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1 18:00최종 업데이트 21.11.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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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과 을사오적의 협조로 일어났지만, 이를 한·일 두 나라만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관련된 국가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에 이해관계를 가진 러시아를 전쟁을 통해 제압했다. 러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승리를 확정지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정도까지 된 것은 아니었다.


그해 5월 29일 끝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에 결정적 패배를 안긴 것은 사실이지만, 승전국 일본의 역량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캘리포니아 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니콜라스 랴자놉스키의 <러시아의 역사>는 "일본인들은 재정이 고갈되었고, 승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주력군을 전멸시킨다거나 전쟁을 끝까지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일본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강화회담 중재를 요청한 것도 이 같은 한계 때문이었다.

영국과 러시아

러시아는 당장에는 일본에 패배했지만 한반도와 만주로 언제든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러일전쟁 뒤에도 일본이 러시아를 제치고 한국을 독점하는 데는 여전히 제약이 따랐다.

또 중국 문제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계 최강 영국과 더불어 독일·프랑스·미국 등도 버티고 있었다. 이 나라들은 중국과 한국의 순망치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한국이 망하면 중국도 위험하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한반도를 주시하는 서양열강을 무시한 채 일본이 단독으로 대한정책을 펼 수는 없었다.

그런 일본을 가장 많이 도운 나라는 그해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 작업을 지원한 영국이다.

영국과 러시아가 세계 최강이던 상태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했기 때문에, 이 시점에는 영국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더 높았다. 그런 영국이 일본을 도와 을사늑약을 가능케 만들었다. 을사늑약에 관련된 국가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10년에 <사회과교육> 제49권 제4호에 실린 역사학자 김원수의 '영일동맹과 한일병합의 글로벌 히스토리, 1905~1911'은 "당시 주한영국공사 조오단은 주일영국공사 맥도날드에게 보내는 7월 7일자 사신(私信)에서, 청일전쟁 후에 독립한 한국의 상황을 보면 한국의 정치가에게는 통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최근 10년 동안 한국은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이라고 하지만 이대로는 독립국으로서 유지하는 것은 곤란이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조오단은) 따라서 결국 일본에게 지배되는 것이 한국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최종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인정"했다고 서술한다. 사적인 서신을 통한 주한영국공사와 주일영국공사의 이 같은 의견 조정은 영국 정부의 정책에 반영됐다.

"조오단과 맥도날드의 제안에 따라 외상(外相) 랜스다운도 보호국화가 한국을 위해서도 좋다는 근거로 이에 찬성하였고, 7월 19일의 각의에서 발포어 수상도 일본의 설득을 받아들여 일본 측 요구에 동의한 후 8월 12일에 제2차 일영동맹을 체결하게 되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영국은 한국 보호국화 조약인 을사늑약을 지지했지만, 영국의 라이벌인 러시아는 달랐다. 러시아는 을사늑약을 반대했다. 러시아는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인들이 을사보호조약을 을사늑약으로 부르기 훨씬 전부터 러시아는 그런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러시아의 생각은 한국 보호국화를 지지하는 미국에 대한 입장 표명에서도 나타났다. 2008년에 <한국사학보> 제30호에 실린 역사학자 한승훈의 '을사늑약을 전후한 영국의 대한정책'이란 논문은 "러시아 외상 람스도르프는 주러미국대사 에디에게 미국의 주한공사관 철수 결정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을사늑약의 체결 과정에서 나타났던 일본의 불법성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면서 람스도르프 외상의 발언을 인용한다.
 
"일본은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조약을 강탈했다. 한국정부의 대표는 사인하기를 거부했고, 일본은 스스로 외부(外部)의 인장을 강제로 소유했다. 한국 외부대신의 동의 없이 조약에 도장이 찍혀졌다."
 
러시아 외무성은 런던·파리·베를린·빈·로마·워싱턴 주재 외교관들에게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홍보하고 주재국 정부의 의사를 타진할 것을 지시했다. "이를 국제사회에 공론화하려고 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대한제국 정부보다 훨씬 강력한 방법으로 러시아가 을사늑약 반대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할 수 있었던 데는 러시아의 조력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대한제국을 헤이그 평화회의에 공식 초청한 나라는 다름 아닌 러시아였다.
 

을사늑약이 강제된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 ⓒ 김종성


약 주고 병 준 러시아

하지만, 러시아에 고마워할 이유도, 러시아를 달리 볼 이유도 없다. 고종의 특사 파견이 결국 실패한 것도 상당부분은 러시아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결국 한국을 배반했다. 일본이 병(病) 주고 병 줬다면, 러시아는 약 줬다가 병 주는 식이었다. 위의 <한국사학보> 제30호에 함께 실린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논문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와 러시아의 대한정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06년 10월 9일,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1907년 6월 15일~10월 18일)가 개최되기 8개월 전, 주일러시아공사 바흐메찌예프는 일본 외상 하야시를 만난 자리에서 헤이그 평화회의에 한국의 참가가 불가능해졌음을 통고하였다."
 
러시아에 있었던 이위종과 달리 이상설과 이준은 1907년 4월 20일에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했다. 이상설·이준이 출국하기 훨씬 전에 러시아가 일본에 '한국 대표단은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해줬던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실패를 예언했다. 이런 러시아의 태도가 한 가지 원인이 되어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이 실패했다.

러시아가 돌변한 것은 영국·일본과의 협력 필요성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일본보다 독일 견제에 더 신경을 썼다. 독일을 고립시키기 위한 러시아·영국·프랑스의 협조가 진행되고 있었던 거다.

위의 김원수 논문은 "영국은 1906년 4월에 열린 알헤시라스 국제회의에서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독일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켜 영·러·불 3국간의 협조를 모색함에 따라 영·러 대립의 분위기는 반전되었다"고 설명한다. 1906년에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개선된 게 러시아의 대한정책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강탈된 조약'이라며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호소했던 러시아였다. 그런 러시아가 영·일과 가까워지더니 어느덧 그 일을 망각했다.

최근 보수 언론들의 사설에서는 '줄을 잘 서시오'라는 식의 대(對)정부 권고를 자주 접할 수 있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미국 쪽에 줄을 서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논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줄을 잘 서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을사늑약과 관련된 열강들의 태도는 줄을 잘 서는 것이 과연 한국의 장래를 끝까지 담보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미래 예측이 쉽지 않은 혼란의 시대에 자기중심을 잡는 것보다 줄을 잘 서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일까. 한반도 주변의 미국·일본·중국·러시아 중 철석같이 믿을 만한 나라가 과연 있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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