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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영(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이 '전쟁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 반드시 사수해야 할 권역'으로 설정했던 절대국방권은 1944년 하반기에 붕괴됐다. 일본의 국민들은 거리낌없이 일본의 하늘 위에서 폭탄을 뿌려대는 연합군 항공기의 비행을 목도해야만 했다. 신주불멸(神州不滅), 즉 일본은 신의 나라이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으로는 몰락으로 치닫는 일본의 암울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짊어진 제국 일본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오판으로 빚어진 패전의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히 항전하여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한다면 명예로운 강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기대로 전쟁을 이어가고자 했다. '본토결전'과 '일억옥쇄'는, 그렇게 눈 먼 이들 사이에서 믿어야만 하는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사실상 전 국민을 희생시키고서라도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광기 어린 구호가 한 사회의 상식이 되고 만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시작된 가혹한 전투
  
자폭을 거부하고 후방으로 도망친 병사들을 일본군 장교가 참수하려는 장면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연출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당시 전투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호평을 받았다.
▲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스틸컷(2006년) 자폭을 거부하고 후방으로 도망친 병사들을 일본군 장교가 참수하려는 장면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연출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당시 전투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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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겨져서는 안 되는 본토결전의 첫 시위가 당겨진 곳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1250km 떨어진 이오섬(硫黄島)이었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유황도가 되는 이 섬은 말 그대로 화산재로 뒤덮여 유황이 들끓는 척박한 땅이었고, 크기 역시 서울 여의도의 2배 면적에 불과했다.

그러나 샘물조차도 솟지 않아 빗물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 이오섬은 일본 신화에 묘사되는 일본 본토의 일부였기 때문에, 당국에 의해 반드시 사수해야만 하는 신성한 국토로 선전됐다. 거기에 더해 사이판에서 출격하는 미군기를 사전에 탐지할 수 있는 요충지라는 점에서 그 방어의 중요성은 더더욱 높이 평가됐다.

이미 일본은 수많은 20대 청년들을 전장에서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이오섬 방어에 투입된 2만1천 여 병력들 중 다수는 소년병들과 30대 이상의 장년들이었다. 이들은 섭씨 60도에 달하는 지열과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가스를 견뎌내며, 섬 구석구석을 관통하는 지하요새를 건설하는 작업에 투입됐다.

가혹한 섬 환경, 견디기 어려운 중노동에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지만, 이오섬 수비대 사령관 쿠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忠道) 중장은 장차 상륙할 미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야 한다는 믿음으로 진지구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가 휘하 병력 전원에게 배포한 이른바 '감투의 맹세'(敢闘の誓い)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혀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1. 우리는 전력을 다해 지켜낸다.
2. 우리는 폭약을 안고 적의 전차에 몸을 던져 그것을 분쇄한다.
3. 우리는 계속해서 적중으로 돌격해 적을 몰살한다.
4. 우리는 일발필중의 사격으로 적을 쏘아 쓰러뜨린다.
5. 우리는 10명의 적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죽어도 죽지 못한다.
6. 우리는 마지막 한 명이 되더라도 '게릴라'로 남아 적을 괴롭힌다.
(梯久美子, 2005, <散るぞ悲しき> 新潮社, 64p)
  
화산재와 유황만이 있는 이오 섬은 사람이 살기 척박한 공간이었다. 이 작은 섬 위에서, 일본군 2만 여 명과 미군 7천 여 명이 전사했다.
▲ 미군의 함포 사격을 받는 이오 섬 스리바치 산 화산재와 유황만이 있는 이오 섬은 사람이 살기 척박한 공간이었다. 이 작은 섬 위에서, 일본군 2만 여 명과 미군 7천 여 명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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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철저항전을 우려했던 미군은, 상륙에 앞서 이오섬에 엄청난 물량의 폭격을 퍼부었다. 미 해병대 공간전사 <이오지마>에 따르면, 이오섬 상륙 직전 74일간 미군이 이오섬에 투하한 폭탄의 양은 약 6860톤, 12월부터 1월까지 다섯 번에 걸친 함포사격의 격발수는 16인치 포 203발, 8인치 포 6472발, 5인치 포 1만5251발에 달하였다.

미군측에서 보면 섬 자체가 사라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맹폭이었다. 그러나 이오섬 수비대는 미군의 맹폭에도 불구하고 진지구축에 박차를 가하였다. 미군은 정찰기를 통해, 폭격을 개시한 시점에서 450개였던 주요진지가 상륙 직전에는 750개로 늘어난 것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폭격을 통한 일본군 무력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길은 보병이 직접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뿐이었다.

이렇듯 미군의 이오섬 침공이 가시화되고 있던 시점에서, 정작 이오섬 사수를 명령했던 대본영에서는 내부 문서에서 돌연 '이오지마는 결국 적에 손에 넘어가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으로 급선회했다. '일본 본토의 항공기지와 거리가 먼 관계로 항공전력 발휘가 곤란하다', '미군의 일본본토 공격기지로서의 가치가 적다'라는 게 이유였다.

물론 이오섬 방어를 사실상 포기하면서도, 이오섬 수비대를 후방으로 물리는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이오 섬은 본토결전을 위한 첫 단추에 지나지 않았고, 수비대의 '옥쇄'는 당연히 치러야 할 희생에 불과했다.

국가가 버린 병사들, 화염속에서 사망

이오섬을 포기한다는 대본영의 변덕은, 섬 지하진지 구축에 필요한 자재를 비롯해 부대 유지에 필요한 물자 전반에 있어 극단적인 결핍을 초래했다. 본토의 무책임한 태도에 절망한 쿠리바야시 중장은 "어선이라도 좋으니 보내달라"고 호소했지만 소용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오 섬 전투가 종결될 때까지 본토에서 이오섬 방어를 위해 도움을 준 것이라고는 전투 초반에 이뤄진 '가미카제 공격'이 전부였다.

본토로부터 버림받은 이오섬은 1945년 2월 19일, 미 해병대의 대대적인 상륙을 맞이하게 된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이오 섬 수비대가 전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본토의 안전을 위해 전투를 최대한 길게 끌며 미군에게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한다는 스스로의 사명을 저버릴 생각이 없었다.
 
쿠리바야시 중장이 지휘하는 이오 섬 수비대는 복곽진지를 중심으로 한 지구전을 통해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전투 막바지에 잔존 병력을 이끌고 돌격하다가 전사하였다.
▲ 이오 섬 수비대를 지휘한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사후 대장 추서) 쿠리바야시 중장이 지휘하는 이오 섬 수비대는 복곽진지를 중심으로 한 지구전을 통해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전투 막바지에 잔존 병력을 이끌고 돌격하다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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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을 감내하며 구축했던 지하진지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됐다. 이오섬 수비대는 좁은 해안 교두보에 미 상륙군이 가득 차기를 기다렸다가 십자포화를 퍼부으며 적의 피해를 극대화시켰다.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일본군의 저항은 일선의 미군 지휘관들 뿐만 아니라 백악관까지 당황시켰다. 5일이면 이오섬을 접수하기에 충분하다고 자만했던 미군은, 로켓 발사기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중화기를 투입하고도 하루에 겨우 50m 정도만을 전진할 수 있었다.  
화염방사기와 백린탄을 이용한 화공은 미군이 이오 섬 전투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주요 전술이었다.
▲ 일본군 진지를 제압하는 미군의 화염방사전차 화염방사기와 백린탄을 이용한 화공은 미군이 이오 섬 전투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주요 전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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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바야시 중장의 지휘는 뛰어났고 일본군의 지하진지는 촘촘하게 잘 짜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의 저항에 고전하며 힘겹게 진격하던 미군은 급기야 화염방사기는 물론 비인도적 재래식 무기의 대명사로 평가되는 백린탄까지 쏘아대며 일본군의 지하진지를 소탕해나갔다.

일본군은 야습을 벌이며 미군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탄약과 식량이 고갈되는 상황에서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본토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 믿었던 이오섬 수비대 장병들의 대부분은, 결국 자신들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으며 화염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3월 26일, 더 이상의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자 쿠리바야시 중장은 잔존 병력들을 이끌고 최후의 돌격에 나섰다. "편안하게 나라를 위해 순교하라"는 그의 마지막 훈시대로, 함께 돌격에 나선 일본군 병력은 전멸을 면치 못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미군은 이오섬 전투에서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섬 곳곳에는 동굴에 고립된 수천 명의 일본군 패잔병들이 남아있었다. 이미 이오섬이 미군에 의해 접수됐음에도 패잔병들은 마지막까지 싸우라는 광기 어린 명령에 얽매여 차마 투항을 선택하지 못했다.

족쇄
  
"역시 포로가 되면 부모형제가 어찌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가족까지도 '비국민'이라고 지탄 받을테니까요. 저 혼자였다면 어디로든 도망갔을 겁니다.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도망갈 수 없죠."
▲ 이오 섬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는 시모노 씨(2010년 인터뷰) "역시 포로가 되면 부모형제가 어찌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가족까지도 "비국민"이라고 지탄 받을테니까요. 저 혼자였다면 어디로든 도망갔을 겁니다.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도망갈 수 없죠."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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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섬에서의 싸움은 이미 어떤한 고차원적인 명분이나 전략적 의의도 갖지 못하는 것이 됐다. 굶주리고 목마른 그들은 오직 식량과 식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야습을 시도했고, 이는 강도높은 소탕전으로 되돌아왔다. 아무 의미 없는 죽음들이 그렇게 공식적인 전투 종결 이후에도 이어졌다.

미군은 일본군 패잔병들을 투항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했고 실제로 이에 응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패잔병들은 결국 죽음에 이를 때까지 헛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국가가 자신들을 버렸음에도, 국가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라는 명령은 끝내 풀리지 않는 족쇄가 되어 비극적 운명을 강요했던 것이다.

2만1천여 명에 달했던 수비대 병력들 중 살아서 포로가 된 것은 천 명 남짓에 불과했다. 이오 섬 최후의 일본군이 항복한 것은 전쟁이 끝난 지 한참 지난 1949년 1월 2일의 일이었다.  
 
이오 섬에 방문한 아베 총리는 '전몰자들의 유골이 그대로 묻혀있는 활주로를 밟는 것이 죄송하다'는 취지로 무릎을 꿇었다. 이오 섬 방문 관련 행보로 아베 총리는 애국과 보훈을 중시한다는 호평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작 이오 섬 수비대를 버리고 죽음을 강요했던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는 사죄하지 않았다.
▲ 이오 섬 방문 당시 활주로에 무릎을 꿇는 아베 신조 당시 총리(2013년) 이오 섬에 방문한 아베 총리는 "전몰자들의 유골이 그대로 묻혀있는 활주로를 밟는 것이 죄송하다"는 취지로 무릎을 꿇었다. 이오 섬 방문 관련 행보로 아베 총리는 애국과 보훈을 중시한다는 호평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작 이오 섬 수비대를 버리고 죽음을 강요했던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는 사죄하지 않았다.
ⓒ 일본국 수상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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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일본군, #이오 섬, #아시아 태평양 전쟁, #미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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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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