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2 20:25최종 업데이트 22.02.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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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5억 원. 오스템 임플란트에서 자금 담당 업무를 맡았던 직원이 빼돌린 회삿돈 총액이다. 이 직원은 잔액 증명서를 위조하고 회사 자금을 개인 계좌와 증권 계좌로 이체하는 등의 방식으로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 

감도 오지 않는 엄청난 액수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했는데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강동구청 투자유치과에서 근무했던 공무원이 공금 115억 원을 횡령해 지난 24일 긴급 체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역시 대부분의 돈을 주식 투자에 썼고, 후임자가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제보할 때까지 1년 넘게 아무도 그가 돈을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뉴스를 보며 몇 년 전 봤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은행원의 공금 횡령 사건을 다룬 <종이달>. 

시작은 10만 원
 

남편과 지하철에서 신문을 보고 은행에 출근하던 평범했던 리카의 삶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 ㈜영화사 오원

 
시작은 1만 엔(10만 원)이었다.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결제를 하려는데 돈이 모자랐다. 이미 골랐던 화장품 중 하나를 뺀 상황이었다. 더는 체면 깎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객 돈이 들어 있는 봉투에서 10만 원을 뺐다. 바로 현금 인출해서 채워 넣으면 되니까. 어차피 돌려줄 돈이니까. 그때 리카는 알았을까. 10만 원에서 시작된 돈이 나중에 수억 원으로 늘어날 줄.

우메자와 리카(미야자와 리에)는 4년 차 은행원이다. 전업 주부였던 리카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다 얼마 전 계약직 사원이 됐다. 영화의 배경은 1994~1995년. 은행원이 고객 집에 직접 찾아가 업무를 보던 시절이다. 늘 돈을 만지는 일이기에 직원들은 옷차림이나 생활 수준이 바뀌지 않았는지 서로 예의 주시한다.   

돈 많은 진상 고객 히라바야시의 집에서 그의 손자 코타(이케마츠 소스케)를 만나게 되면서 리카의 인생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긴다. 학교 등록금 때문에 빚을 졌지만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코타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리카는 히라바야시가 은행에 맡긴 돈 2000만 원을 빼돌려 코타에게 빌려주기로 한다.  

학창 시절 아빠 지갑에서 돈을 훔쳐 수해로 힘들어하는 다른 나라 아이들에게 기금을 보냈던 것처럼, 시작은 분명 선의였다. 비뚤어진 선의. 리카는 할아버지가 마땅히 빌려줘야 할 돈을 자신이 대신 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어차피 예금 만기 날짜 돌아오려면 몇 년 남았으니 그때 다시 채워 넣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코타에게는 자신의 여윳돈을 빌려주는 거라 둘러댄다. 코타는 돈 받기를 망설이면서 말한다. 이 돈을 받으면 우리는 달라질 거라고. 그러자 리카는 자신 있게 말한다. 
 
아무것도 안 달라져. 200만엔(2000만 원) 정도로.

하지만 코타의 예감처럼 그 후 리카의 삶도, 두 사람의 관계도 완전히 달라진다. 리카는 고객 돈에 점점 더 대담하게 손을 대고 횡령 수법도 다양해진다. 혼자 살고 있는 치매 노인 고객을 속여 상품에 가입하게 만들고, 컬러 프린트기를 사서 집에서 직접 문서 위조를 한다. 다들 조금씩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동료 행원의 말에 리카는 애써 죄책감을 지운다. 

리카의 욕망은 점점 커진다. 싸구려 모텔에서 관계를 갖던 리카와 코타는 호텔 스위트룸에서 호캉스를 즐기고, 수십만 원짜리 손목시계에도 만족하던 리카는 억대 명품 시계를 코타에게 선물한다. 손에는 늘 쇼핑백이 들려 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 해서 착실히 돈을 갚던 코타는 점점 자립심을 잃어가고 학교도 그만둔다. 

돈은 달콤하고 친절하다. 그리고 절대 만족을 모른다. 아무리 돈을 빼돌려도 리카의 씀씀이를 따라갈 수 없다. 돈은 써도 써도 모자라다. 처음에는 언젠가 되돌려 놓을 생각으로 장부를 정리하던 리카는 이제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횡령했는지조차 모른다. 있지도 않은 금융 상품을 만들어 고객 유치에 매달리고, 사금융 대출까지 알아본다. 

리카의 얼굴에는 점점 표정이 사라진다. 본인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가짜와 진짜는 경계가 희미해진다. 빼돌린 돈으로 코타와 함께 호의호식하는 이 삶이 리카에게는 현실 같기도 하다. 가짜 현실을 빼앗기지 않으려 리카는 필사적이다. 리카는 뻔뻔해진다.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
 

돈은 달콤하고 친절하다. 그리고 절대 만족을 모른다. ⓒ ㈜영화사 오원

 
영화는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작가는 몇 개의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원작 소설을 읽은 것은 6년 전, 마드리드에서였다.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에서 남편과 싸우고 홀로 호텔 방에 돌아와 <종이달>을 읽었다. 남편과 다툰 이유는 자라 때문이었다. 바다에 사는 자라 말고 스페인 스파(SPA) 브랜드 자라(ZARA). 

여행만 가면 쇼핑이 더 하고 싶어졌다. 분명 한국에서 여행용 옷을 잔뜩 새로 사갔는데 지나가는 여행객들의 옷차림을 보거나 쇼핑몰에 진열된 옷을 보면 물욕이 피어올랐다. '해외까지 왔는데 좀 과감한 옷을 사볼까, 생각보다 날씨가 더우니 많이 더울 때 입는 옷을 좀 살까, 저런 모자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옷은 여기서밖에 못 사지, 가격이 너무 저렴한데,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정도도 못 사?' 돈을 써도 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스페인에는 자라 매장이 정말 많았다. 매장마다 전시된 옷이 다르고 옷 종류도 조금씩 달랐다. 보이는 자라마다 다 들어가 보고 싶었고 남편은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지금까지 너 배려해서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간 곳 많았어"로 싸움은 시작됐다. 

소소한 쇼핑 중독은 계속 있었다. 명품백은 없지만 에코백은 100개 있는 물욕. 특히 옷과 책에 집착했다. 물건을 고르고 결제 버튼 누를 때까지는 행복한데 택배가 도착할 즈음에는 내가 이걸 왜 샀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물건을 살 때만 해도 이것만 사면 삶의 질이 확 달라질 것 같은데 막상 물건이 손에 들어오면 또 다른 것, 또 다른 것이 갖고 싶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물욕 없는 척, 돈 같은 건 관심 없는 척 보이려 애썼다. '내가 명품이나 비싼 걸 사는 것도 아니고', '남들도 이 정도는 다 쓰고 살아' 자위했다. 습관처럼 쇼핑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게다가-하고, 아래층을 오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좇으며, 리카는 생각했다-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쇼핑하고 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저렇게 많은 종이가방을 들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너무 절약했다. 내 옷차림에 너무 무신경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좀 전에 끓어올랐던 죄책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 책 <종이달> 

책 <종이달>에는 리카를 중심으로 리카의 동창, 리카의 첫사랑 남자, 리카의 사회 친구 등 리카와 연결고리가 있는 인물들의 서사가 교차한다. 돈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돈을 아끼는 인물도, 돈을 마구 쓰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도 모두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은 리카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리카에게서 희미한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와 책을 다시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나와 리카는, 우리와 리카는 얼마나 다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리카는 끝까지 가봤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방향이었든.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늘에 뜬 달을 손으로 지우고 있는 리카 ⓒ ㈜영화사 오원

 
영화에는 소설에는 없는 캐릭터 스미(고바야시 사토미)가 등장한다. 25년 차 은행원이자 모범과 성실 그 자체인 인물 스미는 리카의 부정을 밝혀낸다.  

리카가 코타와 처음으로 밤을 함께 보낸 다음날 아침, 지하철 플랫폼에서 리카가 하늘에 뜬 하얀 달을 손으로 지우는 장면이 나온다. 리카는 그날을 회상하면서 스미에게 말한다. 가짜니까 행복했다고.  
 
진짜같이 보여도 진짜가 아닌, 처음부터 모든 게 다 가짜. 가짜니까 망가져도, 망가뜨려도 상관없잖아요.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아서 '아, 난 자유롭구나' 하고.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걸 한 거예요.  -영화 <종이달>

그러자 스미는 반문한다. 행복해서 횡령한 거냐고. 믿어준 사람을 배신하고 돈을 훔쳐서 마음대로 쓰는 게 자유냐고. 스미는 일갈한다. 
 
분명 돈은 가짜일 수 있죠. 종이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는 자유로워질 수 없어요.

소설에서는 코타와 처음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을 묘사하며 '만능감'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 

무해한 얼굴로 가장 가까운 남편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던 리카는 이 만능감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돈으로 만능감을 사기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만 있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다들 믿으니까. 어쩌면 리카는 고객 돈에 손을 대고 코타와 하룻밤을 보내기 전의 삶을 가짜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지루하고 평범해서 망가져도, 망가뜨려도 상관없는 가짜. 

자신을 제어하고 있던 고삐를 풀고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을 쓰며 리카는 자유로웠을까. 거액의 돈을 횡령해 금괴를 사서 숨겨 놓고 가족 명의로 몰래 부동산을 샀던 직원은 자유로웠을까.

오스템 임플란트 사건도 강동구청 사건도 아직 단독 범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큰돈을 횡령하려 했던 것은 아닐 거라고 말한다. 리카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hongmilmil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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