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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조선 건국 이후 이방원이 정권을 잡으면서 만고의 충신으로 떠받들어진다.
▲ 화려하게 꾸며진 정몽주의 묘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조선 건국 이후 이방원이 정권을 잡으면서 만고의 충신으로 떠받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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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원나라 간섭기가 끝나던 시절, 백성을 무자비로 수탈하던 권문세족은 여전히 나라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색을 비롯한 성리학에 밝은 관리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며 이른바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부패한 고려사회를 개혁해보고자 뜻을 모았지만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에 의해서 실패하고, 각자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중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였고 뜻을 함께 하던 동지였다. 하지만 그 귀양길에서 각자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신진사대부는 이성계라는 당대 영웅이자 군벌의 힘을 업고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정도전, 정몽주 둘 인물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를 안정된 나라로 되돌리는 개혁을 하고 싶었고, 정도전은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는 혁명을 꿈꾼 것이다. 그들은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함께 옹립했지만, 각자의 뜻에 따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있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기회로 여겨 그의 오른팔인 정도전을 탄핵하였고, 주도권을 잡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선지교(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되면서 고려왕조와 함께 막을 내렸다.    

만고의 충신으로 기려진 정몽주 
 
정몽주묘역에는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시조인 '단심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을 볼 수 있다.
▲ 정몽주 묘역에 세겨져 있는 그의 유명한 시조 "단심가" 정몽주묘역에는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시조인 "단심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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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묘가 바로 용인 모현읍의 터 넓은 곳에 자리해 있다.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정도전은 훗날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이후로 역적 취급을 받으며 평택 정도전 사당 근처에 가묘만 남아 있는 신세지만 정몽주의 묘역은 크고 화려하다.

그를 죽였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영의정으로 추승하며 만고의 충신으로 기리기 시작했으며 중종 시기에는 성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그를 모시는 서원도 고향인 영천의 임고서원을 비롯해 개성의 숭양서원, 울산 반구서원 등 11개에 이르니 조선시대에 포은 선생의 위상이 어느 정도 인지 짐작할 만하다.      
 
정몽주를 모신 수많은 서원 중, 정몽주 묘역 가까이에는 충렬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서원은 대원군 당시 훼철된 이후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 정몽주를 모신 충렬서원 정몽주를 모신 수많은 서원 중, 정몽주 묘역 가까이에는 충렬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서원은 대원군 당시 훼철된 이후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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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선생의 묘는 본래 개성에 위치했는데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운구 앞에 걸어둔 명정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자리에 떨어져 여기에 안치했다고 전해진다. 천하의 명당 중 하나로 알려진 포은 선생의 묘는 그의 장자인 원사공과 장손 설곡공은 물론 증손녀의 사위이자 당대의 기재(奇才)인 이석형 선생의 묘가 함께 위치한다.

넓은 주차장과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가 새겨진 비석과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고 알려진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의 '백로가'가 새겨진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포은 선생의 묘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 보기로 하자.     

얼핏 보면 왕릉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정몽주의 묘는 그 위상이 실로 대단하다. 근래에 추가된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과 난간, 병풍석을 제외하더라도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라 적혀 있는 위풍당당한 비석은 조선 중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조선이라는 국가에 의해 추앙을 받을 줄 포은 선생은 알고 있었을까?

포은 선생 묘에서 시원한 전망을 즐기고 나서 바로 옆 언덕에 위치한 이석형 선생의 묘도 함께 보시길 추천드린다.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정몽주를 모시는 충렬서원이 있다. 조광조의 심곡서원에 비하면 문화재적 가치도 떨어지고 규모도 작지만 근처에 비교적 맛집이 많고 답사의 여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찾아갈 사대부의 묘역은 조선 후기 영, 정조 시대를 풍미한 남인의 거두 채제공 대감의 묘와 뇌문비이다. 이미 용인에서 위대한 분들의 묘를 어느 정도 보고 난 뒤라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용인시 박물관에 근무하는 해설사의 적극 추천으로 그분의 묘가 있는 역북동으로 이동해 보기로 한다.

수지, 기흥구의 제법 번화한 지역에서 동으로 이동하다 보면 동백지구, 김량장, 삼가동마다 산아래로 바짝 붙어 가늘고 긴 시가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길을 무심코 지나가다 보면 최근 용인의 위상을 알려주듯 거대한 시청 건물이 나의 눈길을 끈다. 앞서 김포 편에서 언급했듯 시청은 시민 가까이에 친숙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정조가 죽음을 슬퍼한 명재상 채제공
 
왕이 신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직접 비문을 지은 뇌문비로서 채제공에 대한 정조에 대한 신임을 엿볼 수 있다.
▲ 채제공 뇌문비 왕이 신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직접 비문을 지은 뇌문비로서 채제공에 대한 정조에 대한 신임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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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택가 뒤편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뇌문비와 그 뒤편의 채제공 묘역을 함께 둘러보며 그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뇌문(誄文)은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손수 고인의 공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지은 조문 형식의 글이고, 뇌문비는 그것을 비석에 새긴 것이라 보면 된다.

정조가 채제공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유일한 뇌문비라 사람들은 비석만 눈여겨보고 가지만 뒤편 언덕에 자리한 그분의 묘소도 함께 봐야 한다. 가파른 계단과 주변 개농장에서 울리는 개 짖는 소리를 어느 정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용인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는 조선 후기의 명재상이자 남인 최후의 거두인 채제공의 묘가 있다.
▲ 조선 후기 명재상 채제공의묘 용인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는 조선 후기의 명재상이자 남인 최후의 거두인 채제공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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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선생은 당시 야당이라 할 수 있는 남인에 속해 있었지만 도승지, 병조 판사,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좌, 우, 영의정을 모두 지냈으니 능력, 성품 어느 하나 빠진 것이 없는 명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도세자의 스승으로서 영조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애썼고, 조정에 얼마 남지 않은 소론과 남인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는 1799년 세상을 뜨고, 1년 후에 정조까지 돌아가시면서 조선은 세도정치와 암흑기로 빠지게 되었다. 그 밖에도 용인에는 수많은 사대부들의 묘가 산재되어 있으니 한번 방문하셔서 그 인물의 자취를 더듬어 가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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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경기도, #경기도여행, #용인, #용인여행,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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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 경기별곡2편>, 경기별곡 3편 저자. kbs, mbc, ebs 등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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