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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 중 하나를 뽑자면 주막에 모여 술을 마시는 모습일 것이다. 사극에 나오는 주막은 조선 중기 이후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주막은 술만을 판매하는 곳은 아니었다.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식사를 제공하고 나그네를 위하여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도시의 주막에서는 술과 음식을 파는 집이 대부분이었지만 시골에서는 식당과 숙박업을 겸한 것이다.

이러한 주막이 전국적으로 많지는 않았던 듯하다. 1866년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는 우리나라에서 밥, 떡, 죽 장수 등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1883년에 온 독일인은 "지구 상의 왕국 중 유럽인 여행자에게 알맞은 호텔, 찻집, 그 밖의 유흥 시설을 찾을 수 없는 곳은 서울 뿐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푸념과 다르게 사실은 다양한 음식점들이 존재했다.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1915)에는 음식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식사만을 하는 곳을 국밥집(탕반옥, 湯飯屋), 약주만을 파는집을 약주집(藥酒屋), 탁주만을 파는 집을 주막, 하등의 음식점을 전골집(煎骨家)이라 하고, 주막에서는 음식도 팔고 숙박을 겸업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풍속엽서 속 주막의 모습
▲ 일제 강점기 ‘주막 ’모습 조선풍속엽서 속 주막의 모습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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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은 음식과 술, 숙박을 겸하는 곳이었지만 대체로 술을 파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곳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주막을 제외하고서도 내외주점, 색주가, 병술집, 목로주점 등의 술집들이 존재했다.

내외술집은 주인과 손님이 서로 만나지 않고 내외를 한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내외술집은 생활이 궁핍한 여염집(일반백성의 살림집) 여인이 바느질품만으로는 도저히 자식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어서 호구지책으로 주인 여자가 외간 남자와 바로 얼굴을 대하지 않고 내외를 하며 파는 술집이었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 사회에서 남녀 내외로 인해 생겨난 술집의 형태이다.

내외술집은 겉으로 보아서는 보통의 가정집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종이에 '내외주가(內外酒家)'라고 한자로 쓰고 그 둘레에 술병 모양으로 테를 둘러 손님이 내외주가임을 알게 하였다. 내외술집은 구한말에 많이 늘어나서 서울 청진동 일대에 열 집 건너 한 집 비율로 늘어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요리옥(요릿집)이 보편화되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성이 시중을 드는 술집도 있었다. 양반층에게는 일정한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술 시중을 드는 기생이 있는 기방이 있었다면 색주가는 젊은 여자가 나와서 노래도 하고 아양을 부리며 술 시중을 드는 술집을 말한다. 즉, 접대부가 있는 술집이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 안에 여자를 두고 술을 파는 색주가(色酒家)를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다 세종 때 허가가 내려졌다. 이유인 즉, 중국을 가기 위한 사신들이 무악재를 넘어오면 첫 번째 국립여관인 홍제원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사신(使臣)과 부사(副使) 등의 양반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기생을 부르는 등 환송연을 베풀어 주는 일들이 많았다. 반면 사신을 수행하는 아랫사람들은 그들끼리 술잔만 들게 되어 불평이 많았다.

이를 목격한 허조(許稠) 정승이 "홍제원에 노래하는 여자를 배치하여 사신을 수행하는 아랫사람들도 위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세종에게 건의했고 이후 홍제원에 색주가를 두도록 했다는 것이다. 유만공(柳晩恭)의 '세시풍요(歲時風謠)'(1843년경)에는 "젊은 계집이 있는 술집을 색주가라 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세기까지 존재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 술을 '배달' 시켜먹었다고?
 
개항기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풍속화
▲ 색주가 모양 개항기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풍속화
ⓒ 독일 함부르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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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집은 개화기 때부터 크게 성행한 형태이다. '병술'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병에 담은 술이란 뜻이다. 이 병술집은 갑자기 손님이 와서 술대접을 해야할 때 이용하거나 술을 팔지 않는 국밥집에서 손님이 심부름꾼을 시켜 술을 사다 마실 수 있는 편리한 형태로 각광을 받았다. 병주가에서는 탁주, 백주, 과하주, 소주를 헌주가(약주제조 판매)나 소주가(소주제조 판매)에서 사와서 소매하지만 탁주만은 자기가 직접 만들어 파는 곳이 많았다.

주막이 숙박을 겸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면 한잔 술을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집이 목로주점이다. 목로주점은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목로, 木爐)에 술을 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목로주점에서 술을 마실 경우에는 술 한잔에 안주도 하나만 먹어야 했다.

지금은 술집에서 술값과 안줏값을 각각 따로 계산하지만 목로주점에서는 술값에 안주 하나의 값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목로주점을 다른 말로 '선술집'이라고 불렀다. 목로주점에는 원래 앉는 의자가 없고 손님들은 모두 서서 술을 마시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술집들이 조선 전기부터 구한말까지 다양하게 존재하였고 시기 시기마다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러한 술집들은 구한말에 와서 크게 변하게 된다. 바로 요리옥(요리집)의 출연 때문이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까지 성행했던 술집 및 유흥업소의 한 종류에 요리옥이 있다. 객실을 갖추고 술과 요리를 팔았는데 가무하는 기생이 동석하기도 했다. 요리옥의 시초와 관련되어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1898년 광교 남쪽에 수월루가 처음 언급되었고 이후 취향루, 혜천탕, 청향다관 등 많은 요리옥 또는 유사한 형태의 업체들이 만들어졌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명월관'은 궁중의 음식 관련 책임자였던 안순환이 1903년에 고급 요리옥을 차려서 궁중 음식을 일반에게 내놓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명월관의 술은 궁중나인 출신들이 담근 술을 쓰는 바람에 인기를 끌었다.

초기에는 약주, 소주 등 조선 전통술에 일본 술 정도를 판매를 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샴페인, 위스키, 브랜드, 포도주 등 서양술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처럼 대다수 요리옥의 메뉴는 국내외 음식과 각종 술을 판매하는 형태였다.
 
조선경성 명월관본점 현관
▲ 명월관 본점 조선경성 명월관본점 현관
ⓒ 수원광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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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전통주를 판매하는 호텔과 고급 음식점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대부분은 와인, 샴페인 그리고 위스키를 취급했다. 이러한 전통주의 모습이 과거 요리옥에서 외국술들에 의해 서서히 자리를 내주었던 전통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전통주들은 상대적으로 대중적이고 저렴한 공간에서 대부분의 판매가 이루어진다. 대중적이라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급이라는 이미지 구축을 위해 서양 술 판매에 힘을 쏟은 요리옥의 차별화된 판매 전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우리 스스로가 과거부터 전통주의 가치를 낮게 본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지금 전통주들의 품질은 향상되었고 고급스러운 제품들도 많아졌다. 전통주들도 대중적인 곳을 넘어서 호텔이나 고급 식당에서 판매가 되는 술이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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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연구를 하는 농업연구사/ 경기도농업기술원 근무 / 전통주 연구로 대통령상(15년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 진흥) 및 행정자치부 "전통주의 달인" 수상(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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