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일이> 포스터

영화 <태일이> 포스터 ⓒ 리틀빅픽처스

 
1970년 부당한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 싸웠던 노동운동가 고 전태일 열사의 삶을 그린 애니메이션 <태일이>. 전태일 열사 서거 50주기를 맞아 전태일의 꿈을 잇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의 펀딩으로 만들어졌다. 한국 노동운동사에 상징적인 인물인 만큼, 전태일에 투영하는 이미지와 가치들은 제각각 다를 것이고, 이 영화에 기대하는 바도 각자 다를 것이다. 확실한 건 많은 이들이 영화에 기대하는 바가 많고, 나 또한 많은 기대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태일이>가 매우 반갑고, 동시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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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열사라는 묵중해 보일 수 있는 이름 뒤에 가려진 청년 전태일에 주목했다. 열사나 노동운동가가 아닌 친숙한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전태일 열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고, 영화의 문턱을 낮춰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반면 전태일이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 개인적인 서사에 초점을 둬 영화의 현재성이나 노동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는 다소 약해졌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비인간적으로 일했는지, 전태일이 얼마나 많은 고뇌와 좌절과 갈등을 겪었는지도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주변인들의 관계 속에 만들어진 열사
 
 영화 <태일이> 포스터

영화 <태일이> 포스터 ⓒ 리틀빅픽처스


영화 <태일이>는 가장 부담 없이 전태일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따스한 그림체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1970년대 당시 평화시장, 서울의 실제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한 그림체에 눈이 즐거웠다. 사진 위에 그림이 움직이는 듯, 그림이 사진이 되는 듯 오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따뜻한 그림과 인물들 사이에서 연대의 의미는 더욱 크게 전달됐다.

영화는 태일이와 주변 관계를 보여주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태일이가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도하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도우며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으로 이어지도록 말이다. 주변인을 아끼는 태일에게 여공들의 열악한 환경은 외면하기 어려운 문제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돕는다. 때때로 버스값을 털어 어린 '시다'(미싱사 보조)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밤 12시 통금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며 말이다.
 
태일이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열악한 삶을 경험했고, 하루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성실하고 능력이 좋았다. 그가 주변의 아픔에 마음으로만 공감했다면, 자본가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평온한 미래가 준비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유하진 않아도 가난을 벗어나 배고프지 않은 삶은 살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태일이는 그러한 것들보다 사람들 사이의 행복과 관계가 더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본인 혼자 잘나서는, 잘 돼서는 행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태일이를 통해 당장의 모순과 부조리를 바꿔놓지 않는다면, 나도 언제든 억압의 굴레 속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단사 '신씨'나 폐렴에 걸린 '영미'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들이 태일에게 너의 안전과 나의 안전, 너의 권리와 나의 권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게 했을 거다. 전태일의 그런 감각이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연대로 이어지게 한 게 아닐까. 이외에도 전태일 개인의 숭고한 도덕심을 구조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시켜주는 인물이 있다.
 
재단사면 재단사가 할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시다들 풀빵이나 사주고 청소나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보조 재단사는 전태일에게 여공들의 처우를 해결하기 위해선 열악한 노동문제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태일은 자신의 개인적 노력에서 나아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제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불러다 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해당 장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전태일은 처음부터 열사로 태어난 게 아니란 의미가 아니었을까. 시작은 이타적인 마음,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마음을 세상을 바꾸는 불씨로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었고 그 관계 속에서 전태일의 싸움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품고 사는 암울한 시대를 넘어
 
 영화 <태일이> 스틸

영화 <태일이> 스틸 ⓒ 리틀빅픽처스


전태일은 위대한 사람이 맞지만, 위대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태어난 사람은 없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의 일을 자기 일처럼 아파했던 스물두 살의 청년이 있었을 뿐이다. 그 마음을 용기 삼아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고자 했던 간절한 청년이 있었을 뿐이다.

알면 알수록 노동자의 현실은 참담했고, 그 참담함을 해결할 법과 제도가 이미 있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이 문제들에 사회는 무관심했다. 태일이는 수많은 고뇌와 좌절을 겪어야 했다. 걸음을 내디디면 내디딜수록 그의 앞에 장벽이 하나씩 쌓이는 걸 느꼈을 거다. 그리고 그 장벽이 두텁고 거대한 철벽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철벽에 금 하나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거다. 
 
그렇기에 태일이의 죽음은 자의인 동시에 타의다. 이웃을 사랑하고 상식적인 세상을 염원했던 그 마음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암울하고 잔인한 시대였던 거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거대한 철벽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손에 쥐고 싸우는 이들로 가득하다. 25미터 높이의 철탑 꼭대기에서 고공농성과 단식투쟁을 벌여야 하는 노동자,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한 업무를 고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 등. 태일이가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만 했던 그 높은 철탑이 아직도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것만 같다.

영화를 보며 태일이가 유서를 품고 살지 않아도 바꿀 수 있는 사회였더라면, 그런 희망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세상이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태일이가 죽음을 택해야만 했던 그 잔혹한 시대를 우리는 언제쯤 넘어설 수 있을까.

5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전태일이 꿈꾸던 세상에 살고 있나
 
 영화 <태일이> 스틸

영화 <태일이> 스틸 ⓒ 리틀빅픽처스


아쉬웠던 건 영화의 현재성이다. 전태일의 삶에 초점을 맞춰서인지, 이야기가 51년 전에 끝난 것 같았다. 이미 완결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훑고 마음에 새기는 것 같았다. 영화만 봐서는 전태일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왜 우리에게 '열사', '위인'으로 기억되는지 알리는 정도에 그치는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전태일이 누구인지 알리는 정도면 충분할까? 영화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그것대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51년 전과 비슷한 문제를 답습하고 있기에, 전태일이 어떤 삶을 살았고, 왜 노동운동가로서 삶을 마감했는지는 현재의 문제와 연결되어야 한다. 병실에서, 태일이는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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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제가 못 다한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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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태일의 외침으로부터 51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전태일이 꿈꾸던 세상에 살고 있을까? 태일이와 친구들이 외쳤던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문구가 51년 전의 낡은 문구로 읽히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OECD 국가 중 심각한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비정규직과 불안전 노동자로 가득하며, 그 사이에서 올해 1~9월에만 1635명, 하루 평균 6명이 목숨을 잃었다(고용부 '2021년 9월 말 산업재해 발생현황' 공표).

우리는 아직도 "일하다 죽지 않게, 차별받지 않게"가 구호인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업인들의 경영 의지를 위축시킨다"라며 법 손질을 시사했다.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완성된 형태로 끝낼 수 없는 이유다. 진정한 인간다운 삶과 상식적인 세상을 바란 태일이의 꿈은 2021년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에 전국의 수많은 노동조합과 개인 후원자들이 빼곡히 화면을 메운다. '이번에는 우리가 태일이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목소리로 읽혔다. 아직도 싸워서 바꿔나갈 일들이 많이 남아 있음을 수많은 이름들이 증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태일이>가 51년 전의 어느 한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에서 나아가 여전히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떠올릴 수 있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 여전히 목숨 걸고 싸워야만 하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벼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애니메이션 태일이 태일이 전태일 명필름 홍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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