with covid'라는 표현으로 유사하게 사용중이며 '언택트'(untact)는 외국에서 한국의 고유한 코로나 전략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한국의 코로나19 대응 성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의 "한국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언택트 경제에 걸고 있다" 기사. ⓒ 블룸버그


지금의 한국 문화는 외래어를 수용하고 신조어를 만들어도 거뜬할 만큼 강하다. 한국어 오염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듯하다.

언어는 한 개인의 사고 체계이자 한 문명의 정체성이다. 젊은 세대가 '버카충', '베프', '불편러', '갑분싸', '이생망'을 쓴다면 그것 역시 문화적 필요에 의해서다. 그것들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표준어가 되기도, 소멸하기도 한다. 언어의 오염을 걱정하기보다 표현의 자유를 더 걱정하는 편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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