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각의 여름> 포스터

영화 <생각의 여름> 포스터 ⓒ (주)인디스토리

 
2021년 10월 16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전날 얇은 셔츠 하나 입고 어두운 거리를 걸으며 "선선해져서 좋네"라고 혼잣말 했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겨울이 찾아올 줄이야? 주말에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날 나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어느 문학관에서 관객들과 영화를 본 뒤 '감독과의 대화' 사회를 보기로 되어있었다. 초행길이라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대중교통으로 그곳까지 가는 방법과 예상 시간을 찾았다. 편도로 두 시간이 소요된다고 나왔지만 실제 경험해보니 버스 대기 시간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다. 서울역에서 광역버스를 타야 했는데, 배차 간격이 길었다. 20분가량 햇볕 안 들고 바람 부는 곳에 줄 서서 기다리며 상체가 잔뜩 옹송그려지고 하체가 배배 꼬였다. 그렇게 오들오들 떨었던 그날의 감각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죠?" "네, 지인-짜 멀고 힘들었어요. 만약 우리 또 상영회 하게 되면 다시는 추운 날에 하지 말아요." 문학관 행사 담당자가 친절한 얼굴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 왔는데, 그걸 알면서도 의례적으로 답하지 못했다. 답하는 동안 아마 내 눈썹은 '팔(八)'자를 그렸을 거다. 오는 길이 얼마나 춥고 힘들었는지 호들갑 떨며 그에게 서울역 광역버스 정거장의 열악함과 배차 간격에 대한 불평불만을 마구 토로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지질했어요.
 
겨울에 본 여름 영화
  
그날 본 영화는 〈생각의 여름〉이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된 날, 여름의 풍경이 스크린 가득 펼쳐지자 새삼스러웠다. 〈생각의 여름〉은 시인으로 등단하기를 희망하는 '현실'(김예은 분)이 주인공이다. "이미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에 빠져있던 현실은 시 공모전 공고를 보고 무언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는 그전까지 네 편의 시를 썼는데, 공모에 응하려면 다섯 편이 필요했다. 마감까지는 단 하루가 남아있는 상황.
 
공모전에 보낼 마지막 시를 쓰기 위해 주인공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난다. 시가 산으로 가자 진짜 산으로 갔다가 자신의 첫사랑과 바람난 과거 '절친'을 만나고, "재미없는 독립영화인"과 만나 술을 마시며 각자의 '구남친', '구여친' 얘기를 나누다가, 진짜 구남친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미 쓴 네 편의 시의 독자가 되어준다. 그들의 목소리로 시가 낭송되며, 시구가 영상으로 옮겨진다.
 
영화에 나오는 시는 실제로는 황인찬 시인의 것이다. 〈실존하는 기쁨〉 〈오수〉 〈현장〉 〈무화과 숲〉 〈소실〉 다섯 편의 시가 영화에 등장하거나 언급된다. 예를 들어, "너무 떨려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내며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꾸 짖었다"는 〈오수〉의 한 구절이 주인공의 남사친 '남희'(오규철 분)의 입으로 옮겨지면, 그 구여친의 뒷모습이 영상에 비치는 식이다. 
 
시 원문을 읽을 때는 슬픔을 느꼈는데, 영화에서 '개처럼' 짖는 구여친의 뒷모습과 그걸 보고 흠칫 놀라는 남희의 표정을 보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의 여름〉이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톤이어서, 그 장면 역시 '웃기게' 그리려고 의도한 연출이라는 짐작에 '감독과의 대화'에서 질문을 던졌는데, 김종재 감독은 "그 장면에서는 웃음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연출을 좀 잘못한 것 같네요"라며 다소 침통하게 답해 머쓱해졌다. 개인적으로는 그 연출이 마음에 들었다는 감상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전한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강아지 '호구' 역을 맡은 개의 출연료가 사람보다 비쌌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적잖은 예산을 동원하면서까지 개를 등장시킨 것은 주인공 '현실'의 일상이 마냥 무기력하지만은 않길 바라는 감독의 안배였다. 개를 기르면 개를 위해서라도 개와 함께 바깥바람 쐬고 몸을 움직이며 기분이 나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생각의 여름> 스틸컷

영화 <생각의 여름> 스틸컷 ⓒ (주)인디스토리

   
'김종재 영화' 같았던 하루
 
〈생각의 여름〉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질한 창작자가 주인공이 되어 극을 이끌어가는 이야기, 에피소드식 구조, 줌을 활용한 연출 등이 거론된다. 감독은 "레퍼런스 삼은 부분은 있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이상한 대화'를 구현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대사를 썼다. 하지만 그 외에 많은 부분이 다르다. 예를 들어 줌 사용의 경우 홍상수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을 계산하고 직접 카메라를 움직이지만 〈생각의 여름〉의 줌은 편집 과정에서 디지털로 낸 효과다"라고 설명했다.
 
개인적으로는 등장인물들이 홍성수 영화보다 더 젊고, 선량하며, 덜 꼬인 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이 '솔직함'을 귀엽고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한다는 점이 나는 좋았다. 피식 웃게 만드는 무해한 말장난의 향연도 이 영화의 개성이다. 
 
행사가 끝나고 다시 두 시간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어두운 차창 밖 하늘이 아름다웠다. 창밖 풍경을 보며 '이상한'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창작자라는 이유로 문학관 직원에게 '선생님'이라 불리며 환대받고, 창작자로서 다른 창작자를 만나 솔직하지만 어딘지 이상한 질감의 대화를 잔뜩 나눈 하루였다(문학관 직원은 내 진행이 재밌지만 독특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뒷맛이 찝찝하거나 씁쓸하지 않았다. '김종재 영화 같은 하루'였다고 표현하고 싶다. 
 
감독 또한 무기력증을 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그를 나아지게 한 게 시였고, 그가 경험한 온기를 전하고 싶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소소하지만 기분 좋은 미소와 활력을 남기는 영화 〈생각의 여름〉은 현재 '네이버 시리즈 온' 등 온라인 콘텐츠 플랫폼에서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최서윤 님은 <불만의 품격>을 쓰고 단편영화 <망치>를 연출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11월호에 실렸습니다.
생각의여름 최서윤 영화비평 김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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