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0 13:32최종 업데이트 22.01.1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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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로 끌려온 조상들의 넋을 기리는 수라바야 시내의 '평화 기원의 탑' ⓒ 동부자바한인회

 
인도네시아 제2도시 수라바야에 소재한 타만 코리아(Taman Korea, 한국공원)에 한국인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탑이 있다. 2010년 건립된 이 탑을 보수하는 공사가 지금 막바지에 이르렀다. 현지 특파원이 보낸 9일 자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르면 오는 21일 완공을 목표로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탑이다. 그런데 탑의 명칭은 '평화 기원의 탑'이다. '징용'이란 글자도 들어가지 못했고 '추모'란 글자 역시 마찬가지다. 대신, '평화'와 '기원'이 들어갔다. 건립 당시 일본 영사관이 처음에는 탑이 건립되는 것을 막고자, 나중에는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탑이 되는 것을 막고자 현지 주민들과 관청을 상대로 압박성 로비를 벌인 결과다.


강제징용을 당한 식민지 민중들은 국적 여하를 불문하고 고난과 시련을 다 겪었지만,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로 끌려간 한국인들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그 사연을 들어보면, '평화 기원의 탑'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명칭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전혀 다른 작업

일본 국가권력과 합작한 전범기업에 의해 끌려간 한국인들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노예노동에 대거 투입됐다. 또는, 사도광산(佐渡島の金山)이나 군함도(軍艦島) 같은 위험한 작업 현장에서 중노동에 종사했다.

이에 비해, 인도네시아 등으로 연행된 피해자들은 성격이 전혀 다른 작업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다. 1941년 12월 8일(미국 시각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함께 발발한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작업이 그것이다. 이 전쟁 초반에 일본이 승승장구함에 따라 대거 속출한 연합국 포로들을 감시하는 역할이 그들의 몫이었다.

일본군은 12월 8일 말레이반도에 상륙한 데 이어, 10일에는 필리핀 북부, 25일에는 홍콩에 침입했고, 이듬해인 1942년 1월 2일에는 마닐라, 2월 15일에는 싱가포르, 3월 9일에는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현지의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이 백기를 들었다.

2005년에 <한국일본교육학연구> 제10권 제1호에 실린 김보림 총신대 교수의 논문 '한일 역사교육의 미완 - 남방 포로수용소 조선인 포로감시원 양칠성을 중심으로'는 연합군 포로의 규모를 일본 학계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이렇게 요약했다.
 
이에 따른 포로 수는 인도네시아에서만 9만 3천여 명으로 자바섬에 있어서만도 8만 2618명의 포로가 나오게 되었다. 화란(네덜란드)군 6만 6219명, 호주군 4890명, 영국군 1만 626명, 미국군 883명이 그 내역이었다. 화란군은 자바섬 이외에 약 1만 8000명, 의용군이 1만 5000명이 있었다.
 
이렇게 단시간에 대규모로 발생한 포로들을 관리할 목적으로 일본군이 고안해낸 것이 한국인과 타이완인(대만인)들을 포로감시원으로 징발하는 것이었다. 이 일에 동원된 한국인 숫자에 관해 위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5일 사이에 실제로는 자발적 응모나 강제동원 등의 방법으로 모아진 3223명에 이르는 청년들이 포로수용소 감시 요원을 훈련시키는, 부산 서면에 있는 노구찌 부대라고 하는 특수 훈련부대로 입영되었고, 2개월여에 걸쳐 상당히 혹독한 군대 훈련을 받았다. 1942년 8월 19일 밤 남방으로 파견되는 3223명의 조선인 군속들은 수송선으로 개조된 브리스벤호 등 9척 남짓의 배에 올라탔다.
 
군수공장이나 탄광으로 끌려간 한국인들은 일제 패망 뒤에 피해자 신분을 갖게 됐다. 반면, 외형상 일본군과 다를 바 없는 포로감시원들은 일본군과 한 묶음으로 분류돼 '가해자'로 규정되는 어처구니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한국 교포들이 운영하는 '재(在) 인도네시아 동부자바 한인회' 홈페이지에 실린 '한국인이라면 꼭 가봐야 하는 평화 기원의 탑'이라는 기사는 "태평양전쟁 당시 이곳 인도네시아까지 강제 동원된 군인·군속노무자·포로감시원 등 우리 한인이 약 2천 3백여 분이 있었다"라며 "이분들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사망했으며, 일부는 일본인으로 오해돼 처벌 받기도 했다"며 억울함을 표시한다.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희생된 피해자들의 운명도 억울하지만, 살아남아 일본인으로 오해를 받은 피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는 전범이라는 딱지가 붙게 됐다. 1950년 1월 7일 자 <동아일보> 기사 '쟈바수용소의 한인'은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인도네시아의 쟈바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한국인 포로 61명은 지난 12월 25일 쟈바를 출발하여 오는 17일 일본 동경 즈가모형무소에 수용 예정이라는 바, 그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징용으로 남방 포로감시원으로 종사한 까닭에 종전 후 억울하게도 10년 이상의 형을 받고 있는 만큼 외무부 당국으로서는 이들을 신속히 석방키 위하여 연합군 최고사령부 및 주한미국대사관과 교섭할 만반의 준비를 강구 중이라 한다.
 
전범으로 몰린 한국인들 중에는 연합국 감시 하에 일본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1950년대 후반에 풀려난 이들도 있지만, 일부는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 이들도 있었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같은 A급 전범은 기소도 되지 않고 석방됐다. 그런 뒤 자유민주당(자민당)을 결성하고 3년간 총리까지 역임했다. 히로히토 일왕(천황)과 기시 노부스케 등이 받았어야 할 처벌을 엉뚱한 한국인들이 받은 것이다.

국적 없는 설움

인도네시아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는 일제 패망 뒤 그곳에 남아 온갖 고생을 다 겪은 이들도 있었다. 1962년에 축구팀을 이끌고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김윤기 대한축구협회장 앞에 갑자기 나타난 네 명의 한국 동포도 그런 이들이었다. 김만수씨를 비롯한 이 네 명의 사연을 담은 그해 6월 5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인니의 한국인'은 이렇게 보도했다.
 
'자카르타의 코리언은 무국적자였습니다'라고 김씨는 이들의 비애를 들려주었다. 태극기를 처음 본다며 신기한 표정으로 향수에 젖기도 한 이들은 국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명의로 떳떳하게 사업도 못하고 조국에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이다. '국적 없는 설움만 없으면 자원 많은 이 아열대에서 판칠 수 있건만!' 하던 그들의 푸념을 김씨는 전해준다.

일제 때 징용에 붙들려 그곳에 갔다는 이 네 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그곳 여자와 결혼해서 한국사람 같지 않은 2세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차림새며 먹는 것, 사는 것이 완전히 그곳에 동화되고 있었으며, '조국이 너무 멀고 또 오고가는 사람도 없고 향수마저 느끼지 않고'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포로감시원이 되어 인도네시아 등으로 끌려간 한국인들은 군수공장이나 광산에 끌려간 한국인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제국주의의 탄압과 억압을 경험했다. 그중 상당수는 고국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고초를 겪었다.

그런 이들을 기념하고자 2010년에 세운 것이 타만 코리아의 탑이다.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그 탑이 일본 정부의 로비에 의해 '평화 기원의 탑'이란 이름으로 서 있다. 피해자들의 절절한 사연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본 정부가 로비를 벌인 결과다.

그들을 기억하는 탑이 '평화 기원의 탑'이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탑이 제대로 된 명칭을 갖도록 무엇보다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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